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의 필수 조건은 '식량 자급자족'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우리는 곡물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인식하게 됐다. 우크라이나는 세계적으로 많은 밀을 생산하고
수출하는 국가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밀을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고, 그나마 생산한 밀은 수출되지 못하면서 세계적으로
곡물 대란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지난해 수입 밀 가격이 40% 넘게 폭등하면서 밀가루를 주원료로 만드는
빵이나 라면 가격이 대폭 인상됐다. 그래서일까? 197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사이먼 스미스 쿠즈네츠가 “후진국은 공업 발전을
통해 중진국으로 올라설 수는 있으나 농업 발전 없이는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다”라고 한 말이 다시금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실제로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 주요 선진국은 농업 선진국이기도 하다.
반면 우리는 광복 이후 농업보다는 제조업과 서비스업에 더 큰 비중을 둔 경제 정책을 이어왔다. 덕분에 대한민국은 2021년
국제사회에서 선진국 지위를 인정받았지만 그 대가로 농업 분야가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언론에서 수십 년째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많은 농업인이 여러 이유로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선진국으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농업 발전에 힘을 기울여 식량 자주국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평생을 우리 농업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던 조백현 박사(1900~1994)가 재조명되고 있다.
농업학교에서 얻게 된 학문 탐구의 기회
조백현(趙伯顯) 서울대 명예교수
(1900~1994)
[출처: 과학기술유공자센터]
1900년 원수부 군무국장 조성근의 아들로 태어난 조백현 박사는 어려서부터 매우 허약했다. 또래보다 작은 체구 때문에
‘좁쌀 사위’라 놀림당하던 유년 시절의 조백현 박사는 늘 의기소침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뒤를 이어 군인이
되기를 원했지만, 그에게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진로였다. 그렇다고 그는 아버지의 뜻을 어길 용기도 없었다.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업전수학교에 입학해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군인이 될 수 없으면 차라리 농사를
배우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했다. 수원농림학교는 고종이 경제발전 토대 마련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세운 근대 농학 교육기관이었지만, 그에게는 도망치고만 싶은 곳이었다. 수학을 좋아하는 학구적인 성격인 데다가
몸까지 약한 그에게 작물을 재배하는 실습 위주의 교육과정은 체력적으로도 큰 무리였다.
그런 그에게 인생을 바꿔놓는 기회가 찾아왔다. 수원농림학교의 일본인 교장 혼다가 농업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원농림학교를 전문학교로 승격시킨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일제가 대한제국의 식량을 수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수원농림전문학교 1회 입학생이 된 그에게서
과거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던 모습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학, 수학, 물리학, 기상학 등 근대 학문을 배우는 그에겐
그전에 볼 수 없던 생기와 열정이 넘칠 뿐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자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변했다. 일제의 수탈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조선인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농업 기술의 발전과 보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백현 박사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일본 여러 대학이 수원농림전문학교의 학사과정을 인정하지않아 그는 입학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규슈제국대학 농학부 창설위원장이 된 수원농림전문학교 혼다 교장이 입학시험을 볼 기회를 줘
농예화학과에 입학할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독일에서 생화학을 익히고 온 오쿠다에게 지도를 받고, 한국인 최초로 생화학
분야에서 논문 「계란 부화에 따른 아미노산의 변천」을 발표한다.
한국 전통 식품과 농업 발전을 위해 매진하다
규슈제국대학을 졸업한 조백현 박사는 전문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승격된 모교 수원고등농림학교 교사로 한국에 돌아왔다.
교단에 선 그는 일제의 우민화 교육으로 교사는 물론 학생 대부분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에 좌절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늘 끊임없이 연구하던 조백현 박사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
학생들에게 당시 가장 선진적이면서 첨단학문인 생화학, 발효학, 유기화학, 토양학 등을 가르쳤다. 이는 한국인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는 것을 넘어 자긍심을 심어주는 일이기도 했다.
조백현 박사의 수많은 업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국인이 즐겨 먹는 산나물을 연구해 식품으로서의 가치를 입증한 것이다.
그동안 영양가가 별로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 온 도라지, 고사리, 쑥, 참외, 질경이 등 산나물 열한 가지의
영양 성분을 분석한 논문을 발표하며 산나물의 가치를 입증했다. 이 외에도 콩나물처럼 일상에서 자주 먹는 두아(豆芽, 물이
잘 빠지는 그릇에 담아 그늘에서 키우는 나물)를 연구한 논문을 발표하여 우리가 그동안 먹던 전통음식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며
선조들이 얼마나 현명하고 지혜로운지를 밝혀냈다.
이런 조백현 박사의 연구 활동은 광복 이후에도 계속됐다. 당시만 해도 모든 집안이 직접 메주를 띄워 장을 담갔다. 그러나
비위생적이고 비과학적인 제조 방법 때문에 썩혀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짧은 시간에 몸에 좋은 박테리아만
배양할 수 있는 개량 메주를 만들어 특허 출원에 성공했다. 그 외에도 김치와 막걸리 등 발효식품을 생산하는 기업에 자신이 개발한
종균 번식법을 보급했다. 그 결과 장과 김치 그리고 막걸리는 21세기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대표 식품으로 전 세계인에게 인정받고 있다.
