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교과서로 접한 과학은 어렵기만 했다. 정규 교육 과정을 마치고 성인이 된 후에는 ‘과학은 나와 상관없는 분야’로만 여겼다. 정말 과학은 일상과 거리가 먼 학문일까. 김범준 교수는 이런 의문에 ‘아니’라고 답하듯 우리 삶 속 다양한 주제를 물리학과 연결 짓는다. 그가 2015년에 쓴 「세상 물정의 물리학」은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회 현상을 과학적으로 다루었고, 2019년에 출간한 「관계의 과학」에 서는 복잡한 세상의 규칙과 패턴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 전체 의미에 주목했다. 교통 정체나 친구 사이처럼 평범한 일상을 물리학과 연결할 수 있다는 점에 흥미를 둔 독자들도 많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행복한 물리학자’라고 말한다.
“물리학은 크게 실험물리학과 이론물리학으로 나뉩니다. 제가 연구하는 통계물리학은 20세기 초반에 완성된 이론 물리학의 하나예요. 전체를 이루는 수많은 구성요소가 다른 요소와 상호작용하면서 다른 결과를 내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물리학 연구는 학술적인 내용이 많아서 대중이 접근하기 쉽지 않은데, 통계물리학은 예외적으로 대중이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분야입니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상호작용’을 일상용어로 풀이하자면 ‘관계’다. 그래서 그는 “통계물리학을 다소 과장해서 표현하면 ‘관계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통계물리학의 응용 분야인 복잡계 연구는 교통과 도시, 생태, 경제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할 수 있다. 그만큼 물리학의 방법론을 적용할 수 있는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개인적으로 ‘함께’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통계물리학을 쉽게 설명하면 ‘여럿이 함께하면 전체가 달라지는 것을 재미있어하는 분야’인데요. 여기서 말하는 ‘함께’는 물리적인 입자일 수도,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일 수도 있습니다. 과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우리가 함께하는 세상이 더 나아지지 않을까요?”
김범준 교수는 “과학자들은 과학을 지식의 나열이 아닌 생각의 방식으로 본다”고 전한다. 그 역시 이러한 관점에 동의한다. 과학 교과서에 나온 주기율표를 외운다고 해서 과학을 안다고 할 수 없지만, 그 원리를 이해하면 세상을 좀 더 합리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얼마 전 언론에서 독감 백신 문제를 크게 다루었는데요. 독감 백신과 백신을 접종한 고령자의 사망이 인과관계인지 상관관계인지 따져보지 않은 기사가 많았습니다. 사람들도 기사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였고요. 합리적인 사고를 하려고 애쓰면 이런 기사를 접했을 때 사실 여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과학을 알면 온라인에 떠도는 잘못된 정보를 걸러낼 수 있고, 거짓 광고에 속지 않는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음이온 침대 사건도 충분히 의심할 수 있었던 사례다. 전기를 연결하지 않았는데 음이온을 계속 방출하는 것은 방사성 물질이기 때문이다. 그 전에 음이온이 건강에 좋다는 속설 자체도 증거가 없다.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그런데 생각과 판단은 과학적으로 하더라도 호기심은 엉뚱한 데까지 닿아야 한다. 그는 미국의 물리학자 이시더 래비 가 말한 ‘물리학자는 인류의 피터팬’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은 채 호기심을 유지하는 피터팬 처럼, 끊임없이 솟아나는 호기심은 물리학자가 계속해서 연구를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실제로 그저 궁금해서 시작한 연구가 학술적으로 의미를 지닐 때도 종종 생긴다. 사람의 체질량지수를 구할 때 몸무게를 키의 제곱으로 나누는 이유를 직립보행에서 찾은 사례, 커피숍이나 학교 같은 시설물이 분포하는 패턴의 차이 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다룬 연구 등은 그가 집필한 대중서는 물론 실제 학술지에도 실렸다.
이처럼 그는 통계물리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다양한 사회 현상과 자연 현상을 다루고 있다. 이색적인 주제를 다룬 연구 결과를 두고 누군가는 ‘그게 무슨 물리학이냐’고 되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물리학의 경계를 입자나 물리 시스템으로 한정 짓지 않는다. 그에게 물리학은 ‘세상을 보는 합리적인 시선’인 까닭이다.
하나의 주제를 진득하게 파고드는 연구자들도 많지만,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주제를 발굴하며 호기심을 충족한다. 호기심에서 시작한 연구를 이어가다 처음 염두에 두었던 답을 찾았을 때의 짜릿함. 그 기분을 잊을 수 없어 계속해서 새로운 호기심 거리를 찾아 나선다.
“저는 제가 재미를 느끼는 일을 연구합니다. 수시로 관심사가 달라지거든요. 뜬금없이 물고기의 길이와 몸무게를 궁금해하다가 친한 친구를 찾는 과학적인 방법을 알아보고 싶어 하고요. 사실 저의 연구 방식은 연구자들에게 추천할 만한 자세는 아닙니다. 그래도 저는 학생들에게 재미없으면 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전날 컴퓨터로 프로그램을 돌린 결과가 궁금해서 빨리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연구가 재미있으려면 학생들도 연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가 운영하는 통계물리연구실에서는 자주 난상토론이 펼쳐진다. 학생들 각자가 자기만의 아이디어를 꺼내 놓으며 연구의 방향을 찾아가는 것.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가르침 덕분일까. 학생들은 혹여 틀릴까 봐 두려워하지 않고 거침없이 자기 생각을 표현한다. 흥미로운 주제로 연구를 하면서도 가끔은 고생해서 한 연구 결과를 학술지에 실을 수 있을까 싶어 고민하기도 한다. 그래도 다행히 지금까지 연구한 결과는 대부분 학술지에 실렸다.
인공지능이 빠르게 발전하는 요즘, 그는 인간의 고유성에 관해 자주 생각한다. 오랫동안 인류의 난제로 남아 있던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 수식을 인공지능이 완성할 수도 있다는 가정도 해본다. 그런 미래가 왔을 때 과학자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명쾌한 답은 없지만 물리학자의 호기심이 어떻게든 또 다른 길을 찾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