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봉사활동이 운명처럼 내게로 왔다
“안녕하세요? 한국국제협력단(KOICA) 일반봉사단원 125기 박순덕입니다.”
‘KOICA’ 글씨가 선명하게 박힌 파란 조끼를 입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봉사단원’이라 소개하는 그는 한국국제협력단 해외봉사단원 박순덕 회원이다.
2018년 10월부터 2020년 3월까지 1년 6개월간 페루 현지에서 대면으로, 2020년 6월부터 지금까지 2년간 한국에서 비대면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해외봉사단원을 꿈꾼 것은 훨씬 오래전부터다.
“지나고 생각해보면 ‘운명이었구나’ 여겨지는 일들이 있어요. 제게는 해외 봉사가 그렇습니다. 10여 년 전 어학연수를 계획하던 아들이 한국국제협력단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해외 봉사활동을 떠났어요.
2년여간 이집트에서 현지 학생들에게 컴퓨터 활용법을 가르치고 돌아왔을 때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더군요. 생각이 깊어지고, 부쩍 어른스러워졌죠.
저도 걸스카우트 학생들과 매달 요양원을 찾아다닌 덕에 봉사 경험이 많았지만 달라진 아들의 모습을 보니 해외 봉사에 대한 동경을 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2016년 여름, 박순덕 회원은 교육 전문 국제개발협력 NGO 단체 그린티처스를 통해 케냐 단기 해외 봉사를 다녀오며 급한 갈증을 해소했다.
더불어 마사이족 아이들이 다니는 사마리아 아카데미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인생 2막에는 해외 봉사를 하며 살아야겠다’라고 굳게 마음먹었다. 해외 봉사를 하는 동안 다 커버린 줄 알았던 자신이 다시 성장하는 듯 느껴져 좋았다.
단순히 해외를 여행하며 느끼는 감동과 현지 학생들과 일상을 공유하며 얻는 감동은 차원이 달랐다.
2018년 8월, 38년 6개월간의 교직 생활을 마치자마자 박순덕 회원은 곧장 한국국제협력단 해외봉사단에 지원했다.
그리고 4주간의 현지 적응 교육을 마치고 같은 해 10월 페루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생 2막의 새 학기가 페루에서 시작됐다.
Hola! 페루. Hola! 나의 인생 2막
박순덕 회원이 도착한 곳은 페루 우앙카요(Huancayo) 있는 페루국립대학교 언어학센터(Ceid-UNCP, Centro de idiomas de la Universidad Nacional del Centro del Peru).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기 위해 매년 많은 학생이 이곳을 찾는다. 한류 열풍으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생겼거나 한국어 능력을 키워 구직하려는 학생이 대부분이며, 십 대부터 오십 대까지 나이도 천차만별이다.
박순덕 회원은 센터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쳤다. 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해 김밥, 잡채, 불고기 등 음식을 해 먹이고, 김치도 담갔다.
나이 어린 학생들은 한국 노래가 들리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춤을 췄다. 한국 전통 의상을 소개하며, 페루 학생들과 한복을 입고 꽃단장을 해 보기도 했다. 날마다 축제 같은 삶이었다.
“40년 가까이 가정교사로 일했고 한식조리사자격증도 취득해서 한국 문화와 음식을 가르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학생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기 위해 교사 시절 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한 것도 도움이 되었고요.
저는 한국어를가르치는 선생님이니까 그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서툰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페루에서 이방인이 느끼는 외로움보다는 현지에서 열리는 K-Pop 대회, 태권도 대회 등을 보며 우리나라에 대한 자긍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물론 서툼에서 멈추는 법은 없다.
박순덕 회원은 ‘배워야 가르칠 수 있다’라는 사실을 교육 현장에서 평생 배워왔다. 그도 페루 학생들과 소통하고 그들을 이해하려고 나이 60세가 넘어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낯선 타국어를 배우면서 ‘이렇게 가르쳐야 이해하기 쉽겠구나’ 하고 얻는 깨달음도 많았다. 수업이 없는 날은 인근 지역을 여행하며 그들의 삶과 문화를 배웠다.
