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황인희 역사칼럼니스트
대학교 졸업 후 줄곧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월간 「샘터」 편집장을 끝으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다수의 저서를 저술했고, 현재 역사 칼럼니스트, 인문여행작가로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사진 제공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과학기술유공자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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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인희 역사칼럼니스트
대학교 졸업 후 줄곧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월간 「샘터」 편집장을 끝으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다수의 저서를 저술했고, 현재 역사 칼럼니스트, 인문여행작가로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사진 제공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과학기술유공자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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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탁 박사는 일본 교토대학교 이학부 물리학과에 입학했지만, 그가 2학년 때 해방이 되자
귀국해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편입하여 1947년 1회 졸업생이 되었습니다.
1949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물리학 석사학위를 받은 조순탁 박사는 곧바로 모교의 물리학과 전임강사가 되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1955년 그는 미국 미시간대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조지 울렌벡(George E. Uhlenbeck) 교수를 만났습니다.
조지 울렌벡 교수는 당시 통계물리학 분야의 세계 최고 권위자로 학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석학이었습니다.
조순탁 박사는 조지 울렌벡 교수의 지도를 받아 ‘고밀도 기체의 운동론(The Kinetic Theory of Phenomena in Dense Ga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합니다.
이 논문에는 이른바 ‘조-울렌벡 이론(Choh-Uhlenbeck Theory)’이 담겨 있는데, 비평형 통계역학* 분야의 오랜 숙제를
해결한 획기적인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도교수였던 조지 울렌벡의 이름을
함께 넣어 새로운 이론으로 세상에 내놓은 것입니다.
이에 앞선 1946년, 러시아 학자 니콜라이 보골류보프(Nikolay Bogolyubov)가 볼츠만 방정식을
바탕으로 실제 기체의 운동을 기술하는 방정식을 발표했는데, 조순탁 박사는 이 결과를 2차, 3차 또는 더 높은 차수의 충돌을 고려해 기체운동론을
전개할 수 있다는 조-울렌벡 이론으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즉 충돌로만 상호작용하는 이상기체의 비평형 통계역학계를 다룬 볼츠만 방정식을 일반화 시킨 최초의 체계적인 기체 운동학 방정식이었습니다. 이로써 운동학이론과 통계물리학 분야의 새로운 장이 열렸고,
이 이론은 비평형 통계역학 연구의 교과서적 모형으로 인정받았습니다.
* 비평형 통계역학: 대상 물리계의 거시적 특성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비평형 상태를 다루는 통계역학의 한 분야
▲1959년 서울대 부교수 시절 서울대 13회 졸업생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조순탁 박사 (맨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1962년 연세대 제8차 한국물리학회 총회에서 조순탁 박사 (맨 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조순탁 가옥 전경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스승의 지도를 받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행운으로 여겨지는데,
그 스승과 나란히 이름을 넣은 이론을 정립했다는 것은 학자로서 크나큰 업적이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더구나 걸음마 단계였던 국내 물리학계의 사정을 생각하면 엄청난 쾌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조순탁 박사의 박사학위 논문은 모든 통계역학 분야에서 인용되고 있습니다. 대학원 교재에서 하나의
장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물리학 이론이기도 합니다. 20세기 미국 물리학의 발전 계보에서
통계물리학 분야가 ‘파울 에렌페스트-조지 울렌벡-조순탁’으로 이어지는 이유입니다.
귀국 후 조순탁 박사는 서울대학교, 서강대학교, 한국과학원, 한양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인재
양성과 연구에 힘썼습니다. 그는 이론물리학자이면서도 실험 물리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하고,
과학이 진정으로 뿌리를 내리려면 이론과 실험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소신을 실천했습니다.
그 결과 국내 최초로 1.5 MeV 사이클로트론 입자가속기 건조를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한국과학원 1978학년도 후기학위수여식에서 조순탁 박사
▲1960년 「Physics Today」 7월호에 소개된 조-울렌벡 방정식
조순탁 박사는 1974년 이후 가장 오랜 기간인 6년 동안 한국과학원(現 KAIST)의 원장직을 맡으며 한국과학기술원이 우리나라 과학자 양성의 산실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헌신했습니다.
1981년에는 고등학교 물리 교과서와 대학 및 대학원 통계물리 전문 서적을 저술했고, 한국표준연구소 부이사장,
통신기술연구소 부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과학 및 물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1990년 은퇴 후에도 조순탁 박사는 통계물리 월례 강연회와 발표장 등에 빠짐없이 참석해 후학들의 연구 결과를 듣고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조순탁 박사가 박사학위를 받은 1958년은 우리나라가 전쟁을 겪은 지 불과 5년밖에 지나지 않은 때입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먹고사는 문제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미래의 과학 발전을 내다보고 연구에 몰두한 그는 획기적인 성과를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탈무드』에는 “0에서 1까지의 거리가 1에서 100까지의 거리보다 길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어려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경구를 참고한다면 조순탁 박사가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 물리학계 발전을 위해 애쓰고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낸 것은,
몇 배 더 값지고 소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축적으로 이뤄집니다.
우리나라의 기초과학, 물리학의 미래가 조순탁 박사처럼 불모지에서 헌신적으로 터를 닦은 사람들로부터 비롯됨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