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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학계 등의 발전을 위해서 헌신한 이들의 발자취

역사 한 스푼

조선 체육의 아버지

몽양 여운형 선생
역사한스푼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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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가을, ‘YMCA야구단’이라는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야구단인 황성YMCA야구단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영화에는 열정적으로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이 등장합니다. 영화 속 주인공 이호창의 모델은 바로 우리가 계몽 활동가로 알고 있는 몽양 여운형 선생입니다.

글 황인희 역사 칼럼니스트

대학교 졸업 후 줄곧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월간 「샘터」 편집장을 끝으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다수의 저서를 저술했고, 현재 역사 칼럼니스트, 인문여행 작가로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사진 및 자료 제공처: 몽양기념관

*사진 및 자료 제공처: 몽양기념관

체육으로 국력을 강화하고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다

여운형 선생은 배재학당, 흥화학교, 우무학당 등에서 신학문과 서양 문물을 배웠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들은 여운형 선생은 거리로 나가 조선 민중의 자각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또 고향 집 사랑방에 ‘광동학교’를 설립하고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신학문을 가르치며 민족 계몽에 앞장섰습니다.
선교사들을 통해 스포츠의 매력과 중요성을 알게 된 여운형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단인 황성YMCA야구단 창립에 참여하고, 선수로도 활약했습니다. 선생은 ‘조선시대에 체질 향상에 힘쓰지 못한 결과, 식민지 상태를 맞이했으니 체육적 재생으로 건전한 체질을 찾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체육을 통한 국력 강화에 힘썼습니다.
당시 운동복은 무명 고의적삼이었고, 스파이크화 대신 짚신을 신었습니다. 선수들은 하나뿐인 배트를 돌려가며 사용하고, 외야수는 글러브가 없어 맨손으로 공을 잡아야 했습니다. 운동장 바닥은 슬라이딩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거칠었고, 구경꾼들이 경기장 안까지 들어오는 바람에 파울 볼에 맞아 다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열악한 조건에서도 황성YMCA야구단은 다른 야구부와 겨룬 시합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했습니다. 당시 야구에 관심 있는 사람 사이에서는 “황성YMCA야구단이 다른 팀을 꺾는 것은 얘깃거리가 되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이 져야만 화젯거리가 된다”는 말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출처: 「씨네21」 YMCA 야구단 제작일지, 「韓國野球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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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유학생 친목 농구경기대회 기념사진의 여운형 선생(앞줄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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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체육회 부회장 전경무의 장례식에 참석한 조선체육회 회장 여운형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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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유학생 친목 농구경기대회 기념사진의 여운형 선생(앞줄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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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체육회 부회장 전경무의 장례식에 참석한 조선체육회 회장 여운형 선생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은 여운형 선생의 야구 사랑

여운형 선생은 1912년에 도쿄에서 열린 일본 와세다대학교 야구팀과의 친선 경기에 황성 YMCA야구단 단장으로 참가했습니다. 일본 도착 후 첫 경기에서 황성YMCA야구단은 23:0으로 완패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어진 경기의 성적도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국내 야구팀 최초의 원정 경기라는 점에서 이 대회의 의의는 참으로 컸습니다.
중국 난징의 진링대학에 유학할 때 여운형 선생은 대학 야구 대표 선수로 뽑혀 등록금을 면제 받기도 했습니다. 1926년 망명해 상하이임시정부에 머물 때는 상하이 야구팀 코치를 맡기도 했습니다. 그의 야구 사랑은 어디를 가나, 어떤 상황에서나 꾸준히 이어진 셈입니다.
**출처: 「한국야구사연표」, 한국야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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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회 경성평양대항축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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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극동함대 축구팀과 함께한 여운형 선생(오른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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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유도유단자회 주최 제1회 무도 강연회 기념사진 속 여운형 선생(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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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회 경성평양대항축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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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극동함대 축구팀과 함께한 여운형 선생(오른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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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유도유단자회 주최 제1회 무도 강연회 기념사진 속 여운형 선생(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

조선씨름협회 초대 회장도 역임한 만능 스포츠맨

여운형 선생은 야구만 좋아한 것이 아닙니다. 1927년 창단한 조선씨름협회의 중심인물이었던 그는 1936년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여운형 선생은 상해한인체육회 위원장을 지내고, 상해복단대학교 감독으로 대학 축구팀을 이끌고 싱가포르, 필리핀 등을 다니며 원정 경기를 했습니다.
여운형 선생은 다양한 운동을 좋아했고, 기량도 뛰어났습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청년들과 함께한 투포환 경기에서 1위를 차지하는가 하면, 물에 빠진 사람 셋을 모두 구한 적도 있을 만큼 수영 실력도 뛰어났습니다.
그는 생활체육에도 힘썼습니다. 노인과 어린이, 여성이 쉽게 할 수 있는 기초운동법 보급에도 힘을 보탠 것입니다. 여운형 선생은 서상천과 이규현이 쓴 『현대철봉운동법』의 표지에 자신의 사진을 실어 철봉운동의 효과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여러 종목의 스포츠 경기 심판을 맡았으며, 각종 스포츠 협회 회장을 역임해 우리나라 스포츠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여운형 선생은 ‘조선 체육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한 스포츠 분야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손기정을 올림픽 무대에 세우다

여운형 선생은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하고, ‘제2회 풀마라톤대회***’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이 마라톤 대회의 우승자는 바로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손기정이었습니다. 손기정의 가능성을 엿본 여운형 선생은 그를 후원하는 데 앞장섰지만, 손기정은 올림픽 출전을 망설였습니다. 그때 손기정을 꾸준히 독려해 그를 올림픽 무대에 서게 한 사람이 바로 여운형 선생입니다.
여운형 선생은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에게 “제군들은 비록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고 있지만 등에는 한반도를 짊어지고 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당부했습니다. 여운형 선생의 지원과 격려에 힘입은 손기정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습니다. 조선중앙일보는 누구보다 먼저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실었고, 신문은 폐간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일제에 의해 조선체육협회에 통합됐던 조선체육회가 1945년 재건되었고, 여운형 선생이 회장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올림픽에 참가하려면 국내 올림픽위원회를 결성하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가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체육회는 1947년 7월 조선올림픽위원회(현 대한올림픽위원회)를 설치하고 여운형 선생이 초대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이후 IOC 가입 활동에 매진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인 1947년에 IOC에 가입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단은 1948년 런던 올림픽에 태극기를 내걸고 정식 출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작이 자리를 잡기까지는 대부분 외롭고 고달픈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런 힘든 과정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다양한 종목에서 눈부신 성과를 얻는 스포츠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생각하면 불모지에 씨를 뿌리고 희망을 가꿔낸 여운형 선생의 공로가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케이 로고 이미지
***출처: 손기정 기념재단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