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한국의 공중보건을 위해 헌신한 의사가 있습니다. 바로 이영춘 박사입니다.
그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자혜진료소에서 소작인들의 건강을 돌보며 기생충과 질병 퇴치에 힘썼습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지역 주민들의 건강 상태가 개선되었으며, 이후 한국 의료 분야에서 예방의학의
중요성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글 황인희 역사 칼럼니스트
대학교 졸업 후 줄곧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월간 「샘터」 편집장을 끝으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다수의 책을 저술했고, 현재 역사 칼럼니스트, 인문여행 작가로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사진 및 자료 제공처: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군산의료원, 국가유산청국가유산포털
*사진 및 자료 제공처: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군산의료원, 국가유산청국가유산포털
의학의 궁극적 목적인 예방의학에 헌신한 일생
“졸업생 여러분! 질병은 치료하는 것보다 예방하는 것이 최선임을 기억하십시오. 예방의학은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할 것입니다. 공중보건이야말로 의학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모두가 자기 이익을 중요시하는 시대에 공중보건에 힘쓰고,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진정한 의사가 되십시오!”
이 말은 1929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이하 ‘세브란스의전’) 졸업식에서 교장 애비슨 박사가
졸업생들에게 전한 훈화의 주요 내용입니다.
이 훈화는 청년 이영춘 박사의 평생 좌우명이 되었으며, 의료 혜택이 미치지 않는 농촌에서 그가 평생 헌신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슈바이처’ 이영춘 박사는 1903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가난한 농민의 여섯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늑막염으로 교사직을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당시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담당 의사의
훌륭한 치료에 감동한 이영춘 박사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을 합니다.
1929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그는 1935년 일본 교토제국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무렵 이영춘 박사는 우리나라가 가난과 질병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중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질병을 줄이는 것임을 자각하고, 자신의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헌신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농촌위생연구소 낙성식 연설 모습
▲이영춘 박사 진료 모습
▲농촌위생연구소 낙성식 연설 모습
▲이영춘 박사 진료 모습
농촌 의사, 소작인들과 함께한 자혜진료소
1935년, 평양고등보통학교 시절 은사였던 경성제국대학교의 와타나베 교수는 청년 이영춘 박사에게 의외의 제안을 합니다.
전라북도 군산에 세워진 자혜진료소 소장 자리를 소개한 것입니다.
그 당시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의학박사였던 이영춘 박사에게는 부와 명예가 약속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혜진료소 근무를 선택했습니다.
자혜진료소는 군산 일대에 대토지를 소유한 일본인 대주주가 세운 의료기관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이영춘 박사는 소작인들에게 처음으로 근대적 의료 혜택을 제공했습니다.
진료소는 언제나 소작인들과 그 가족들로 북적였고, 이영춘 박사는 하루 100여 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했습니다.
한 달 중 절반이 넘는 출장 진료도 마다하지 않았던 이영춘 박사는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가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이영춘 박사는 해방 전까지 약 10년 동안 자혜진료소에서 수십만 명의 환자를 돌보았고, 당시
작성한 의료 기록은 지금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해방 후 그는 전북도립군산병원 병원장을 역임하며 미군정으로부터 자혜진료소를 불하받았습니다.
이후 세브란스의전 교수직과 군정청 보건후생국차장 등을 모두 마다하고, 군산에 남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영춘 박사는 활동 범위를 계속해서 넓혀 나갔습니다. 그의 활동 무대는 전라북도 전역으로
확장되었고, 군산 개정중앙병원, 정읍 화호중앙병원과 여덟 개의 진료소를 운영했습니다.
▲ 자혜진료소
▲이영춘 박사의 자혜진료소 일지
▲ 진료 조사 중인 이영춘 박사
▲자혜진료소
▲이영춘 박사의 자혜진료소 일지
▲ 진료 조사 중인 이영춘 박사
한국 최초의 학교급식부터 기생충 박멸까지
이영춘 박사는 당시 만연했던 결핵, 기생충, 매독 퇴치에 매진했습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기생충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농촌 아이들은 영양이 부족한 상태에서 그나마 섭취한 영양분마저 회충이 빼앗아 가 건강 상태가 매우 심각했습니다.
이영춘 박사는 세계보건기구의 도움을 받아 농민들에게 항아리를 나눠주며 대변을 발효시켜
거름으로 사용하도록 교육했지만 농민들은 그 항아리를 장독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에 박사는 시멘트 토관(土管)을 구매해 보급했고, 1970년대에 들어서 드디어 기생충 문제가 눈에 띄게 감소했습니다.
이영춘 박사가 남긴 ‘최초’의 기록은 다양합니다.
1936년 대기근에는 3개월간 농장에서 나온 싸라기로 주먹밥을 만들어 300여 명의 아이에게 나눠 주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급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또 어린이들의 건강을 위해 지금은 학교마다 보편화된 양호실(현 보건실)을 설치했고, 1952년에는 집단 결핵 예방접종을 처음으로 실시했으며, 1973년에는 우리나라
의료보험제도의 시작점이 된 농촌 지역 의료보험 조합을 설립했습니다.
▲ 세브란스의전 시절 해수욕장 의료 봉사 모습(오른쪽 첫 번째)
▲ 세브란스의전 시절 해수욕장 의료 봉사 모습(오른쪽 첫 번째)
농촌복지와 교육에 헌신한 ‘한국의 슈바이처
농촌 의료 복지를 위한 이영춘 박사의 노력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948년 그는 농촌위생연구소를 창설했고, 이후 재단법인 한국농촌위생원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또한, 보건 인력 양성을 위해
개정간호학교, 화호여자중학교, 화호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의지할 곳
없는 영아들을 돌보았는데, 이는 요람에서부터 복지를 실현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영춘 박사는 설날에 식량이 떨어져 가족이 굶을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살면서도 모든 사업을
사회에 환원했는데, 병원과 연구소 등 자신이 세운 모든 기관을 무상으로 넘기고 살던 집마저
재단에 기부했습니다.
이영춘 박사가 세상을 떠나자, 국내 언론은 ‘한국의 슈바이처가 잠들었다’라는 제목으로 그의
삶을 조명했습니다. 그가 일했던 군산 개정마을은 ‘이영춘마을’로 이름 지어졌고, 그의 삶을 본
받기 위해 많은 의대생이 지금도 이 마을을 찾고 있습니다.
이영춘 박사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진정한 의사’로서의 삶을 살았고, 그가 남긴 선한 영향력은 여전히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