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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2023 Vol.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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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숨은 영웅

역사학자이자 교육자로서 국민에게 희망을 준 숨은 영웅들

일심동체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장도빈·김숙자 선생


장도빈·김숙자 선생 부부는 두 사람 모두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친 영웅이다. 장도빈(張道斌, 1888~1963) 선생은 어린 나이에도 「대한매일신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친일 내각과 친일 단체를 비판하고, 항일 운동에도 적극 가담했다. 북간도로 망명한 그는 「국사(國史)」라는 책을 발간해 고구려와 발해가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호령했던 역사를 통해 한국인에게 희망과 자부심을 심어주었고 광복 이후에는 한국대학과 단국대학교 초대 학장으로 대한민국의 교육 발전에 힘썼으며, 「민중일보」를 창간해 민주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한편 김숙자(金淑姿, 1894~1979) 선생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이하 경성여고보, 현 경기여중·경기여고) 학생으로 3·1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학생 항일운동을 이끌어 가다가 휴교령으로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으로 내려갔다. 장도빈·김숙자 선생은 이곳에서 만나 1920년 부부의 연을 맺게 됐다. 그 후 두사람은 서로를 응원하며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김숙자 선생은 대한애국부인회를 이끌며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일본군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으나 일제의 탄압에 아랑곳하지 않고 교단에서 올바른 민족의식을 가르치는 데 몰두했다.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학자이자 교육자로서 학생들과 지식인들로 하여금 나라 사랑의 마음을 고취한 영웅 장도빈·김숙자 선생을 만나본다.

이경훈 유정호 인천소방고등학교 역사교사

유정호 교사는 인천소방고등학교에서 딱딱하고 어려운 용어로 가득한 역사가 아닌, 쉽게 접근해 활용할 수 있는 역사를 가르치고자 노력하고 있다. 「방구석 역사 여행」, 「1일 1페이지 조선사 365」, 「조선괴담실록」, 「무심코 지나쳤던 우리동네 독립운동가 이야기」 등 역사 관련 서적을 출간했다.

원대한 이상을 품은 독립운동가, 언론인의 탄생

19세기 말 조선은 열강의 침탈에 무너져갔다. 이 시기 평안키려는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안창호, 조만식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외에도 잘알려지지 않은 평안도 출신 독립운동가는 수없이 많다. 그 중에는 장도빈 선생이 있다. 장도빈 선생은 1888년 10월 평안남도에서 태어났으며, 산운(汕耘)이라는 호를 받았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관직에 나가지 않았는데, 세도 정치로 혼탁해진 세상에서 힘들어하던 민중을 어루만지기 위해서였다. 장도빈 선생은 어려서부터 그런 가풍을 교육받았다. 특히 다섯 살에 사서삼경을 통달해 신동으로 불릴 정도로 영민했던 그는 어르신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장도빈 선생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도빈 선생의 올곧은 마음과 능력은 평안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재주를 아까워하던 평안 감사는 국가에 서 조선의 인재와 교원을 양성하기 위해 서울에 설립한 한 성사범학교에 열다섯 살의 장도빈 선생을 추천해 입학시켰다.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한 그는 넓은 세상에서 많은 애국지사를 만나며 식견을 넓혀갔다.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된 그는 지식을 나누어준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어려운 시국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고향에서 가르친 학생들이 스스로 배움을 익힐 수 있게 되자, 나라를 바로잡는 정치가가 되고자 서울로 상경했다. 우선 신민회에 가입해 일제의 침탈에 맞서 싸웠다. 신민회는 안창호, 양기탁 등 큰 인물이 모여 국권 회복을 위해 국내에는 학교와 회사를 세우고, 국외에는 독립군 기지를 창설하는 항일 비밀결사인 만큼 누구나 입단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20대 초반에 불과한 장도빈 선생이 신민회 비밀 장부를 보관하는 중책을 맡았다는 것은 많은 애국지사의 신임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보성전문학교 법과에서 공부하던 그에게 어느 날 은사 이자 황성신문사 주필인 박은식이 찾아와 「대한매일신보」 논설위원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많은 이가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글을 써달라는 부탁이었다. 이때가 1908년 장도빈 선생의 나이 스물하나일 때로 그의 능력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랐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게 장도빈 선생은 「대한매일신보」에서 신채호와 함께 애국심을 고취하는 논설을 기고했다. 이는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이 치외법권을 가진 나라, 영국인 베델로 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라 사랑으로, 민족주의 역사 연구에 매진하다

