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 좋은 생각」은 급격히 변화하는 교육 환경 속에서 삶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제시하는
멘토 회원들에게 귀 기울이고 교육 철학과 인생의 가치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눠보는 코너입니다.
아프리카 식량난 해결을 위한 연구와 교육의 실천 농업계의 슈바이처이자,
세리키 아그베(Seriki Agbe: 농민의 왕)
코넬대학교 명예교수 한상기 박사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식물은 죽어서 삶을 남긴다. 식물이 살아 꽃 피고 열매 맺고 사그라지는
자연스러운 일을 해내야 사람과 동물도 살며 싹 틔우고 열매 맺는 일을 할 수 있다. 50여 년 전, 한상기 박사는 이러한
생(生)과 생의 연결을 위해 나이지리아로 떠났다. 굶주린 땅 아프리카에 식량을 선물한 동양인 추장, 한상기 박사를 만났다.
글
이성미 /
사진
김수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를 포기하고 선택한 아프리카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식량이고 제일 아쉬운 것이 사랑이다.” 한상기 박사가 쓴 「작물의 고향」 앞 장에 적혀있는 말이다.
식량은 사랑 앞에 놓일 수 있는 유일한 말일 것이다. 문화(culture)라는 말도 라틴어 ‘cultura’, 즉 ‘토지를 경작한다’라는 말에서
시작되었다. 식량이 있기에 우리는 살며, 문화를 탄생시키고, 또 사랑할 수 있다.
1933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한상기 박사는 농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고 느끼며 자랐다. 이런 어릴 적 경험은 한 박사를 농학자의
길로 인도했다.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식물유전육종학 박사학위를 딴 후 모교인 서울대학교 농과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던 어느 날,
한상기 박사앞에 새로운 갈림길이 놓였다. 하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초청으로 그곳에서 식물유전육종학을 연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이지리아 국제열대농학연구소(IITA)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의 주식 작물을 개량하는 것이었다. 내전이 끝난 뒤인 1970년
나이지리아에서는 많은 사람이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농토는 피폐해졌고,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주로 재배되는 세계 8대
작물 중 하나로 8억 명이 주식으로 삼고 있던 카사바는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로 병들어 말라 죽어갔다. 주식(主食)이 사라진 나라에는
죽음의 그림자만 짙게 깔렸다. 다행히 미국의 포드 재단과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아 나이지리아에 국제열대농학연구소가 개소를 준비하면서
연구에 뛰어들 인재를 찾고 있었다. 한상기 박사는 1971년 나이지리아 경유 런던 행 비행기표를 사서 우선 나이지리아로 떠났다. 황폐한
땅과 굶주린 사람들을 보니 두려움보다 사명감이 앞서 고개를 들었다. 작물의 존부(存否)는 인간의 존부와 직결된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식량 안전에 기여하고 국위를 선양하겠다’라고 적은 휴직계를 서울대학교에 내고는
머나먼 땅으로 향했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느라 종이를 이어붙인 한상기 박사의 여권
한상기 박사와 그가 개발한 슈퍼 카사바
아프리카 사람들을 살린 슈퍼 카사바 개량
나이지리아에서 한상기 박사는 본격적으로 바이라스 병과 박테리아 병에 강하고 다수성인 카사바 연구에 돌입했다. 병을 극복할 수 있는
강한 형질, 저항성 유전자원을 찾기 위해 카사바의 원산인 브라질로 건너가 관련 전문가를 만나고 종자도 얻어왔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종(種)을 수집한 덕분에 마침내 그는 결국 내병성이 강하고 다수성인 품종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끈질긴 연구 끝에 1976년 내병다수성
카사바 품종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병에 강하고 잘 자라는, 말 그대로 슈퍼 카사바였다. 개량에 성공했으니 이제 다음 과제는 농촌지도체계
없는 아프리카에 내병다수성 카사바를 농민들에게 보급하는 것이었다. 빠르고도 확실한 보급을 위해 한상기 박사는 개량된 카사바 줄기를 트럭에
싣고 나이지리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보급하기도 했다.
