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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22 Vol.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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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나누기

역사 속 숨은 영웅

최초의 여성문학사이자 교육계몽에 힘쓴 독립운동가

유관순과 조선 여성들의 참스승, 김란사 선생


조선 여성으로서 근대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여성들을 일깨우려 한 1세대 여성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초대 유학파 신여성이자 여성 계몽을 위해 일생을 바친 김란사 선생이다.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의 독립 의지를 고취한 인물로도 잘 알려진 그는 어린 여학생들에게 “공부와 애국은 신분을 초월해서 하는 것이며, 신여성이 많아져야 나라를 위한 운동도 할 수 있다”라고 당시 한국 여성들의 마음에 변화와 혁신을 끌어낸 참된 지도자이기도 했다. 전근대적 사고방식, 남성 위주의 사회, 신분제도 그리고 외세의 간섭이라는 복잡다단한 문제들 속에서도 두려움 없이 여권 신장을 외치며 거침없이 교육 활동을 펼쳐나간 김란사 선생의 일생을 만나본다.

우경윤 이우학교 역사 교사

우경윤 교사는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성남 이우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또 교육 불평등 해소, 아동 청소년의 교육 선택지를 확대하기 위해노력하는 함께여는교육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천연균에서 찾은 오래된 미래」,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동양편」, 「교과서를 쓴 인물」 등이 있다.

삶의 개척을 위한 열망이 가져온 교육의 기회

김란사 선생은 1872년 평안남도 안주(국가보훈처 「공훈록」 기준, 후손들은 평양 출생이라고 주장)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했고, 1893년 조정 관리 하상기와 결혼했다. 하상기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보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아내의 삶을 인정하고 적극 지원해 주는 상당히 깨어 있는 남성이었다. 김란사 선생은 경제적·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지만, 현재의 편안함에 안주하는 대신 근대적 여성으로 살고자 했다. 이를 위한 첫 번째 도전은 근대 교육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1894년 여성 중등 교육기관 이화학당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이화학당은 결혼하지 않은 여성만 입학할 수 있다는 교칙이 있었던 만큼 김란사 선생은 입학을 거절당했다. 그러자 그는 하인이 들고 있던 등불을 불어 끄며 “우리의 캄캄한 상황이 이처럼 등불이 꺼진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어머니들이 무언가 배우고 알아야 자식을 가르칠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며 학교를 설득했다. 그의 설득에 당시 교장 룰루 프라이는 그가 이화학당에서 배움을 이어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 김란사 선생은 이화학당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우면서 세례를 받아 개신교 신자가 됐다. 당시 개신교는 가톨릭교와 같이 세례명을 주었는데, 김란사 선생의 세례명은 낸시(Nancy)였다. 이로 인해 ‘란사’라는 특이한 이름이 낸시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친정 종손자(그의 남동생의 손자)이자 김란사애국지사기념사업회 회장인 김용택 씨는 하상기와의 결혼 후 호적을 통해 란사가 본명임을 확인해 주었다.
김란사 선생에게 신앙은 등불이었다. 교회는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곳이자 조선의 약자들에게 자유·평등·사랑 같은 근대적 의식을 보급해 주는 공간이었다.
이화학당 총교사 시절의 김란사 선생
[출처: 김란사 추모사업회]
인천 별감이었던 김란사의 남편 하상기
[출처: 김란사 추모사업회]