장도빈 선생의 애국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이 눈엣가시이던 「대한매일신보」를 폐간하기 위해 베델과 양기탁을 구속했고 베델이 죽자마자 일본 기관지로 전락시켜 버리고 만 것이다. 「대한매일신보」가 더는 독립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판단한 장도빈 선생은 오성학교(협성학교후신) 학감으로 취임해 학생을 가르치는 데 몰두했다. 더불어 역사를 바로 정립하는 것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원동력이 되리라 믿으며 국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후 오성학교가 일본에 의해 폐교되자 그는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로 임지를 옮겼지만, 이곳에서도 오래 있지는 못했다. 1911년 일본이 신민회를 해산하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해 105명의 민족지도자를 옥중에 가두었고 장도빈 선생도 북간도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기 때문이다.
북간도에서 국사를 가르치던 장도빈 선생은 「대한매일신보」에서 함께 글을 쓴 신채호가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거처를 옮겼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이곳에서 장도빈 선생은 신채호와 함께 다시 한번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썼다. 러시아인 주코프를 발행인으로 내세워 일본의 압력에서 자유로운 「권업신문」에 실린 그의 논설은 나라를 잃은 많은 한국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연해주에서의 그의 삶은 우리 역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당시 우리 민족의 관심사에서 멀어졌던 연해주는 과거 부여, 고구려, 발해의 터전이었고 이를 증명할 자랑스러운 유물과 유적이 많이 남아있었다. 이를 목도한 장도빈 선생은 우리 역사를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고, 마침내 고구려를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서술하는 「국사」를 발간했다. 이후 남북 국시대라는 개념을 사용해 발해를 우리 역사로 편입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단국대학교 설립(1948년)을 기념하며
(뒷줄 맨 왼쪽) 장도빈 선생, (앞줄 맨 왼쪽) 김구 선생 [출처: 독립기념관]

미래 지향적인 교육관으로, 국가 인재를 키워내다

그러던 중 1913년 겨울, 미국에 있던 안창호가 그를 초청했고 미국 방문을 결심한 그는 이듬해 봄에 만주지역의 독립 운동가들을 순방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무렵 신경쇠 약 증세가 악화되었고 중국 안동(安東)에서 한동안 치료를 받다가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에도 나라를 되찾기 위한 활동은 계속됐다. 3·1운동 이후 일본의 기만적인 민족 분열 통치의 하나로 신문사를 창간할 수 있게 되자, 그는 「동아일보」 발행 허가를 받아 내기도 했지만 운영권을 내려놓고 그 전부터 자신이 하고 싶었던 분야의 도서 집필에 몰두했다. 그 결과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동명왕」 「조선사」 등 역사 서적과 「서울」 「학생계」 등 학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잡지가 발행되었다.
일본은 언론인이자 교육자로 존경받는 장도빈 선생을 어떻게든 친일파로 만들고 싶었다. 1930년대 민족말살정책 아래 한국인을 식민지인으로 순응시키는 데 장도빈 선생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러나 장도빈은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참의 제의 등 끈질긴 일본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지 않았다.
기나긴 인고 끝에 그토록 원하던 광복을 맞이하지만, 장도빈 선생은 고향에 머무를 수 없었다. 사회주의 체제를 거부하고 월남한 장도빈은 「민중일보」를 창간해 우리 민족이 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1949년 화재로 「민중일보」를 발간하기 어렵게 되자, 윤보선에게 판권을 무상으로 넘겨주었다. 이후 한국대학과 단국대학교 등을 설립해 초대 학장으로 학사행정을 주재하면서 육군사관학교에도 출강하며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교육과 언론계의 큰 어른으로서 한시도 멈추지 않았던 그의 공로를 인정해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민중일보」 : 1945년 9월 22일에 장도빈이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서 창간한 일간종합신문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장도빈(張道斌)]

