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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나누기

역사 속 숨은 영웅

영원한 상록수로 불꽃처럼 살다간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 선생’

일제강점기 농촌계몽운동에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 최용신 선생,
그의 헌신적인 행적은 1935년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통해서도 알려져 있다.
소설 속 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인 최용신 선생은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안산 샘골(천곡의 본래 이름)마을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자립심과 애국심을 키우는 교육 활동과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다.
서슬 퍼런 일제에 맞서 농촌 수탈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농민을 계몽시키고자 했던 농촌계몽운동가이자, 일제의 훼방에도 굴하지 않고 교육으로 대항하며 소외된 학생들을 위해 헌신한 교육자 최용신 선생의 삶을 기억하고 되새겨본다.

김형목 (사)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김형목 연구이사는 중앙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문학석사, 문학박사(한국근대사 전공) 학위를 취득했다.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로 재임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최용신, 소통으로 이상촌을 꿈꾸다」, 「최용신 평전」 등이 있다.

1934년, 고베신학교 시절 이미지 1934년, 고베신학교 시절 (맨 오른쪽이 최영신 선생)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1930년대 동북아시아 정세는 일본제국주의가 아시아를 하나의 경제 공영권으로 만들자는 ‘대동아공영권’을 구실로 대륙 침략을 시작하던 시기였다.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본격적인 대륙 침략을 위해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만들고, 강제 동원과 물적 수탈을 자행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피폐하고 곤궁함의 극치였다. 농업국가였던 조선은 ‘보릿고개’가 반복되는 만성적인 식량난을 겪고있는 데다 일제의 농촌 수탈이 극심해지면서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 후 실력 양성운동을 전개했고,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절대빈곤에 허덕이는 농촌을 살리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운동을 모색했다. 이 시기에 들불처럼 일어난 농촌계몽운동은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언론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가 주도한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1930년대까지 계속된 농촌계몽운동은 청년 학생이나 지식인 계층이 농민의 의식과 지식·기술 등을 계몽하거나 개발하기 위해 농촌 사회에 봉사하는 사회교육 운동이다. 농민들을 대상으로 했으며, 주로 농사일을 끝낸 저녁에 강연회와 토론회, 독서 활동, 야학 등의 형태로 이뤄졌다. 특히 농한기인 겨울에 많이 실시되었고, 도시의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여름과 겨울방학을 활용해 농촌에서 활동했다. 일제의 우민화 정책으로 인해 초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동들에게는 학교 교육을, 문맹자에게는 글자 보급 교육을 실시했으며 농민의 사상 계도를 시도했다. 기독교계에서도 1926년 이후 학생 YMCA 농촌부를 중심으로 계몽 활동을 적극 추진했다. 이들은 한글 보급과 농사 개량 강습회를 개최하면서 농민 계몽에 힘을 쏟았고, 일부에서는 협동조합 조직 등을 추진하 기도 했다.

교문에서 농촌으로
여성 농촌계몽운동의 선구자 최용신 선생

중·일전쟁을 준비하는 등 일제의 전시체제가 노골화되기 시작할 무렵이라 당시의 농촌계몽운동은 농촌과 농민이라는 거대 기반을 둘러싼 민족주의의 마지막 불꽃이기도 했다. 1929년부터 1934년까지 활화산 같던 농촌 계몽운동의 열풍 한가운데 최용신(1909. 8~1935. 1)이 있었다. 당시 신문이나 잡지 등은 최용신을 ‘브나로드(‘민중 속으로’의 뜻)의 선구자’로 표현했다. 또한 소설가 심훈(본명 심대평)은 최용신을 소설 「상록수」 속 주인공 채영신의 모델로 삼았다. 「상록수」는 이광수의 「흙」과 더불어 한국 농촌계몽소설의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다.
최용신은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태어났다. 원산에서 10여 리 떨어진 두남리는 일찍부터 기독교가 전파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며 개화된 마을이었다.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덕원공립학교 교사와 교내 학사 업무를 담당하는 학무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지역을 대표하는 교육자이자 계몽활동가였다. 집안이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문명사회 건설을 위한 교육·계몽활동에 열성적이었다. 덕분에 최용신은 당대 명문 여고인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1910년대 여자 학령아동 중 근대교육을 받는 비율은 0.5%도 안 되었으나 최용신은 근대교육의 혜택을 입었다.
1928년, 최용신은 졸업 즈음하여 ‘교문에서 농촌에’라는 제목으로 언론사에 농촌계몽에 헌신할 각오를 분명하게 밝히는 글을 기고한다. 그는 기고문에서 “중등 교육을 마친 우리들은 각각 자기의 이상을 향하여 각자의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제 그 활동의 첫 계단은 무엇보다 농촌 여성의 지도라고 믿는다”라고 토로하였으며, “중등 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 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 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 퇴치에 노력해야 옳을 것인가?”라고 일갈했다.
이후 교육인 전희균 선생의 권유로 서울에 있는 ‘협성신학교’에 진학했는데 여기에서 농촌사회지도교육과 황에스더 교수를 만났다.
「조선일보」에 '교문에서 농촌에' 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 이미지 「ㅁ」에 '교문에서 농촌에' 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 (1928. 3. 5)
…(상략)…
그럼으로 내가 절실히 느끼는 바는 농촌의 발전도 여 성의 분투함에 있을 줄 안다. 참으로 현대교육을 받은 여성으로서 북데기 싸인 농촌을 위하여 헌신하는 이가 드문 것은 사실인 동시에 유감이다. 문화에 눈이 어두 운 구여성만 모인 농촌에 암흑에서 진보되지 못한다 하면 이 사회는 언제든지 완전한 발전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중략)…
거듭 말하나니 우리 농촌으로 달려가자! 손을 잡고 달려가자!
학문을 토대로 직접 농촌에 들어가 몸소 체험하고 실천하는 것을 강조한 스승의 뜻에 따라 황해도 수안과 강원도 통천 등지로 농촌봉사활동을 나가 궁핍한 농촌의 실상을 직접 체험하게 됐고, 브나로드 운동에 발을 내딛게 된다. 1931년에는 학교를 중퇴하고 농촌운동에 전념할 것을 결심한 후 감리교 선교사 밀러(Miller)의 후원을 받아 YWCA 소속으로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 파견되어 농촌교육을 시작하게 됐다. 샘골은 낙후된 농촌이었으나 벌써 30년 전 교회당이 세워져 ‘교촌(敎村)’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당시 한국 YWCA ‘농촌지도원’으로 파견되어 2년제 인가 과정의 ‘샘골 학교’라는 강습소를 세우고,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며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시들지 않는 '상록수' 같은 열정으로 헌신하다