두 번의 유학 생활로 얻은 국내 최초 여성문학사 학위

1895년 그의 인생의 두 번째 도전이 펼쳐진다. 정부 지원을 받아 일본으로 유학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조선은 국외에 많은 유학생을 파견했다. 서구의 문물을 직접 보고 배워서 조선의 근대화를 진행하기 위함이었다. 대상은 주로 양반가 남성이었지만 그는 당시 조정 관리였던 남편과 함께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일본의 게이오대학에서 1년간 수학하고 귀국한 그는 독립협회에서 진행한 여러 활동에 참여해 근대적 사고의 폭을 넓혀갔다. 특히 서재필의 강연을 즐겨 들었는데, 강연을 통해 민주주의, 여성 인권과 교육의 중요성을 배웠다. 김란사 선생은 이를 통해 여성 계몽을 위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
김란사로 명시된 게이오대학 입학명부 사본
[출처: 김란사애국지사기념사업회]
이후 정동교회에서 열린 서재필의 '미국의 남녀 평등한 활동'이라는 강연을 듣고 민주주의와 근대사회로써 가장 선진적인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1897년 든든한 후원자인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입국하면서 출입국신고서에 남편 성을 쓰는 미국 관습에 따라 ‘란사 하(Nansa Ha)’로 기재되는 바람에 오랫동안 ‘하란사’로 불리기도 했다.
1899년부터는 미국에 홀로 남아 유학 생활을 이어나갔다.
워싱턴에서 디커너스 트레이닝 스쿨(Deaconess Training School)이라는 예비 학교를 1년 정도 다닌 후 1900년 오하이오주의 웨슬리언(Wesleyan) 대학교에 입학해 문학을 공부했다.
당시 이 대학에는 고종의 5남 의친왕 이강이 유학 중이었는데, 이때 김란사 선생은 조선 황실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1906년 그는 웨슬리언 대학교 문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우리나라 여성으로서 근대적 고등 교육기관에서 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인물이 된 것이다.
미국 웨슬리안 대학교 시절 성경책을 들고 앉아있는 김란사 선생
[출처 : 이화여대 이화역사관]
1899년경 워싱턴 D.C.유학생 사진으로1982년 4월 24일자「한국일보」에 실렸다.
[출처 : 한국여성 독립운동 연구소]

“꺼진 등에 불을 켜라” 교사로서의 새로운 삶

1906년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자마자 귀국한 김란사 선생은 자신의 신념을 실천할 때가 됐다고 여기고 모교인 이화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한글과 육아, 위생 등 각종 교양을 가르쳤으며, 서구 명절 축하 행사를 진행하는 등 새로운 경험도 제공했다. 당시 이화학당 졸업생에게는 집안 환경이 어려운 소녀나 어머니에게 자신이 배운 것을 가르치는 일이 의무였다. 이런 학습의 기회는 주말 교회에서 주로 열려 ‘주간학교’라 불렀는데 김란사 선생 역시 주중에는 이화학당에서, 주말에는 주간학교에서 교육 활동을 이어나갔다. 외에도 황실이 주도해 여성 교육을 위한 진명·숙명학교를 설립할 때도 자문에 참여하는가 하면, 부인성서학원을 창설하고 이화학당 육아 교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09년엔 고종으로부터 은장을 받기도 했으며 뛰어난 영어 실력 덕분에 고종의 통역사로도 활동했다.
1910년에는 이화학당 총교사(교감)와 기숙사 사감을 맡아 교육뿐 아니라 여학생들의 생활 환경도 꼼꼼히 살폈다.
특히 그의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화학당 학생 동아리 ‘이문회(以文會)’다. 이문회는 학생들의 전인적 성장을 위해 피아노 연주, 노래, 창작 작품 낭독, 연극, 연설 등 다양한 활동을 한 뒤 이를 표현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리였다. 김란사 선생은 이문회를 이끌며 학생들에게 민족의 현실과 세계정세를 알려주고, 선각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함을 늘 강조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꺼진 등에 불을 켜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말했다. 1919년 한반도에서 독립만세운동의 기운이 확산하자 이문회에서도 정기 모임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했다. 그 가운데 유관순도 있었다. 당시 김란사 선생은 총교사(교감)를 맡고 있었고, 유관순은 1918년 고등과에 진학해 이문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문회를 이끌던 김란사 선생은 유관순에게 “조선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다오”라며 독립의 의지를 북돋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성 인권 그리고 신과 조국을 향한 노력과 헌신