행동하는 리더,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김숙자 선생

장도빈 선생의 부인 김숙자 선생은 1894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다. 김숙자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될 정도로 나라를 사랑한 부친 김준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숙자 선생의 동생 김응원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 조직인 ‘연통제’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의열단에 몸담고 조선총독부 대관(大官)을 암살하려 했던 독립운동가였다.
김숙자 선생의 이화학당 중등과 졸업 당시 모습 [출처: 고려학술문화재단 제공]
김숙자 선생은 선각자였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1912년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고향 숭덕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후 다시 서울로 상경해 경성여고보 3학년으로 편입했다. 경성여고보는 1908년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된 관립 여학교인 한성고등여학교의 후신으로 집안이 좋거나 능력을 인정받은 여성만이 입학할 수 있는 명문 학교였다. 이 당시 김숙자 선생은 25세의 만학도였지만,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만세운동에 나섰다. 다른 사람이 모두 곤히 잠든 시간에 학우들과 함께 300여 장의 태극기를 직접 그려 제작하던 김숙자 선생은 3·1운동이 시작되자 누구보다 빨리 탑골공원으로 달려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날 32명의 경성여고보 학생들이 일제 경찰에 연행되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남은 기숙생 70명 전원은 새벽 몰래 탈출해 3월 5일 2차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그러나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 경성여고보는 일제에 협력하는 한국인을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대부분 교사를 일본인으로 채워 운영했지만, 한국 여학생들의 민족의식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3·1운동 당시 300여 명의 전교생 중 42명이 비밀조직에 가담해 만세운동을 벌였다.
만세 시위 확산을 막으려는 일본에 의해 학교에 임시 휴교령이 내려지자 김숙자 선생은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평생을 함께하는 반려자이자, 독립을 위해 심신을 바치기로 약속한 동지이고, 존경하는 인생 선배이기도 한 장도빈 선생을 만나 결혼한다. 훗날 장도빈 선생과 김숙자 선생의 아들은 “서른세 살이던 아버지와 스물여덟 살인 어머니가 결혼하게 된 것은 항일 독립운동이라는 공통분모가 작용했다” 라고 회고할 정도로 둘의 만남은 사랑을 초월한 인연이었다.

임신 7개월의 몸으로 옥고를 치르며 독립을 염원하다

김숙자 선생은 아이를 갖고서도 독립된 나라를 되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여성 비밀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애국 부인회 평북조직책으로 활약했다. 대한애국부인회는 군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일을 하는 만큼 독립운동이 발각되면 매우 큰 고초를 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숙자 선생에게 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배 속 아이조차 독립에 대한 열망을 멈출 수 없었다.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군자금을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던 김숙자 선생은 1921년 5월 일본 경찰에 붙잡히고 만다.
당시 「매일신보」는 ‘여자 정치범 검거, 독립운동 거괴(居魁) 김숙자 선생 열심으로 운동하다가 잡혔다’라는 제목 아래 기사를 냈다. ‘경성 누하동에 사는 김숙자 선생은 일찍 상당한 지식도 닦았다. 수년 전 영변군 숭덕학교 교사로 초빙돼 열심히 교육에 정진했다. 평양 선교사와 의논해 조선부인 1만 명의 연명서와 취지서 짓기를 맡았다. 거액의 돈을 모집해 평양 선교사 모씨에게 주었던 바, 그 선교사는 그간에 또 한 정치범으로 검거돼 지금 옥중에서 신음하고 있다. 김숙자 선생은 오히려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자못 암중비약을 계속하다 경찰에 검거됐다’라는 기사 내용을 보았을 때 김숙자 선생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일로 수감 생활을 마친 김숙자 선생은 이후 교사로서 민족정신을 가르치는 데 성의를 다했다. 더불어 남편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며, 아이들이 올바르게 성장 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그렇듯, 김숙자 선생의 남아 있는 행적을 찾기가 쉽지 않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많은 이들의 관심과 노력으로 김숙자 선생의 업적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케이 로고 이미지
「매일신보」 1921년 6월 24일 보도자료 [출처: 고려학술문화재단 제공]
김숙자 선생 [출처: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