코로나19로 막힌 학업, 랜선으로 잇는다
더는 걱정할 것이 없다고 여겨질 무렵,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전 세계 코로나19 확산으로 현지 봉사단원들에게 귀국 명령이 떨어진 것.
2020년 3월, 학생들에게 “또 만나자” 인사할 겨를도 없이 부랴부랴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해외봉사단원으로서 박순덕 회원의 임기는 2018년 10월부터 2020년 9월까지였다.
약 6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때만 해도 이별이 이토록 길어질 줄 몰랐다. 곧 다시 페루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박순덕 회원이 다시 아이들을 만난 곳은 페루가 아닌 화면 속이었다.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현장 파견 대신 원격으로 수업하게 된 것이다. 학생들과 직접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은 학생들이 학업의 끈을 다시 이을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으로 지웠다.
화상회의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과 실시간으로 수업하고, 과제는 소모임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해 주고받았다. 14시간의 시차, 1,000㎞의 거리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아침 9시 30분부터 2시간 가량 온라인으로 수업해요. 페루 학생들은 일과를 마치고 밤 7시 30분부터 들어와 수업을 듣고요.
페루는 인터넷 환경이 나쁜데도 학생들이 학구열이 매우 높아서 수업을 들으려 무척 애씁니다. 한 학생은 이탈리아에 교환학생으로 가 있는데 현지 시각 새벽 3시 반에 들어와 수업을 듣고요.
학생들이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교사인 제가 게을러질 수가 있나요? 저도 매일 수업 준비를 하고 남는 시간에는 장구,그림, 조리 등을 배우거나 등산하며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면 교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다 주고 싶다. 그래서 그는 한국해외봉사단원연합회(KOVA)의 희망 장학금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희망 장학금은 한국해외봉사단원연합회가 정회원이 추천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수여하여 개발도상국 학생들이 어려운 환경에 굴하지 않고 학업을 이어 나가도록 돕는 사업이다.
박순덕 회원도 정회원으로서 매년 학생들을 추천한다. 공적서 작성 등 할 일이 많지만 100달러면 페루 아이들에게 큰 액수인 것을 알기에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다시 세계로, 다시 나의 학생들에게로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고,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라 믿고 기꺼이 행동하는 것. 박순덕 회원은 그것이 봉사라고 믿는다. 해외 봉사라고 해서 다를 것 없다.
공짜 해외여행을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재미난 일도 없다. 또 해외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방인인 그에게도 언제나 앉을 자리와 따뜻한 음식과 정을 내어주었다.
박순덕 회원은 앞으로도 세계 곳곳을 누비며 학생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칠 계획이다.
세계의 문화 유적과 박물관도 두루두루 다녀오고 싶다. 세계 어디에나 제자를 둘 수 있으니 두려운 것이 없다.
“‘해외 봉사’라고 해서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걸 두려워하지만 않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특히 우리에게는 평생 배우고 가르쳐 온 경험이 있습니다. 해외 봉사는 나의 경험을 살리는 동시에 평생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감동을 만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많은 퇴직 교직원들이 해외 봉사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어요.”
막혔던 하늘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박순덕 회원의 희망의 문도 다시 열리고 있다.
팬데믹으로 끊어진 학업은 온라인으로 연결했지만 만날 수 없는 설움은 소복하게 쌓이기만 했다. 지금이라도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학생들이 환한 얼굴로 자신을 맞이해 줄 것만 같다.
마치 어제 만나고 헤어진 것처럼. 학생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그간 얼마나 열심히 스페인어를 갈고닦았던가.
학생들을 만나 웃고 떠드는 그날을 상상하며 박순덕 회원은 오늘도 마음속으로 부치지 못한 편지를 쓴다. “Hola! 나의 학생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