강습소에는 인근 마을에서 아이들이 몰려들면서 110여 명에 달하는 등 초만원을 이루었다. 교실에 들어오지 못한 청소년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배당 이곳저곳을 기웃거려야 했다. 이에 최용신은 새로 샘골 강습소를 지을 만큼 열정을 쏟아부었다. 문맹 퇴치를 위한 한글 강습뿐만 아니라 산술·보건 및 농촌 생활에 필요한 상식과 기술, 애국심과 자립심을 북돋우는 의식계몽 등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샘골 마을 주민 대부분은 무학(無學)에 문맹이었다. 최용신이 도착해 처음 시작한 일은 샘골 예배당에서 연 각종 강습반. 한글·역사·산수와 재봉·수예·창가·성경 등을 오전·오후·야간 세 반으로 나누어 하루 종일 가르쳤다. 하루 세 차례 강습을 마친 후 이웃 마을로 출장 강습까지 나갔다가 동이 터 올 무렵에야 샘골 집으로 돌아올 때가 빈번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경계심을 갖던 마을 주민들도 최용신의 헌신적인 활동에 마음의 문을 열면서 자발적으로 모금하고 후원하는 등 갖가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YWCA 역시 샘골에서 행한 최용신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여러 방면으로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굳센 의지를 갖고 학업까지 중단한 채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들었지만 농촌의 사정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최용신 선생의 유언장(최용신기념관 소장) 최용신 선생의 유언장 이미지

불꽃 같은 삶, 세상에 널리 알려지다

그는 좀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농촌계몽을 위해 1934년 3월 일본 유학길에 올라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 청강생으로 등록했다. 유학 중 교내 잡지에 투고한 기고문은 희망찬 계획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시기에 약혼자 김학준을 만나는 등 행복이 이어지는가 싶었으나 불행히도 지병이던 각기병이 악화되어 유학을 중단하고 말았다. 6개월 만에 귀국한 그는 다시 샘골로 되돌아왔다. 스스로를 지탱하기조차 힘든 몸임에도 건강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주변의 걱정에도 “내 몸뚱이는 샘골과 조선을 위해서 생긴 것이다. 그 샘골, 그 조선을 위해서 일하다가 죽었단들 그게 무엇이 슬프랴!”라고 말했다. 1934년 YWCA의 보조금이 끊어져 강습소 운영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학원을 살리기 위해 여러 방면에서 애를 쓰다가 결국 1935년 1월 23일 과로로 쓰러졌다.
창자를 조여 대는 고통을 참을 수 없어 결국 수원도립병원에 입원했으나 마을 주민들의 기도와 정성에도 수술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운명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나는 갈지라도 샘골(천곡) 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해 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녀의 나이 겨우 26세였다. 그의 죽음 이후 한 잡지사 기자에 의해 최용신의 삶이 기사화되었다. 그 기사가 바로, 1935년 잡지 「신가정」에 실렸던 ‘고 최용신 양의 밟아온 업적의 길-천곡학원을 찾아서’이다. 이 기사는 소설가 심훈의 마음을 울려 소설로 재탄생되었고, 그해 「동아일보」 장편소설 공모전에 당선되어 연재되면서 최용신의 불꽃같은 삶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는 1964년 ‘용신봉사상(容信奉仕賞)’을 제정하여 해마다 시상하고 있다.
일본 유학과 예기치 않은 병마로 인하여 그녀의 농촌 계몽운동은 3년이라는 짧은 세월로 끝났지만 여성 농촌계몽운동의 선구자로서 암울한 시대, 희망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 농촌에서 순교자적 활동을 하며 희망의 불빛을 밝힌 그의 발자취는 여전히 남아 있다. 케이 로고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