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속 끓는 피를 하늘에 뿌린
공군 창설의 주역
‘최용덕 장군’
대한민국 공군 출신이라면 한 번쯤 불러봤을 노래 ‘공군가’. 단순성과 간결성, 서정성 등이 집약된 명곡으로 평가받으며 지금도 공군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공군가는 놀랍게도 1951년 6·25 전쟁 도중에 만들어졌다. 당시 이 노래를 지은 사람은 바로 최용덕 장군이다. 젊은 시절 독립투사 의열단원으로 열성적인 삶을 살고, 훗날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주역이자 6·25 전쟁 참전용사가 되어 격동의 근현대사를 두루 겪었던 산 증인, 최용덕 장군을 만나본다.- 글. 정상규(「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의 저자)
최용덕은 1898년 9월, 한성 동소문외계 성북동(현재의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아버지는 대한제국 군의관 최익환(崔益煥)이다. 그는 1913년 한성 봉명학교에 입학해 근대적 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중국으로 망명했는데 북경 숭실중학교에 이어 중국육군군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단기서(段祺瑞, 중화민국의 최고권력자) 군의 제2사단에서 복무했는데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의 항일무장투쟁에 큰 자산이 됐다.
1919년 중국에서 3·1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최용덕은, 군대를 전역하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다수의 한인독립운동가와 유학생들이 거주하던 중국 북경지역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청년단(1920년 평안남도 지역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 단원 모집을 위해 활동했다. 이로 인해 1919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중국군 헌병 사령관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그는 1921년 4월 이후, 독립운동가 김원봉이 단장으로 있는 의열단에 참여해 독립운동에 나섰는데 당시 김원봉과 접촉하여 천진에서 ‘조선무산자동맹회(1922년 한성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주의운동단체)’ 회장 김한과 함께 폭탄 확보와 투척 계획 등을 협의하며 의열단원 김상옥*의 의거를 지원했다.
거사 준비의 핵심은 폭탄을 확보한 후 국내로 이송하여 안전하게 보관했다가 의거를 수행할 의열단원에게 마지막으로 전달해 줄 적임자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최용덕은 이 폭탄 확보와 운반 과정에 힘을 보탰다.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이 독립운동가 탄압의 상징이자 본거지였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 이후 일본경찰에 의해 은신처가 발각되어 3시간 동안 치열한 총격전을 전개하다 마지막 남은 탄환으로 현장에서 자결했다. 당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김상옥의 투탄의거는 영화 「밀정」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의 뒤에는 숨겨진 조력자, 최용덕이 있었다.
1923년 최용덕은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면서도 군인의 길을 다시 걸으며 다가올 독립전쟁을 대비했다. 그는 중국 보정항공학교에 입교한 뒤 1924년부터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하며 일제와 맞섰다. 1923년 ‘북경한교동지회(1920년대 중후반 북경 지역의 한인들이 조직하여 운용한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해 국치기념회 개최, 선전문 배포, 『도보(앞잡이)』의 발간을 통해 독립의식을 고취하면서 일제에 대항했고, 북경에서 ‘민족유일당운동(1920년대 후반 만주와 중국 지역에 분립되어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기 위해 전개한 운동)’에 참여했다. 이 시기에 최용덕은 대한독립청년단 군무부장이자 한국인 최초의 전투기 비행사로 추정되는 서왈보 장군의 영향을 받아 앞으로 전쟁의 승패는 하늘에 달려 있으며, 항공전력 육성이 조국 독립 쟁취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간파했다.
그 후, 최용덕은 1926년 국민당정부에 참여해 ‘국민혁명군(1924년 중국 국민당이 군벌에 대항하여 중국을 통일하기 위한 군사조직)’으로 복무하게 된다. 이로 인해 장제스(중화민국의 군인, 정치인으로 1928년부터 1975년까지 중화민국의 지도자)의 신임을 얻고, 1937년 중일전쟁 당시 남창기지사령관을 역임하는 등 항일전선에서 크게 활약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정세는 격변했고, 항공기가 전시에 활약하는 것을 지켜본 최용덕은 미래 독립전쟁의 승패는 공군력에 좌우된다는 점을 이미 통찰했고, 1920년부터 1940년까지 중국에서 공군과 관련한 거의 모든 학교와 부대를 거치며 군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키워 나갔다.