“죽어 있는 카사바 밭이 보이면 멈춰서 거기다 카사바 줄기를 꽂고 왔어요.그런 우리를 보고 처음엔 농가에 주술을 걸었다’ 라며 화를 내는
주민들도 있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거기서 좋은 카사바가 나타나니 나중에는 ‘신의 은총’으로 여기더군요.”
한상기 박사의 노력 덕분에 카사바는 주민과 마을, 시장을 통해 급속도로 퍼질 수 있었다. 한 박사는 나이지리아에서 식량 문제를 다룬 당시
기사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1974년 1월만 해도 나이지리아 국영지 전면에는 ‘세계가 식량난에 봉착해 있다’라는 헤드라인이 내걸렸다. 하지만
1976년 11월, 우려는 희망으로 바뀌어 있었다. 국영지 전면에는 ‘카사바가 많이 생산되고 있으니 안심하라’라는 글과 함께 ‘한상기 박사가
저항성이 강한 카사바 종을 만들었다’라는 설명이 덧붙어 있다. 조용하고도 놀라운 혁명이었다.
추장을 상징하는 옷을 입고, 지팡이를 손에 든 한상기 박사의 모습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수여된 다양한 상패들
농민의 왕, 그리고 아프리카 농업교육의 아버지
슈퍼 카사바를 개량한 일로 한상기 박사는 휴직 신청을 할때의 다짐처럼 국위 선양을 이뤘다. 1982년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을,
1996년에는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 ‘자랑스런 서울대인상’을 수상했다. 1982년 영국 기네스(Guinness) 과학 공로상,
1984년 국제구근작물학회 제1회 우수 봉사상을 받고, 영국 세계 농업 명사록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의 업적은 1980년대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교과서 ‘생활의 길잡이’와 2011년 6학년 1학기 교과서 ‘국어 읽기’에도 소개됐다. 한 박사의 일대기를
다룬 책 「까만 나라 노란 추장」은 2001년 9월부터 2022년 2월까지 52쇄나 재발행됐다. 그는 “청주 한씨 종친회에 가면
‘문중에서 교과서에 실린 이는 한석봉 선생과 한상기 박사뿐’이라며 자랑스러워한다”라고 말하며 웃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뿌듯하게 한 것은 농민들의 지지였다. 1983년 나이지리아 요루바족 이키레읍 주민들은 대관식을 열어
그를 추장으로 추대하고 세리키 아그베(Seriki Agbe)라는 칭호를 주었다. ‘농민의 왕’이라는 뜻이다. 오직 추장에게만 주는
옷과 지팡이 등도 선물했다. 41개국, 수억 명의 아프리카 사람을 살린, 그야말로 진정한 농민의 왕이었다.
사람들은 한상기 박사를 ‘농학계의 슈바이처’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한상기 박사와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박사가
만든 아프리카의 미래 모습은 전혀 다를 것이다. 수많은 아프리카 사람을 구했다는 사실은 같지만, 한상기 박사는 교육을
통해 미래를 대비했기 때문이다. 카사바 개량으로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한 한상기 박사는 국제기구에 지원을 요청해
아프리카 각국의 농학자들을 훈련했다. 덕분에 농학 석박사 50여명과 농촌지도자 700여명이 배출됐다. 제자들이 다시 수만
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을 교육하면서, ‘사람’이라는 이름의 우수한 종자는 아프리카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서 의료 활동을 펼치며 많은 사람을 구했고 노벨평화상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떠난 후 아프리카
사람들은 여전히 병마와 싸워야 했죠. 당시 그가 의료진을 양성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상황은 달라졌을 겁니다.
저는 그 점이 늘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품종 개량뿐 아니라 교육에도 힘쓴 것입니다. 제가 떠난 후에도 아프리카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기를 바랐으니까요. 지금도 저는 슈퍼 카사바를 만들어 보급했다는 것보다도 아프리카 사람들을 훈련해 사회에
내보냈다는 사실이 더 자랑스럽습니다.”
