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환 교사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어려웠던 가정형편에 도움이 되고자 안정적인 직장을 빨리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달리던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터닝포인트가 찾아온 것은 군대를 다녀와 복학한 이후였다.
“당시 교사 정년을 단축하면서 교사 인원이 부족하니까 중등교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3개월만 보수교육을 받으면 초등교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중·초 임용제도를 시행했습니다. 당시 저는 예비역으로 나이도 많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부당함과 교대생으로서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후배들과 함께 거리로 나갔죠.”
그러나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정치권에서도, 일반 시민에게서도 지지는커녕 전혀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에 부딪혔던 것이다. “당시 시민들 반응은 그게 뭐 어때서? 중등교사 자격증이 있으면 3개월 정도 공부하고 초등학생들도 가르칠 수 있는 거 아냐? 교대생이 특별한 게 뭐가 있어? 였습니다. 충격적인 건 그 말이 아니라 그 말에 제가 대꾸를 잘 못 했다는 사실이었어요.”
초등학교 예비교사로서의 자존감이 추락했고 그는 발걸음을 국회도서관으로 돌렸다. 관련 국감자료, 정책자료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읽고 공부한 그가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하나였다.
“교사들도 전문성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교대 3학년 때부터 교육동아리를 운영하면서 직접 교육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한 그는 ‘농활’ 대신 ‘교활’을 나갔고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을 교육 현장에 접목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그를 대표적으로 설명하는 PBL(Project Based Learning)을 만났던 것도 그즈음이었다.
교사가 아닌 학습자(학생들)를 중심으로 다양한 가상 혹은 현실의 문제를 다루되 그것을 인식하고 파악하며 해결 과정을 도출해 나가는 학습법은 아이들을 ‘기존과는 다르게’ 가르치고 싶었던 그의 열망과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PBL의 권위자였던 경희대학교의 강인애 교수 논문과 여러 사례를 참고해서 교생실습 수업에 처음 PBL을 적용해보았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망했습니다(웃음). 잘 안됐어요. 애들은 정말 좋아했는데 선생님들 반응이 너무 안 좋았던 거죠. 애들이 통제가 안 되고, 판서도 안 되고, 교과서 내용도 정확히 전달해야 하는데 그런 게 다 빠졌으니 선생님들께 뭘 하는 거냐고 질타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익숙하지만 2000년도 당시만 해도 통합교과적인 교육과정 재구성이나 PBL 수업 등이 매우 낯설었던 분야였습니다.”
그러나 정준환 교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PBL 내내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뇌리에 남았고 아직은 초보자니까, 이제 시작이니까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결심을 다지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교사로 정식 발령을 받자마자 바로 경희대 석사과정에 들어가면서 그토록 선망하던 강인애 교수의 제자가 되었다. 스승이 귀찮을 정도로 따라다니며 질문하고 파고들며 제안했던 그는 그간의 연구와 성과, 학위를 인정받아 2012년도부터 경희대 겸임교수로 임명되었고 지금껏 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앞에서부터 반복적으로 나온 ‘PBL’이란 수업에 어떻게 적용되는 것일까? 정준환 교사에게 설명을 들었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5학년 학생들의 PBL 수업을 직접 참관해 보기로 했다. 오늘 아이들의 수업은 역사교과 과정이 담긴 PBL이다. 역사를 주제로 보드게임을 만들었다는데 사전에 설명을 들었음에도 정확히 실체가 잡히지 않는다.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들 모두가 경계 없이 환하게 웃으며 낯선 방문객들을 반긴다. 5학년이면 3.5춘기쯤 되는 시기일 텐데도 모두가 해맑고 순한 눈빛을 가진 게 인상적이다. 6개 모둠별로 앉은 아이들 앞에는 제각각 다른 보드게임이 놓여 있었다.
정준환 교사의 제안대로 게임 운영자 한 사람이 남고 나머지 모둠 인원들이 자리를 바꿔가며 다른 모둠에서 만든 보드게임을 체험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보드게임의 제작 수준이 상당히 놀라웠다. 퀴즈를 맞히고 주사위를 던지면서 나온 패에 따라 중간 중간 벌칙이나 게임을 해야 하고, 쉬어가기도 해야 하니 아이들 모두의 몰입도가 엄청나다. 모둠별로 터지는 웃음소리와 비명도 만만치 않았다. 보드게임에서 다룬 역사는 모둠별로 주제가 달랐다.
