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K 매거진(더케이매거진)
50년 만의 재회
작성자 황*장 2024-05-03
선생님
우리는 전북 진안군 안천면 백화리에 있었던 백화국민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학교 그러나 그 자리에 여전히 학교는 존재하지만 우리가 졸업한 백화국민학교는 없습니다.
용담댐이 막히고 안천면의 반절이 물속에 잠기는 담수가 되면서 안천면 소재지에 있던 안천국민학교 안천중학교 안천고등학교가 잠기게 되었고 학교 폐교의 위기 속에
학교를 존치 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인 유초중고등학교 통합 학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백화국민학교보다 긴 역사와 규모가 큰 안천국민학교가 살아나고 여기에 유치원 중학교고등학교가 살아나고 백화국민학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백화국민학교는 한동안 우리들에게는 아쉬움과 혼돈의 학교가 되어버렸다.
우리가 백화국민삭교 4회 졸업생이긴 하지만 실질적인 1회 졸업생이라는 자부심과. 자긍심이 우리 동기들 가슴에 남아있다.
백화국민학교 설립 인가가 났음에도 학교가 없어 우리는 약 4km나 떨어진 안천국민학교에 백화리에 사는 학생들만 반이 구성된채로 입학했고 교실이 없어 나무 그늘에 칠판을 걸고 야외 수업을. 하게 되었다.비가오면 우리는 복도한쪽에서 수업을 했고 날이 맑은날은 운동정 흙바닥에 앉아 수업을 한 것이다.
그렇게 서너달 수업을 하다가 장수황씨 문중예서 방촌할아버지인 황희. 정승을 기리비 위하여 백화리 중배실 마을에 세워진 화산서원으로 옮겨 수업을 시작했고 2학년 때는 이 곳에서 조금 떨어진 하배실 마을의 서당으로 옮겨 1년을 더 교실없는 떠돌이 수업을 하였다.
이렇게 2년을 보내고 드디어 마을 유지틀의 기부로 학교부지가 마련되었고 그 곳에교사가 신축되어 이사를 하였고우리 위의 선배들이 전학을 와서 우리는 4회 졸업생이 되었다.
새로 생겨난 신생학교는 많은 사람의 손이 필요했고 이 때 정말 학교가 필요로. 하는 능력자 선생니이 부임하셨다.
우리가 4학년에 진급하면서 김형술선생님이 우리반읗 담임하게 되면서 신기루같은 학교의 신화가 시작되었다. 농고를 졸업하고 부임하신 선생님 우리와 함께 나무를 심고 운동장 곳곳에 그 시절 그 산골에서 철마다 바뀌어 꽂이 피는 저음보는 꽃들을 심어 학교를 천상의 화원으로 변화시키 시작했다. 연못도 파고 식수 해결을 위한 상수도도 놓고 각종 운동기구도 설치하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방과 후에는 거의 하루도 걸지 않고 선생님과 함께. 축구를 했다. 우리반 전체 숫자는 46명 이 모두에게1 가지는 무엇이든 하게 만들었고 니듬밴드를 만들어 음악적. 소야믈 기르게 함은 물론 고전읽기 등 운동과 각종 경시대회에 출전하여 입상하는쾌거를 거두었다. 우리는 항상 학교대항 대항전에서 한 학년이 여섯빈이나 되는 안천국민학교를 항상 이겼고 군대회에 출전해서도 항상 상위 입상을 하는 일당백의 쾌거를 거두었다. 우리는 그렇게 선생님과 3년을 같이하고 46명이 백회국인학교 4회 졸업을 하게 되었다.
백화국민학교 졸업 후 면 소재지에 있는 안천중학교에 20여명이 진학했고 중학교에서도 우리 졸업생들은 항상 상위권 성적은우리가 차지했다.
중학교 졸업 후 전주로 고등학교 진학을 한
10여명 중 우리 백화국민학교 출신이 5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중학교 때 전학을 간 친구들도 고등학교에 모두 진학 하였다.
이렇게 자라난 친구들은 6명이 대학에 진학했고 이중에서 사실한 변호사 대학교수 중등학교교장 우체국장 감정평가사 국가대표선수 개인 사업을 하는 친구들로 성장했다. 그 중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친구들은 꾸준한 만남을 이어왔다.
그리고 23년 2월 선생님을 모시고 친구들과 함께하는 졸업 50주년 모이을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모임을 1년여 준비를 하고 24년4월20일 모임을 갗게되었다. 모든 친구들을 불러 모으고 선생님을 모시는 행사였는데 행사 몇일을 앞두고 선생님이 탁구를 치시다 허리 부상을 입어 모임억 참석하지 못하시게 되었다. 모든 친구들의 가슴에 살아 있는 선생님과의 만남이 무산되어 아쉬웠지만 우리들의 만나을 즐겁고 나름 성대하게. 치렀다. 학교에 기념식수도 하고 고향 후배들에게 장학금도 주고 지역민들에게 우리 졸업 50주년 기렴품도 전달하고 특히 우리 모두가 열심히 살아온 우리 자신과 친구들에게 잘 살아 주였음을 축하하는 기념식이었다.
아쉽지만 선생니을 위해 준비한 기념품은
우리대표 변호사 친구가 선생님을 찾아 전달하였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과 사랑을 모아 준비했기에 정말 따뜻하고 정성ㅇ읗 담았다.
오직 아쉬움은 50년만에 만나는 스승과제자들의 해후가 이루어치지 못 했다는 점이다.
이 아쉬움은 내년으로 미루게된 아쉬움이다.
선앵님 고맙습니다..감사합니다.
제자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