한국에서 쓴 저서 「작물의 고향」과
박사의 일대기를 담은 동화책 「까만 나라 노란 추장」
추장에게 주는 부채, 한상기 박사의 이름과
'농민의 왕'이란 뜻의 '세리키 아그베'가 적혀 있다
한상기 박사는 훈련에 그치지 않고 제자들이 더 넓은 세상에 나가 좋은 환경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도왔다. 농학자들을
중심으로 아프리카 내 지역 간 네트워크도 형성했다. 그의 시선은 항상 오늘보다 내일, 내일보다 더 먼 미래의 후손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1994년 1월, 한상기 박사는 아프리카 생활을 정리했다. 이제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국을 스스로 지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심은 자리에는 더 큰 사랑이 난다
2015년 한상기 박사는 40여 년의 기나긴 타국 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한국에서 인터뷰와 저술 활동
등을 통해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하고 있다. 지난 2020년에는 세계 작물의 9대 기원 센터를 소개한 책 「작물의 고향」을 출간했다.
이 책은 러시아의 식물육종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Nikolai Ivanovich Vavilov)가 쓴 「재배 식물의 8대 발원지」를 참고하되
기존에 다루지 않았던 서부 아프리카를 포함했다.
한상기 박사가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보릿고개는 익숙하게 찾아오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굶주림이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그만큼 농사에 대한 관심도 줄었다. 2021년 농가 인구는 221만 5,000명으로 1970년 1,442만 2,000명에 비해 84.6% 감소했다.
영농 형태 또한 변하고 있다. 논벼를 주로 재배하는 농가 비중은 2021년 37.8%로 1985년 82.9%에 비해 45.1%P 감소했지만,
채소 위주의 농가 비중은 17.3%P, 과수 위주의 농가 비중은 12.9%P 증가했다. 농업교육 역시 고부가가치 작물에 집중되고 있다.
한상기 박사는 이러한 변화를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주식인 ‘쌀’에 대한 관심이 옅어져선 안 된다고 당부한다.
1983년 나이지리아 이키레 읍 추장 대관식 모습.
한상기 박사(가운데)와 이키레 왕 오바(오른쪽)
“벼는 우리 조상들이 오랜 세월 개량한 우리의 주식작물이었습니다. 쌀은 우리 삶의 근간이 되죠. 시대가 변하고 많은 것이
바뀌어도 이 사실을 잊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세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식량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미래에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같은 위기가 찾아오지 않도록 우리는 식량을 지켜야 합니다. 더불어
땅의 쓰임을 바꾸었을 때 그것이 우리 삶과 자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신중히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한상기 박사의 아들 내외도 치과의사로서 최빈국에서 의료 봉사를 펼치며 아버지이 뜻을 이어가고 있고 큰 사위는 농학자로
동남아 등 여러 최빈국에서 그 곳의 식량증산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 전 세계 교육 현장에서 ‘사람’이라는 씨앗을 길러내는
교직원들에게 한 박사는 늘 조용한 응원을 보낸다. ‘잘해내고 있다’라는 믿음과 함께 말이다. “은사이신 성천(星泉) 유달영
선생께서는 저에게 ‘가교사해 홍익인간(架橋四海 弘益人間)’이라는 말을 남겨주셨습니다. ‘세상에 다리를 놓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라는 뜻이죠. 이 뜻이 교육 현장에서도 이어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훌륭한 인재가 많이 길러져 국가
발전,나아가 세계인을 위해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언가를 길러본 사람은 알 것이다. 기르고 돌보는 이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잘 자랄 거라는 믿음’을 갖는 것임을 말이다.
한상기 박사는 이러한 믿음을 품고 다음 세대를 바라본다. 위기에 강하고 가장 아름다운 종자를 남겨두었으니 분명 잘 자라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