무엇보다 조백현 박사의 가장 큰 업적은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바꿔놓은 것이다. 1950~1960년대까지
우리는 봄철에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보릿고개를 겪었다. 그는 단기간에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방법으로 시비법에
착안했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도움을 받아 동위원소를 활용해 벼에 거름을 주는 방법 및 시기를 연구했다. 그 결과 벼꽃이
분화하는 시기에 벼의 표층과 하층에 시비를 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연구 결과는 대한민국을 넘어
빈곤에 힘들어하는 여러 국가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46년 당시
수원 농과대학 1호관 전경
[출처: 서울대학교 기록관]
농업 교육의 기틀을 세우고 선진 농업 기술과 지원을 이끈 영웅
서울대 농과대학 학장 집무실에서 조백현 박사 [출처: 과학기술유공자센터]
이렇게 굴곡이 많은 인생 속에서 꾸준히 노력해온 그의 탐구심 덕분에 한국 농업과 농업교육은 계속해서 발전해갔다.
한편 학교의 유일한 한국인 교사로 활동하던 조백현 박사에게 더 큰 뜻을 펼칠 기회가 주어졌다. 미군정청이 수원농림전문학교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조백현 박사에게 교장직을 맡긴 것이다. 하지만 학생을 가르칠 교사도 확보하지 못할 정도로 환경은
열악했다. 이런 환경에 굴복할 수 없던 그는 직접 동문을 찾아다니며 교사진을 확보하는 등 부단히 노력한 끝에 1946년
수원농림전문학교를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편입시켰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초대 학장이 된 조백현 박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농업전문가와 관계자 200여 명을 규합해 학술발표회와 농업관련 논문을 기재한 「한국농학회지」를 발간했다. 더 나아가
한국식품영양협회와 한국토양비료학회 등에 가입하는 등 농업 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도에는 유네스코의 초청을 받아 유럽으로 토양학 연구를 위한 연수를 떠났다. 영국의 농과대학과
토양연구소를 시작으로 독일, 덴마크, 프랑스 등 유럽 선진국의 토양 연구 시설을 시찰했다. 선진 농법과 연구시설을 익히기에는
너무도 짧은 8개월가량의 시간이었지만, 당시 대한민국의 어려운 형편을 걱정한 그는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는
부지런히 유럽에서 보고 온 선진문물을 대한민국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런 조백현 박사의 노력에 하늘이 감응했을까. 전쟁으로 피폐화된 대한민국의 재건을 위해 미국 정부의 예산을 받은
미네소타대학교가 서울대학교의 재건을 지원해 주는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 농과대학을 대표해
5개월간 미국의 대학과 연구 기관을 둘러본 조백현 박사는 더 많은 변화가 필요함을 인지하고, 지원받은 120만 달러로 농과대학
수원 캠퍼스에 신관 교사와 강당 등 여러 시설물을 세웠다. 그러고는 훌륭한 교수진을 양성하기 위해 농과대학 교수 40여 명의
미국 연수를 추진했다. 그 결과 서울대 농과대학은 8개 학과에서 11개 학과로 늘어나며 양적으로는 물론 질적으로도 성장할 수 있었다.
서울대 학장단과 미네소타대학 수석자문관 (Fowler S, 1955년 1월 서울에서 촬영;
좌로부터 황영모 공대학장, 조백현 농대학장, Arthur E Schneider 수석 자문관, 이제구 의대학장)
[출처: 서울공대 웹진]
은퇴 후에도 멈추지 않은 연구 활동과 후학 양성
조백현 박사의 열정과 노력은 나이가 들수록 줄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커져만 갔다. 환갑이 되어 1961년 학장직에서 물러났지만,
그는 연구와 강의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66세에는 원자력위원회 상임위원직을 맡아 원자력청 산하 방사선농학연구소를 설립하고,
8년 동안 원자력 기술을 농업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1960년대 평균수명이 55세 전후이던 점을 감안하면 그가 얼마나
열정적인 인물이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제1회 화농상 시상식 후 [출처: 과학기술유공자센터]
조백현 박사의 활동은 1986년 87세가 되어서야 멈췄다. 그렇다고 모든 활동을 멈춘 것은 아니다. 단지 현장에서 물러났을 뿐이었다.
그는 사재를 들여 화농장학회를 설립한 뒤 연구자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화농장학회는 현재 화농연학재단으로 발전해 매년 농학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연구자에게 화농상을 시상하며 여러 방면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평생을 농학과 과학기술에 헌신한 그는
1994년 눈을 감았으며, 서울대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생명과학대 캠퍼스에 동상을 세웠고, 정부 역시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를
헌정하여 조백현 박사를 기억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우리나라 근대 농업의 뿌리를 일궈낸 조백현 박사.
어찌 보면 전통 식품 학술 토대를 마련한 공로로 수훈한 대한민국 공로상(1961), 식량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수훈한 문화훈장 국민장(1962),
농업 기술의 현대화에 기여한 공로로 수훈한 수당과학상(1977), 또 사후과학기술의 명예의전당 헌정(2006) 등은 그가 이룬 업적에
비해 약소한 것은 아닐까.
1967년 4월 12일, 원자력청 출범식에서 치사를 하는 윤일선 원장, 뒤쪽 왼쪽이 성좌경
초대 원자력청장, 오른쪽이 조백현 원자력 위원. [출처: 과학기술유공자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