시로 하나 된 우리
모두가 시인이다
<에세이>는 교사의 마음이 느껴지는 공감 에세이로 수많은 사건 사고를 겪으면서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코너입니다.
- 글. 김진향(수원 영일초교 교사)
하늘이 유독 푸르고 맑던 가을날이었다. 창밖으로만 단풍과 하늘을 구경하기에는 아쉬웠던 날.
“얘들아, 우리 나갈까?”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좋아요!”
여기저기서 함박웃음이 번졌다.
마침 아무도 없는 운동장은 우리 차지였다. 가을을 실컷 느껴보라고 했다. 신나게 뛰어다니며 교실 밖으로 나온 기쁨을 누리는 아이들, 삼삼오오 모여앉아 수다를 떠는 아이들까지 다들 즐거워 보였다. 나도 잠시 낙엽을 밟으며 감상에 젖어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선생님, 이거 좀 보세요!”
이끄는 손길을 따라가니 색색의 낙엽으로 큰 하트 안에 ‘5–1반’이라고 만들어 놓았다.
“우와~ 예뻐라.”
“사진 찍어주세요.”
“알았어. 윤미는 이걸 주제로 쓰면 되겠네.”
좋아하는 내 모습을 보고 은근히 마음을 놓는 눈치다. 평소 내 속을 많이 긁어놓던 아이인데 이런 감성으로 내 마음을 녹이다니. 너도 속마음은 이렇게 고왔구나.
시를 쓸 시간이다. 큰 나무 밑에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이미 써놓은 시가 있다면 고치고 다듬어도 좋고, 지금 느끼는 이 감정으로 새로운 시를 써도 좋다고 했다. 잠시 고민하던 아이들이 어느새 진지한 모습으로 쓰기 시작했다. 적당히 서늘한 바람이 아이들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고 낙엽이 뒹굴며 우리 곁을 맴돌았다. 야외에서 시를 쓰는 아이들, 가을바람과 햇살, 운동장, 낙엽, 그 순간 모든 것이 시였다. 아이들은 자신이 쓴 시를 돌아가며 낭송했고 우리는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지금 이 시간이 아이들 마음에 뭔가 좋은 기억으로 남길 바라며 수업을 마쳤다.
들어와 급식을 먹고 자리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송주가 곁으로 왔다.
“선생님, 요즘 시가 너무 좋아서 엄마에게 시집을 주문해달라고 했어요. 그 시집이 어제 도착했거든요. 진짜 좋은 시가 있는데 제가 들려드릴게요.”
순간 마음속에서 찌르르하고 감동이 밀려왔다.
선생님에게 시를 읽어주려는 생각으로 학교에 왔을 아이를 생각하니 뭉클했다. 시 수업이 이렇게 우리를 따뜻하게 이어주었구나. 아, 좋다. 더 좋았던 것은 동시집을 만들어 온 아이가 두 명이나 있었다. 보통 고학년이 되면 글쓰기를 싫어해서 최소한의 것만 해오는데 자발적으로 여러 편의 시를 써서 동시집을 만들어온 아이들을 보니 놀라웠다. 전에 했던 ‘자기만의 시집 만들기’ 활동이 너무 좋아서 시를 계속 썼단다. ‘이정수 시인의 데뷔 이후 두 번째 시집’이라고 당당하게 적은 표지를 보고 한참을 웃었다. 이미 마음은 진짜 시인이다.
글쓰기는 치유의 효과가 있다고 했던가. 평소 속을 잘 드러내 보이지 않는 원석이는 시로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일기장에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찡한 시를 써놓기도 했다.
이렇게 곳곳에서 창작되고 있는 아이들의 글을 혼자 보기가 아까웠다. 다 같이 오래 볼 수 있는 학급 시집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일이 시를 골라 편집하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공을 들였다. 최대한 진짜 시집처럼 보이게 만들어 시집을 출간한 시인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인쇄된 학급시집이 도착한 날, 교실은 들뜬 분위기였다. 시집을 받고 처음에는 흥분했다가 어느덧 조용해진 아이들. 자기 시를 먼저 찾아 읽고 친구들의 시를 읽느라 진지하게 앉아서 한참 동안 시집을 뒤적였다. 뿌듯해하는 표정들을 보니 그동안 수고한 보람이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현이가 시집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선생님, 사인해주세요.”
“어? 사…사…사인? 내 책도 아닌데?”
“에이~ 선생님이 만들어 주신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리고 우리 반 시집이니까 선생님이 사인해주세요.”
옆에서 듣고 있던 지수도 한마디 거든다.
“진짜네? 그러면 되겠다. 선생님, 사인해주세요.”
듣고 보니 간단한 편지와 이름을 써서 주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한마디 했다.
“와, 이렇게 내 사인받으려고 기다리는 거 보니까 진짜 작가가 된 기분이야.”
“진짜로 작가 되시면 되잖아요.”
아, 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좋겠다. 아이들은 늘 나를 앞으로 나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시집을 나누어준 다음 날 정수가 등교하자마자 그 큰 목소리로 흥분해서 말했다.
“선생님! 제 시집이 팔렸어요.”
“뭐라고?”
학급 시집을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 하신 아빠가 만원에 사셨다는 것이다. 아이도 아빠도 얼마나 즐거웠을까. 어느덧 시인의 마음으로 순간을 잡아내고 사소한 것들에도 눈길을 주게 된 아이들. 이 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책장에 꽂혀 있는 시집에 문득문득 눈길 주기를, 가끔씩 꺼내 읽기를, 그리고 오래오래 시를 써 담아두기를. 너희는 이제 진짜 시인이니까.
*김진향 교사는 함께 읽고 배워서 나누는 게 즐거운 열정 가득한 선생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