어느 모둠은 인물을, 어느 모둠은 근현대사를, 어느 모둠은 선사시대를 게임 안에 집어넣은 것.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을 통해 아이들이 역사를 자연스럽게 접하되, 맞추면 맞추는 대로, 틀리면 틀리는 대로 꽤나 즐겁게 대응한다. PBL 수업의 특이한 점은 통상 아이들의 수업 시간에는 반드시 있기 마련인 ‘이탈자’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요즘’ 시대에 엎드려 있거나 딴짓하는 아이들이 단 한 명도 없다니, 놀라움을 넘어 충격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정말 PBL의 효과일까? 10년이 넘게 PBL 수업을 해온 정준환 교사가 느낀 아이들의 변화는 무엇이었을까?
“제가 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건 제 제자가 어떻게 성장했는지입니다. 2004년, 2005년도에 PBL 수업으로 5, 6학년을 함께 보낸 아이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시험 위주의 공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기본적으로 저희반 아이들이 타 반보다 시험성적이 평균 10점이 높았고 학습부진아들의 성적은 정말 깜짝 놀랄 만큼 좋아졌지요. 그때 제가 깨달은 게 공부라는 건 제가 가르치고 전달해서 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 자존감을 높이고 어떤 도전에 대해 자신감을 얻게 되면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이었어요. 가정폭력에 시달리면서 공부는 물론, 감정조절도 안 되는 아이도 있었는데 PBL 수업을 할 때는 만들기에 몰입하더라고요. 점차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기 시작한 그 아이는 결국 이천의 도자기학교에 진학을 하더니 지금은 도자기회사에 입사해 당당한 사회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제게는 모두 지금도 1년에 한 번씩 찾아와 정을 나누는 소중한 제자들이 되었죠.”
정준환 교사는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도 계속 공부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늘 역사 보드게임 수업을 통해서 얻고자 한 교육 효과는 ‘학력’이 아닌, ‘역량’입니다. 역량은 자기주도적인 학습환경에서 기를 수 있는데, 그러한 학습능력은 철저히 실제적인 과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을 통해 향상될 수 있어요. 학습자에게 비판적 사고력, 창의력, 문제해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주고자 하는 게 제 수업의 목표인데 그 과정에서, 즉 보드게임을 만들면서 A는 창의력에 방점을 찍고 B는 설계를 잘하고 C는 규칙을 꼼꼼하게 만듭니다. 또 D는 비판적 사고력으로 주어진 주제를 넣거나 빼고 바꾸죠. 각자 개인의 역량을 발휘했을 때 팀워크도 나오는 겁니다. 협력을 통한 역량 발휘 또한 PBL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에요. 거기서 제 역할은 독려, 동기부여, 격려입니다. 그 이상을 하면 아이들은 내가 한 게 아니라 선생님이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정준환 교사는 학교생활로 바쁜 와중에도 강의와 집필, 재미교육연구소 운영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특히 재미교육연구소는 교사뿐만 아니라 박물관 학예사, 교육콘텐츠 개발자 등 학교 안팎의 교육 전문가들이 협업해서 '박물관, 미술관, 마을 단위의 교실 밖 PBL 프로그램'을 만드는 곳으로서 '앞으로의 학교가 형식교육과 비형식교육의 경계를 넘어 지역중심의 네트워크가 되어야 한다'는 정준환 교사의 철학에 동의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의기투합한 단체이다.
“아이들 수업을 바꿀 수 있었던 것도 PBL 모형을 통해서 구현한 콘텐츠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어떤 콘텐츠를 양산해내느냐에 따라 교육이 바뀔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확신합니다.”
모든 이론을 실천 현장에서 만들어 가고 실천 현장에 다시 이론을 적용하면서 선순환 과정을 구현하고 싶다는 정준환 교사.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두 가지이다. 교과서보다 훨씬 우월한 콘텐츠를 교사가 직접 만드는 것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교육을 통해 자기 삶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자존감 높은 아이로 자라는 것이다. 그 목표를 위해 오늘도 내일도 부지런히 공부하고 탐색하며 연구하는 그. 정준환 교사는 교대생 시절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교사로서의 ‘전문성’을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치열하게 달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