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나는 것에는 저마다의 파종 시기가 있다. 글에도 파종 시기가 있다면, 최은숙 교사는 중학생일 때가 적기일 거라고 믿는다. 이때 마음에 씨앗을 뿌려 두면, 사람은 평생 글을 가꾸고 거두며 살 거라고 믿는 것이다.
글 밭을 돌보는 농사꾼, 제11회 대한민국 스승상 대상 수상자 최은숙 교사 덕분에 학생들은 시처럼 사랑하고 소설처럼 성장하며 동화처럼 꿈꾼다.
글
이성미 /
사진
문동일
모든 평교사들과 함께 받은 선물이자 응원
“동료 선생님이 쓰시고 여러분이 동의해주신 대한민국 스승상 후보자 추천서를 찬찬히 읽어보았어요.
16년 동안 이어온 교사 독서 모임, 학생들과 글쓰기, 시 쓰기를 한 것, 마을공동체와 더불어 살아온 일 등 그간의 행적을 정성스레 적어주셨더군요.
추천서를 읽어 내려가면서 저는 이미 상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걸어온 길의 의미를 알고 소중하게 간직하는 동료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으니까요.
그런데 대상(大賞)이라는 소식을 듣고 약간 당황했습니다. 상이 과분하면 상이 아니라지요? 제 옷이 아닌 것을 입는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 상은 저 혼자 받는 것이 아니라, 교육 현장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이 땅의 모든 평교사에게 주는 선물이자 응원인 것 같습니다. 기쁘게 받기로 했습니다.”
수업을 하고, 학생과 시어(詩語)로 대화하고, 글을 엮어 책을 만들고, 학생들이 나고 자란 땅을 탐구하며 이웃과 소통하게 하고, 충청남도 내 교사들과 독서 모임을 해온 모든 일을 최은숙 교사는 ‘평범’이라는 그릇에 담는다.
개인의 특성상, 또 국어 교사로서 어렵지 않게,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을 일상처럼 해왔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기역, 니은과 같은 평범한 자음과 모음이 얽혀 아름다운 시가 되듯, 그가 평범하게 벌인 일들은 모이고 쌓이고 뭉쳐져 학생들의 삶에 크나큰 보석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글로써 다시 배우고, 학생들을 읽어내는 시간
최은숙 교사의 첫 직업은 기자였다. 작은 지역 신문사에서 글을 썼다. 그러다 신문사가 문을 닫자 직장 상사가 그를 서울에 있는 학원으로 데려가 거기서 영어 강사로 일하게 되었다.
전공과목이 아니라서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영어 공부에 할애했다. 수업과 관련된 낭만적인 영어 문장을 찾아 노래와 율동을 만들고 퀴즈도 하고 나름 즐겁게 잘 지냈다.
그러나 학생들의 수와 돈을 연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불편했다. 결국 ‘학교로 가자’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런데 임용고사에 합격해 교사가 되어보니, 애초에 교사란 직업은 세상에 없었다.
‘완전한 교사는 완전한 학생이다’라는 말처럼 배우고 또 배워야 하는 학생만이 존재했다.
“교사가 되고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나는 학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교과목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능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열심히 배워야 할 것은 ‘학생’이었습니다.
글쓰기는 국어 교사가 가장 편안하게 학생들에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이에요. 글을 쓰면서 사람은 자신과 대화하고, 타인과 대화해요. 아이는 어른보다 용기 있고 솔직하게 대화할 줄 알죠.
학생들의 글을 읽으면 글을 쓴 사람이 보여요. 가정방문을 다녀온 것처럼 금방 친해져요. 국어 수업 시간에 쓰는 글은 학생과 연결되는 통로이자 가장 훌륭한 교과서예요.”
1993년 교직 생활 시작 후 최은숙 교사는 늘 ‘시가 있는 교실’을 꿈꾸었다. 그에게 모든 아이는 부족함 없는 시인이자 작가였고 ‘시인이 있는 교실은 얼마나 따뜻한가’를 표어로 삼았다.
교환 일기장을 만들어 학생, 그리고 학생 가족과 편지를 주고받고, 시 창작도 함께했다.
1990년 『한길문학』에 시 「하남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최은숙 교사는 자신의 마음에 뿌리내린 시를 학생들 마음으로 부지런히 옮겨 심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마음을 꺼내 보이기 어려워하던 학생도 선생님과 친구들의 공감과 격려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환해진 마음이 모여 학생 시집 『착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시』 『반짝일거야』 『한창 예쁠 나이』 등과 문집 『우리가 닻을 내리는 곳은』 『우리들은 동창생』 『일반적인 아이들』 등이 나왔다.
제자 중 훌륭한 소설가가 배출되고 문예 창작을 전공하는 학생들도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글 밭은 매해 풍년이었다.