1940년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중국군 상교 계급(현 대령 계급)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항공건설위원회 주임, 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장 등의 요직을 역임하며 한국과 중국의 가교 역할을 하는 동시에 조국 광복을 위하여 만주에서 끝까지 항일 전쟁에 전념했다. 그는 광복 후 1년 뒤인 1946년 조국으로 돌아와 대한민국 공군의 모태가 되는 항공건설협회 회장에 추대되었는데 특히 군 항공부대 창설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우리 손으로 설계 제작한 항공기가 우리 공역에서 날아야겠다. 인류의 행복과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다른 나라 공역에서도 날아야겠다. 인류문화의 발전을 따라 모두가 항공생활을 해야겠다.
그러나 1947년 미군정은 중국 항공대의 창군 원로로서 당시 국민당 정부의 군대인 국민혁명군(국부군으로도 불림) 항공위원회 지휘부로 공군 상교까지 역임한 최용덕의 경력을 인정하지 않았고,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 입교하여 미국식 군사훈련을 다시 이수하라는 불합리한 조건을 내걸었다. 이는 장성급 장교가 훈련병으로 재입대하라는 말이었다. 당연히 이 무리한 요구에 동료 군인들은 거세게 반대했다. 그러나 최용덕은 오히려 다른 간부들을 설득했고, 결국 6명의 동지와 재입대하여 1948년 4월 참위(현 소위 계급)로 다시 임관했다. 이때 최용덕의 나이 51세였다. 당시 최용덕을 포함해 재입대를 선택한 7명(최용덕, 장덕창, 이영무, 박범집, 김정렬, 이근석, 김영환)을 대한민국 공군에서는 ‘공군 창설 7인’으로 부른다.
최용덕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되어 국방력 건설에 힘썼고, 특히 대한민국 공군이 육군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1950년 5월 공군 준장으로 승진됨과 동시에 공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고, 6·25 전쟁 당시 제3대 공군사관학교장(1950.5.1.~1952.12.10.)으로 재임하며 김포지구 경비사령부를 편성, 김포기지를 방어했다. 또한 1952년 12월 1일 전임인 김정렬에 이어 제2대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해 6·25 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공군의 항공 작전을 총괄했다. 전쟁이 한창일 때 최용덕은 만주에서 독립운동할 때부터 꿈이었던 우리의 손으로 만드는 항공기 제작에 착수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결국 1953년에 한국 최초의 경비행기 ‘부활호’가 제작됐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크게 기뻐하며 직접 ‘부활(復活)’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직접 친필 휘호를 내렸다.
그는 공군에서 물러날 때까지 공군참모총장 고문으로 공군의 전력 강화와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는데, 특히 「공군의 전통」, 「공군가」 등을 제정하여 공군 후배들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지표를 남겼다. 이 두 노래는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공군 훈련소에서 모든 장병이 교육받고 부르는 노래다. 1954년 12월, 공군 중장으로 퇴임한 최용덕은 그 후 1960년 체신부 장관, 1961년 중화민국 대사를 지냈고, 우연과도 같게 1969년 대한민국이 광복했던 날인 8월 15일에 영면했다.
- 최용덕(崔用德) 장군
(1898.9.19. ~ 1969.8.15.) - - 독립운동가
- -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초대 국방부 차관
- - 1950년 제3대 공군사관학교장
- - 1952년 제2대 공군참모총장
- - 1955년 공군 중장으로 퇴임, 건국공로훈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총 3개의 국가 훈장 수훈
- - 1960년 체신부 장관
- - 1961년 중화민국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