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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 스푼

20세기 입자물리학의 이론가

이휘소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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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 박사는 20세기 입자물리학의 중요한 이론가로,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문제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맵시 쿼크의 질량을 예측할 수 있는 이론적 기틀을 마련하여 그 탐색에 기여했습니다. 그의 연구는 수많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때문에 그는 종종 ‘노벨상 메이커’로 불렸습니다.

글 황인희 역사 칼럼니스트

대학교 졸업 후 줄곧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월간 「샘터」 편집장을 끝으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다수의 책을 저술했고, 현재 역사 칼럼니스트, 인문여행 작가로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사진 및 자료 제공: 한국과학기술한림원 과학기술유공자지원센터

*사진 및 자료 제공: 한국과학기술한림원 과학기술유공자지원센터

천재 물리학자의 탄생과 유학길

이휘소 박사는 의사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경기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을 피해 가족과 함께 공주, 마산 등지로 옮겨 다니다가 부산으로 임시 이전한 경기중학교에서 다시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이휘소 박사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뛰어난 성적으로 입학했습니다.
공대에서 한 학기를 마친 이휘소 박사는 물리학에 깊이 빠져들어 아예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로 전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서울대학교에서는 단과대학 간 전과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크게 실망한 이휘소 박사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6·25전쟁 참전 미군 장교 부인회의 후원을 받아 미국 유학 장학생으로 선발된 것입니다.
이휘소 박사는 마이애미대학교 물리학과 3학년으로 편입했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의 학업 성적을 인정받은 결과입니다. 이휘소 박사에게도 처음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전공을 바꿨기에 어려움은 더욱 컸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고난을 성실함과 끈기로 극복했습니다. 매일 아침 7시 이전에 일어나 8시부터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난 후에는 밤늦도록 도서관에 남아 과제를 모두 끝낸 후에야 기숙사로 돌아오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미국 유학길에 오른 지 1년 반 만인 1956년 6월, 최우등으로 물리학과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이휘소 박사의 가능성을 인정한 마이애미대학교 교수들은 그가 피츠버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도록 추천했습니다. 대학원에서 이휘소 박사는 연구조교와 교육조교를 겸했고, 대학원생임에도 강의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이 무렵 그는 입자이론물리학 중에서도 양자장론(Quantum field theory)*을 전공하기로 진로를 정했습니다.
*양자장론: 장(field)을 양자역학적으로 다루는 이론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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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 박사의 어린 시절 (맨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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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초 이휘소 박사와 그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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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휘소 박사의 유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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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에서 물리학을 강의하고 있는 이휘소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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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 박사의 어린 시절 (맨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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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초 이휘소 박사와 그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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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휘소 박사의 유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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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물리학을 강의하고 있는 이휘소 박사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성장하다

피츠버그대학교 박사학위 자격 시험에도 수석으로 합격한 그는 원자핵 이론 강의를 담당하던 시드니 메슈코프(Sydney Meshkov) 교수의 추천으로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에이브러햄 클라인(Abraham Klein) 교수에게 발탁되었습니다. 클라인 교수는 이휘소 박사를 영입하기 위해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박사학위 자격 시험을 면제해 주는 동시에 해리슨 연구장학금을 주선했습니다.
이휘소 박사는 클라인 교수와의 공동 연구를 통해 1960년 11월, 「K+ 중간자와 핵자 상관 현상의 이중 분산 표식에 관한 연구(Study of K+ Scattering in the Double Dispersion Representation)」 논문으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였습니다.
이후 그는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조교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정교수가 되었습니다. 1966년에는 뉴욕주립대학교(스토니브룩 캠퍼스) 방문 교수로 중국계 과학자 양전닝(楊振寧)과 함께 연구했고, 1973년부터는 시카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페르미 국립가속기연구소 이론물리학부장을 맡았습니다.
특히 이휘소 박사는 1970년대 물리학계의 큰 쟁점이었던 맵시 쿼크(Charm quark)**의 질량을 이론적으로 예측한 연구로 명성을 떨쳤으며,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 정립에 기여한 그의 연구는 현대 물리학의 발전을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또 자발적 대칭 깨짐 이론을 통해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해결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맵시 쿼크: 양성자, 중성자와 같은 소립자를 구성하고 있는 입자인 쿼크 가운데서 세 번째로 무거운 쿼크
***재규격화: 게이지 이론의 질량, 결합상수 등을 조정하여 무한대의 값이 물리적 관측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수학적 기술로 재조정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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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스티븐 와인버그 교수와 이휘소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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맵시 쿼크 연구를 통해 표준모형을 발전시킨 이휘소 박사와 메리 가이아드 박사(왼쪽에서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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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스티븐 와인버그 교수와 이휘소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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맵시 쿼크 연구를 통해 표준모형을 발전시킨 이휘소 박사와 메리 가이아드 박사(왼쪽에서 두 번째)

갑작스러운 죽음과 남겨진 유산

과학자로서 인류의 미래를 깊이 고민한 이휘소 박사는 “핵무기는 언젠가 반드시 없어져야 하며, 특히 독재가 행해지는 나라에서의 핵무기 개발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핵물리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업적을 남기며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1977년 6월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핵무기 확산을 경계했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많은 이에게 충격과 깊은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그의 사망에 대한 다양한 추측이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단순 교통사고로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197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압두스 살람은 수상 소감에서 이휘소 박사를 언급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습니다. 그는 “이휘소는 현대 물리학을 10년 앞당긴 천재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부끄럽다”라고 말하며 깊은 존경을 표했습니다. 만약 이휘소 박사가 생존했다면, 노벨상을 수상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많은 이가 아쉬워했습니다.
이휘소 박사는 생전 노벨상을 받지 못했지만, 그의 연구는 오늘날까지도 물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젊은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그의 삶과 업적은 그가 떠난 뒤에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케이 로고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