함께 읽고, 느끼고, 성장하는 교사들
최은숙 교사는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성장하는 방편 중의 하나로 고전을 추천한다. 고전 가운데 그의 손에 가장 먼저 들어온 책은 노자의 『도덕경』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교사도 크고 작은 문제와 부딪치고 갈등하며 살아간다. 그는 노자를 읽으면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공부할’ 문제로 전환하는 시선의 확장을 경험했다.
고전 읽기를 도와주신 이현주 목사님의 권유로 월간 『소년』에 노자와 장자를 풀어 써서 8년 정도 연재하기도 했다. 귀한 경험은 책으로 묶여 동료 교사, 학생들과 같이 공부하는 교재가 되었다.
2006년, 청양중학교 부임 후에는 독서 활동의 주체를 동료 교사로 확장했다.
“전처럼 삶에 대한 열정이 다시 끓어오르면 좋겠다”라는 동료 교사에게 “책을 읽으면 그렇게 된다”고 대답한 것이 청양교사독서모임 ‘간서치’의 시작이 되었다.
‘간서치’란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가 스스로 ‘책만 보는 바보(看書癡)’라고 칭한 데에서 따왔다.
간서치 회원들은 매달 한 권의 책을 정해 읽고 만나 책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에 관해 이야기한다.
작가를 초청해 그들과 좋은 영향을 주고받고 1년에 두 번 방학을 이용해 독서 여행을 한다.
학부모이기도 한 지역민들에게 교사의 성장을 공유하자는 뜻에서 회원들은 지역 신문에도 독후감을 연재했다.
2013년에는 연재한 글을 엮어 100편의 독서 에세이 『선생님의 책꽂이』를 출간했다. 난 자리 없이 회원 수가 20여 명으로 늘면서, ‘청양교사독서모임’은 2015년부터 ‘충남교사독서연구회’ 로 바뀌었다.
오늘도 최은숙 교사를 비롯한 간서치 회원들은 교육·철학·문학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고 배우며 학생으로서 성실하게 살아간다.
아이들이 자라는 만큼 선생도 자라고 마을은 깊어 갑니다
최은숙 교사가 생각하기에 학교는 ‘관찰’하고 ‘출발’하는 곳이다. 교사는 학생 하나하나를 지켜보며 가능성을 발견하고,
학생은 가장 자기다운 길을 향해 신발 끈을 묶는 곳. 그래서 최은숙 교사가 빼놓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 학교를 감싼 울타리이자 또 다른 출발점인 고향을 학생들이 알게 하는 일이다.
현재 최은숙 교사가 근무하는 공주여자중학교의 학생들은 공주를 직접 발로 뛰며 배우는 ‘우리 동네 아카이브’ 활동을 하고 있다.
학생들은 고장의 역사, 문화 등을 연구하고 지역 주민과 전문가들로부터 지역의 숨은 이야기를 듣는다. 연구 결과는 책으로 엮어져 관내 학교, 도서관, 작은 서점, 공방 등에 배포된다.
2020년부터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반갑습니다! 청춘, 공주』가 최은숙 교사와 학생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최은숙 교사와 학생, 학부모,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살을 맞대고 살아가고 있는지 그의 시 「알고 보니」에도 잘 드러나 있다.
올봄에도 아이들이 쑥 뜯으러 나올 거라고
동네 어른들은 둑길에 제초제를 뿌리지 않았습니다
쑥 뜯는 동안 자동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은 것은
다들 뒷길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공부 안 하고 놀러 나온 게 좋아서
장난치고 도망가고 야단법석
그래도 쑥이 모자라지 않았던 것은
방앗간 사장님이 뜯어 놓았던 쑥을
한 소쿠리 보태 주셨기 때문이에요
학교 앞 솔로몬문방구랑 스마일분식, 독립상회까지
떡을 돌리고도 전교생이 실컷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엄마들이 쌀을 듬뿍듬뿍 퍼 주셨기 때문이지요
아이들이 자라는 만큼 선생도 자라고 마을은 깊어 갑니다
대한민국 스승상 대상을 받고 최은숙 교사는 “혼자 이뤄낸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그럴 수밖에. 그는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다. 학생, 부모, 동료 교사, 지역 주민이 항상 함께하며 어울렸다.
혼자 있는 시간에도 학생들이 남겨둔 글이 마음 곁에 맴돌았다. 최은숙 교사의 올해 목표는 인근 제민천(川)에 학생들의 시를 전시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학생과 시와 마을이 한 곳에 담겨 반짝일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시심(詩心)이 일렁인다.
세상에 하나의 자음과 모음으로만 된 시는 없다. 최은숙 교사의 삶도 시와 같다. 평범한 교사, 학생, 마을 주민이 그에게로 와 시가 된다. 부대끼며 서로를 완성하고, 깊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