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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 스푼

한국 도서관학의 선구자

이봉순 선생
역사한스푼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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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순 선생은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장을 역임하며, 최장기 도서관장 기록을 세운 인물입니다. 그는 여성 최초로 도서관학과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도서관학 교육과 학문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한국 도서관계의 어머니’, ‘한국 도서관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봉순 선생은 우리나라 도서관학의 초석을 다지며 한국 도서관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글 황인희 역사 칼럼니스트

대학교 졸업 후 줄곧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월간 「샘터」 편집장을 끝으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다수의 책을 저술했고, 현재 역사 칼럼니스트, 인문여행 작가로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사진 및 자료 제공: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역사관, 국립중앙도서관 『도서관계』

*사진 및 자료 제공: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역사관, 국립중앙도서관 『도서관계』

도서관에서 만난 사람들, 운명적 만남이 되다

이봉순 선생은 1919년 함경남도 신흥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간도 용정에서 학교를 다녔으며 중등 과정인 명신여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교사였던 모윤숙 시인과 만났습니다. 이후 이봉순 선생은 모윤숙처럼 시인이 되기를 꿈꾸며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에 지원해 영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졸업 후 이봉순 선생은 영어 선생님이나 기자를 꿈꾸었지만, 우연히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취직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의 표현대로, 그곳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사람들’이 없었다면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은 스쳐 지나가는 직장에 불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만난 첫 번째 운명적 인물은 일본인 주임 세키노 신기치(關野眞吉)였습니다. 세키노는 한국 문화를 존중하며, 이봉순 선생에게 양서 분류법을 가르쳤습니다. 영문학 전공자였던 이봉순 선생이 사서의 길을 걷게 된 데에는 세키노의 영향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또 한 명의 운명적인 인물은 도서관 목록부에서 함께 일하던 남성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독일 문학을 공부하고 학문에 대한 깊은 열정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이봉순 선생과 그는 도서관에서 함께 일하며 점차 가까워졌고,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쌓아갔습니다. 당시 이봉순 선생은 부모님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고, 해방 후 인천에서 교편을 잡은 남편과 짧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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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인 수필집 출판 기념 동창회(오른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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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주년 기념 도서관 기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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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 수필집 출판 기념 동창회(오른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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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주년 기념 도서관 기공식

책을 넘어 사람을 좋아한 이봉순

이봉순 선생은 1949년 봄부터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이하 이화여대) 도서관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화여대는 1946년 대학으로 승격되었는데 당시 김활란 총장은 대학 발전을 위해 도서관과 전문 도서관인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이봉순 선생에게 미국 유학을 권유했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한 후 부산으로 피란을 간 이봉순 선생은 김 총장의 소개로 미8군 민사처에서 일하며 유학을 준비했고, 1951년 마침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봉순 선생은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일리노이대학교를 거쳐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그에게 영향을 준 일리노이대학교 도서관장인 로버트 다운스(Robert B. Downs) 교수를 만났습니다. 그는 이봉순 선생에게 “도서관인이 되려거든 책 대신 사람을 좋아하라”는 조언을 건넸고 이봉순 선생은 이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간직했습니다. 아무리 도서관 건물이 휘황찬란하고 좋은 책이 많아도, 사람들이 찾지 않으면 도서관으로서 참된 기능을 다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 말이었습니다. 이봉순 선생은 평생 이 점을 가슴 깊이 새기고 도서관 업무에 임했습니다.
인디애나대학교 대학원에서 도서관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1954년 귀국한 이봉순 선생은 이화여대 도서관 차장을 거쳐 1955년에는 도서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최초의 여성 대학 도서관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봉순 선생에게는 영광을 누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폭격으로 파손된 도서관 건물을 재건하는 작업과 함께 도서관인 양성에 힘쓰며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같은 해에 도서관학 부전공 과정이 개설되었으며, 이는 한국에서 도서관학을 대학 정규 과목으로 채택한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1959년에는 이화여대에 독립된 도서관학과가 설립되었고, 이봉순 선생은 한국 여성 최초로 도서관학과(현 문헌정보학과)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1985년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이화여대 도서관학과에서 함께한 그는 우리나라 도서관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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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사이사이 부인 방문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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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봉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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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여전 4학년 재학 시절(오른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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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이사이 부인 방문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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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봉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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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여전 4학년 재학 시절(오른쪽 끝)

한국 도서관계 ‘외교관’으로 활약

이봉순 선생이 세계 무대에 나선 계기는 엄대섭이라는 사람의 권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봉순 선생에게 “당신이 이화여대만을 위해 공부한 줄 알아요? 한국 도서관을 위해 공부한 것이지요”라며 한국도서관협회를 함께 재건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봉순 선생은 그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고, 1956년 한국도서관협회 이사가 되어 인도·태평양 지역 자료 교환 세미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며 이후 50년 동안 외교 활동에 헌신했습니다.
국제회의에 참석한 이봉순 선생은 우리 문화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외국 학자들에게 한국의 문화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적절한 답변을 하지 못한 경험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도서관학과 정규과목으로 한문, 일본어, 한국의 서지(書誌)와 고활자 강의를 개설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책을 정리하는 도서관인의 역할을 넘어 그 속에 담긴 가치를 깊이 이해하는 지식인을 양성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이봉순 선생은 관장 서리(署理) 기간을 포함해 약 30년 동안 이화여대 도서관장으로 일했습니다. 이는 아마도 최장기 도서관장 재임 기록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봉순 선생의 헌신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은퇴 후에는 한국사회과학도서관 관장직을 수행했습니다. 이봉순 선생은 ‘도서관인’이자 ‘도서관쟁이’로서 치열한 삶을 살았습니다. 문헌정보학자 김정근은 그를 “책 100권을 쓴 것보다 더 크고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봉순 선생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설명하는 데 긴 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봉순 선생의 다양한 별칭은 그가 도서관을 위해 평생 얼마나 열정적으로 일했는지, 그 일들이 얼마나 빛나는 업적으로 남았는지를 분명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케이 로고 이미지

역사한스푼04

▲ 1960년대 이화여자대학교 교직원 단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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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이화여자대학교 교직원 단체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