1911년 김란사 선생의 앞서가는 여성 인권 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한다. 개화파 거두 윤치호와 벌인 지상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명문가 출신인 윤치호는 많은 사람에게 지지를 받는 근대 지식인이었다.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조선의 독립에 회의를 갖고 친일로 전향해 지금은 친일 인사로 더 알려져 있다. 그가 영문 선교지 「The Korea Mission Field」 7월호에 ‘신(新-근대적)학교 학생들은 요리하는 법을 모른다. 바느질하는 법, 빨래하고 다림질하는 법도 모른다. 어떤 때엔 시어머니에게도 순종하지 않는다’란 내용의 글을 기고하자, 김란사는 그해 12월호에 ‘학교의 목적과 방향은 슬기로운 어머니, 충실한 아내, 깨우친 가정주부가 될 수 있는 신여성을 배출하는 것이다. 요리사나 남의 집에 매여 바느질을 맡아 하고 일정한 품삯을 받는 여자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김란사의 여성관도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겠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전통적인 여인상을 부정하는 것이었고, 특히 윤치호로 대변되는 남성 권위주의에 거침없이 대항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새로운 여성상을 만인에게 제시했다.
1916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감리교 총회에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한 김란사는 2년간 미국에 머물며 신학을 공부하는 한편 미국 전역을 돌며 모금도 했다. 모금의 목적은 정동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당시 파이프오르간은 매우 귀한 악기였기에 미국 교포들이 힘을 합쳐 식민지 조국의 교회에 설치하는 일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으며, 한국 최초의 악기 도입이었기에 교포들에게는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일이었다. 당시 예배는 한국의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애국 운동에 참여하도록 종용하자는 목적도 컸기 때문이다. 파이프오르간을 구입하고 미국에서 조선까지 운송해 설치하는 데 든 총비용은 당시 금액으로 2,500원이었다고 한다. 그 시절 정동교회 건축비가 8,000원이었다고 하니 매우 큰 금액이 아닐 수 없다. 이 무모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보여준 조국에 대한 사랑, 그리고 신실한 믿음에 미국 교포들의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1916년 미국 뉴욕 사라토가에서 열린 세계감리교 총회에 한국교회 평신도 대표로 파견됐을 당시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7번째 서양식 복장을 입은 여성이 김란사 선생이다.
[출처 :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

국제 사회에 조국을 알리고자 했던 그의 마지막 소원

김란사 선생의 일생은 여성 교육과 여성 인권의 신장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열망도 강했다. 그의 독립운동이나 구국 활동에 관한 기록은 1912년부터 확인할 수 있다. 1912년 4월 12일 「매일신보」의 작은 기사에 그가 일본 당국으로부터 심문 조사를 받았다는 것이 언급된 것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그는 신여성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 과격하거나 급진적 독립 활동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진행한 여성 교육과 계몽 활동은 구국운동과 구분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가 펼친 구국운동의 대표적 사건은 파리강화회의 파견이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회의가 파리에서 열렸다. 고종은 의친왕에게 밀지를 주어 비밀리에 파리강화회의 파견을 추진했다. 김란사 선생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1919년 1월 고종이 갑작스레 승하하면서 이 기획은 수포가 되었다. 하지만 이 일은 애초에 기독교계의 지원으로 추진된 만큼 왕실 차원의 파견은 중단되었지만, 김란사 선생은 기독교계와 중국 교포들의 후원으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월 출국했다.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후원자들을 만나 베이징에서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이 일은 1907년 고종이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헤이그에서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일과 비견된다. 둘 다 국제사회에 일본의 침략 행위와 조선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한 일이었다. 특히 김란사 선생의 경우 여성이었다는 점, 왕실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보면 더욱 어렵고 큰일을 결심했다는 면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리고 그가 가진 국제적 감각과 언어 능력 그리고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 일을 감당하기에 충분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중국 베이징에서 1919년 3월 10일경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가 베이징에 있던 미 감리교회 부속병원에서 유행성 독감, 폐렴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그의 죽음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일제에 의한 독살설도 유력하게 제시됐다. 의문사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김란사 선생은 한국 근대 여성 1세대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불꽃 같은 삶은 한동안 우리에게 잊혔다. 유해도 찾지 못했고, 시댁은 대가 끊겼다. 친정 종손자 김용택 씨가 김란사애국지사기념사업회를 결성하면서 생전 그의 활동이 다시 주목받았고,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으며, 2018년 국립서울현충원에 그의 위패가 봉안됐다.
암울한 시절 김란사 선생은 자신과 조국의 앞날에 불을 밝히고자 신학문을 배워 조선의 여성들을 계몽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스스로 조선 여성의 등불이 되고, 제자 유관순을 민족의 등불로 만들었다. 여성들의 인권과 조선의 독립을 꿈꾸었던 그녀의 도전과 헌신은 당시 유관순에게도 그랬듯이 100년이 지난 후세대 우리들에게도 본보기가 되어주고 있다. 케이 로고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