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힘이 세다. 현시대가 공간에 대해 더 자주, 더 많이 이야기하게 된 것은 공간이 한 인간의 삶을 바꿀 만큼 위대한 저력을 발휘한다는 걸 긴 시간들이 증명했기 때문이다. 마지초등학교는 여기에 하나를 더 얹는다. 어른들이 만들고 학생들이 들어가는 공간이 아니라, 학생들이 직접 공간 만들기에 참여하는 곳이라는 보기 드문 특별함을 말이다.
개교 20주년을 코앞에 둔 마지초등학교는 외관상으로는 전혀 대단할 게 없는 평범한 학교다. 20년 전에 세워진 학교 건물이 주는 전형성과 딱딱함 때문에 우리가 왜 이곳에 왔는가, 잠시 어리둥절할 지경이다. 학교에 들어서자 공부를 하기 위한 사각형 교실과 이동하기 좋은 긴 복도 역시 예상에서 한치도 비켜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마지초등학교의 이름을 빛내는 것일까?
“우리 학교는 교내의 버려진 공간, 죽은 공간을 학생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어른들이 예쁘게 잘 꾸며놓은 공간에 학생들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그 공간을 꾸미고 만듦으로써 그곳의 주인이 된 거죠.”
방과후 학교는 학생들에게 놀이터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유혜경 교장이 밝은 얼굴로 설명했다.
마지초등학교는 사실 20년밖에 되지 않은 연차 때문에 증개축 대상이 아니다. 즉, 예산을 받아서 학교를 리모델링하거나 재건축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20년 전 시설을 그대로 쓸 수는 없으니 변화는 확실히 필요했고 이는 학생들이나 교사들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닌,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서 공간을 재구성하는 작업. 마지초등학교가 남과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 이유였다.
마지초등학교에는 신기한 곳이 많다. 세련되고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인간미 넘치는 향기가 가득한, 그래서 머무르다 보면 저절로 행복해지는 그런 느낌을 주는 공간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저 멀리서 학생들이 꺅꺅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지초의 공간혁신을 주도하고 지금도 학생들과 그 여정을 함께하고 있는 김황 교사는 그런 소음들이 예사롭고 편안하다. 도란도란쉼터에서는 신발을 벗은 채로 신나게 뒹굴며 노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해묵은 게시판과 장식장이 덩그렇게 놓여있었던, 그래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던 곳이 학생들의 의견과 아이디어로 살아있는 실내 놀이터로 탈바꿈한 것이다.
다른 복도에 위치한 공간에서는 신나게 블록놀이를 하는 학생들이 보인다. 교실의 녹색게시판에 보드판을 붙이고 그곳에 블록을 끼워가며 다양한 모양을 만드는 학생들도 신기한데 이곳에는 더 놀라운 비밀이 숨어있었다. 보드판, 의자, 데크까지 모두 학생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것이다. 내가 만든 나의 공간이라는 학생들의 자부심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를 지녔으니 이곳에 대한 학생들의 애정과 아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놀라움은 계속되었다. 학생들은 창고에 박혀 있던 책상을 꺼내 탁구대를 만들었고 마음껏 끌고 다니며 놀 수 있도록 바퀴도 달았다. 5층 복도는 그렇게 햇볕이 잘 드는 탁구장이 되었고 그곳의 유리창 역시 학생들의 낙서가 가득한, 유니크한 공간으로 거듭났다. 학생들이 버스킹을 할 수 있는 무대가 있는 푸른솔꿈나눔터, 직접 만든 장난감과 카트가 있는 달보드레 교실을 거쳐 마침내 엉뚱공작소에 도착했다. 마지초등학교를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 마지초의 정체성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엉뚱공작소에는 학생들이 시끌벅적 모여있었다. 전동 톱으로 나무판을 자르고, 전기 드릴로 나무에 구멍을 내고, 또 한쪽에서는 반죽을 저어 와플을 만드느라 바쁘고 또 어떤 학생은 친구와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쑥덕거린다. 역시나 이곳에도 학생들이 만든 책상, 걸상이 놓여있고 벽면에는 3D프린터, 노트북, TV를 비롯해 테이블 드릴, 청소기, 전동 드릴, 바이스, 클램프 등 다양한 목공도구들이 가득 차 있다. 그 모든 도구들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건 교사가 아니라 바로 학생들이다.
“이곳을 보신 분들은 학생들의 안전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우리 학생들은 작업하다가 살짝 다치면 응급 상자를 꺼내서 스스로 처치해요. 조금 큰 상처는 바로 교사나 양호선생님한테 말하도록 교육을 받았고요. 우리 학교는 학생들이 스스로 대응하는 걸 허용해줍니다. 이건 학생들에게 작은 위험을 통해 큰 위험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우는 매우 중요한 교육이에요.”
값비싼 물건들이 가득한 이곳 엉뚱공작소는 문을 잠그지 않는다. 이 역시 교육이다. 우리들의 공간이니 우리가 관리를 해야 하고 혹여 뭔가를 잃어버리더라도 그건 우리들이 감당해야할 몫이라는 걸 학생들에게 알게 하는 것이다.
학습공간이 아닌, 생활공간이 되어버린 이곳에서는 매일 기적이 일어나는 중이다. 이제 학생들은 스마트폰 대신 드릴을 잡고, 게임을 하는 대신 자기 방에 놓을 피규어 장식장을 만든다. 입을 다물고 지내던 학생들은 친구들과 대화를 시작하고, 외동이었던 학생들은 언니, 오빠, 동생을 만들었다. 무엇이든 말할 수 있고, 무엇이든 시도해 볼 수 있으니 학생들의 합리적인 문제의식과 논리 역시 콩나물처럼 쑥쑥 크는 중이다. “원래는 같은 학년끼리만 놀았는데 여기서는 다 같이 친구가 돼요.”, “무엇이든 만들 수 있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친구들이랑 같이 힘을 모아서 뭔가를 만드는 게 재미있어요.” 학생들이 취재진을 둘러싸고 자기 얘기를 들어달라고 열심히 목청을 돋운다. 사춘기 초입의 까칠함 따위는 아예 없는 모습이다. 예산을 듬뿍 써서 공간을 바꾸는 것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다. 김황 교사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머리를 써야 했다고 너털웃음을 짓지만 마지초등학교가 진짜로 바랐던 것은 사실 하나였다. 모델하우스 같은 멋진 공간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진짜 공간을 학생들이 스스로 만들어 갖게 되길 바란 것이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그런 학생들의 능력을 믿어주고 원하는 교사들이 모인 곳. 마지초등학교의 공간은 그렇게 살아 펄떡이고 있었다. 다시 한번, 공간은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