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덕 선생은 교육자이자 아동문학가로, 평생 어린이와 함께하는 글쓰기 교육과 아동문학 발전에 헌신한
분입니다. 교사로 근무하며 어린이 글쓰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아이들이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독려했습니다. 이오덕 선생에게 글쓰기란 무엇이었을까요?
글 황인희 역사 칼럼니스트
대학교 졸업 후 줄곧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월간 「샘터」 편집장을 끝으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다수의 책을 저술했고, 현재 역사 칼럼니스트, 인문여행 작가로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사진 및 자료 제공: 『이오덕 일기』, 양철북 출판사
*사진 및 자료 제공: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역사관, 국립중앙도서관 『도서관계』
우리 글과 말의 중요성을 일깨운 이오덕 선생
“밖에서 들어온 잡스런 말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첫째는 중국글자말이요, 둘째는 일본말이요, 셋째는
서양말이다. 이 세 가지 바깥말이 들어온 역사도 중국글자말·일본말·서양말의 차례가 되어 있는데, 중국글자말은
가장 오랫동안 우리 말에 스며든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일본말은 중국글자말과 서양말을 함께 끌어들였고,
지금도 끊임없이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깊은 뿌리와 뒤엉킴을 잘 살펴야 한다. 정말 이제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넋이 빠진 겨레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겠다.” 이 글은 이오덕 선생의 대표 저서인 『우리 글 바로 쓰기』* 들어가는 글에 실린 원문입니다. 이 글만 보아도
그가 평생 무엇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 말과 글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으며, 이를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 일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이오덕 선생은 1925년 경상북도 청송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지만,
집안이 가난해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학업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던 이오덕 선생은
학비 걱정이 없는 농업학교에 입학하며 공부에 대한 열망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농업학교에 다니며 날씨가 좋을 때는 밭에서 일하고, 비 오는 날에는 교실에서 공부했습니다. 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이오덕 선생은 영덕군청에 취직해 일하면서도 공부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스무 살 무렵에
교원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는 청송에 있는 부동초등학교에 부임한 뒤, 1986년 명예퇴직할 때까지 43년 동안
어린이들과 함께했습니다.
*출처: 『우리 글 바로 쓰기』, 한길사
▲ 1979년 안동 길산초등학교
▲1962년 상주 청리초등학교 학생과 이오덕 선생
▲1979년 안동 길산초등학교
▲1962년 상주 청리초등학교 학생과 이오덕 선생
‘글쓰기 교육 운동’의 씨앗이 된 글쓰기 정신
1955년, 이오덕 선생은 『소년세계』에 실린 동시 ‘진달래’로 등단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은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꿩’이 당선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주로 어린이들의
일상을 다룬 동화를 집필했으며, 그의 글은 대화하듯 쉽고 자연스러운 표현이 많았습니다. 또 이오덕
선생은 당시 잘못된 글짓기 교육을 비판하며 ‘글쓰기 교육 운동’의 씨앗이 된 책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들의 글을 읽으면 아이들을 믿게 된다. 아이들의 글을 읽으면 아이들을 배우게 된다. 그 누가 아이들의
글은 아무 가치도 없다고 했던가? 그런 사람은 아이들을 가르칠 자격도, 아이들이 읽을 글을 쓸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아이들의 글이 아무 가치도 없다면 어른들의 흉내를 내게 한 때문이다. 아이들을 원숭이나
앵무새로 만들어 놓고 그런 아이들을 얕보는 어른들이 뜻밖에도 많다. 아이들을 믿게 하는 글, 아이들을
배우게 되는 글, 그런 글을 쓰게 해야 한다. 아이들이 스스로의 삶에 긍지를 가지는 글을 쓰게 해야 한다.
글을 쓰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인간 교육이 있는지를 나는 모른다. 글쓰기보다 더 나은, 아이들을 지키고
가꾸는 교육이 있는지를 나는 모른다. 내가 40년 동안 아이들과 살면서 여기에 정신을 판 까닭이 이러하다.”
이오덕 선생은 아이들이 자연과 어울리며 삶의 본질을 느낄 수 있는 교육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우리말로 글을 쓰도록 가르치고, 함께 그림을 그리며 즐겁게 노래했습니다. 그러는 한편 아이들이
부모의 농사일, 이웃 그리고 자신들이 속한 마을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이끌었습니다. 이를 통해 아이들이
스스로 참된 삶의 가치를 찾아가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시골 할머니도 쉽게 알아듣는 말,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야말로 바르고 좋은 말이라며, 관공서,
언론, 작가, 지식인들이 우리말을 어지럽힌 주범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특히 지식인들이 권위를 세우기 위해
어렵고 복잡한 말을 사용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반면, 삶의 현장에서 쓰이는 일상의 언어야말로 가장 자연스럽고 올바른 언어라고 믿었습니다. 또 ‘글짓기’라는
표현이 인위적으로 꾸며낸 느낌을 준다며, ‘글쓰기’라는 표현을 쓰자고 제안하며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운동에 평생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 1989년 어린이 독서 교육 강연회
▲문집
▲ 이오덕 선생의 시그림 공책
▲ ‘하느님의 고무신’ 초고
▲1989년 어린이 독서 교육 강연회
▲문집
▲ 이오덕 선생의 시그림 공책
▲ ‘하느님의 고무신’ 초고
이오덕 선생의 유산, 이오덕학교
퇴직 후 이오덕 선생은 학교 설립을 준비하며 동료들과 함께 학교 정관을 작성했습니다. 그러나 개교를 보지
못한 채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가족과 동료들은 대안학교인 이오덕학교를 설립하고,
학생 30명으로 개교했습니다.
이오덕학교는 선생의 교육 철학을 바탕으로 우리말을 바로 쓰고 살려 쓰기, 어린이의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통해 우리 문화와 역사를 올바르게 배우도록 지도합니다. 또 좋은 책을 펴내는 활동과 글쓰기, 미술,
음악, 춤, 연극 등 삶을 가꾸는 표현 교육, 스스로 탐구하는 공부, 약이 되고 좋은 먹을거리가 되는 풀과 나무에
대한 학습, 삶과 연결된 수학 교육, ‘살아 있는 영어’도 가르칩니다.
이오덕 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 평생 추구했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쓴 시 ‘빛과 노래’를
남겼습니다. 자신이 머지않아 세상을 떠날 것을 예감하며 쓴 마지막 작별인사와도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한 달 동안 병원에서 / 밤낮 노래를 들었다. / 며칠 뒤에는 고든박골 병실로 옮겨 / 햇빛 환한 침대에 누워 /
새소리 바람 소리 벌레 소리를 듣는다. / 아, 내가 멀지 않아 돌아갈 내 본향 / 아버지 어머니가 기다리는 곳 /
내 어릴 적 동무들 자라나서 사귄 벗들 / 모두 모두 기다리는 그곳 / 빛과 노래 가득한 그곳 / 그리고 보니 나는
벌써 / 그곳에 와 있는 것 아닌가 / 그곳에 반쯤 온 것 아닌가 / 나는 가네 빛을 보고 노래에 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