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성미 l 사진 김성진 l 영상 이한솔
글 이성미 l 사진 김성진 l 영상 이한솔
“이 그림은 할머니와 아버지가 바나나를 팔러 간 동안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베트남어로 ‘쩌 더이(chờ đợi)’, ‘그리움’이라는 제목을 붙였지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 자리한 안산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이곳 2층 로비에는 지난해 봄부터 겨울까지
베트남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수채화 작품이 전시됐다. 김재민 작가가 베트남을 오가며 만난
풍경을 그린 작품들이다.
“다들 작가님 작품을 좋아해요. 고향 풍경이라며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가는 사람도 많고요.”
오랜만에 센터를 찾은 김재민 작가를 알아보곤 직원들도 반가워한다.
김재민 작가의 그림이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베트남을 잘 아는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연구를 위해 그는 무려 30여 차례나 한국과 베트남을 오갔다. 김재민 작가가 베트남 전문가가 된
사연은 무엇일까?
베트남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은 미국의 요청으로 약 9년간 31만 여명을 파견했다. 과거 전쟁으로
대립하며 긴장 관계에 있었지만, 1992년 한국-베트남 수교 후 양국은 활발히 교류·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다. 현재 많은 사람이 여행, 사업, 결혼 등을 목적으로 한국과 베트남을 찾고, 정착해 가정을 꾸린다.
김재민 작가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양국의 역사가 마치 운명으로 얽힌 형제의 이야기 같다고
생각해 강한 끌림을 느꼈다.
“고등학생 때부터 여행 도서를 읽으며 전 세계를 누비는 꿈을 꾸었습니다. 1987년 교사가 되어서도
수업의 질을 높이고 학생들의 꿈을 키우는 데 여행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죠. 같은 이유로 대학원에서
관광경영학을 전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세계 여러 나라를 두루 다녀볼까, 아니면 한 나라를 깊이
연구할까?’ 고민하다 후자로 결정했어요. 대한민국과 운명으로 얽힌 이웃 나라 베트남을 연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993년, 김재민 작가는 베트남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처음 마주한 베트남은 6·25전쟁 직후 우리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었다.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였다. 한편 사람들은
매우 순수했고, 이방인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내 아버지는 한국인”이라며 가족을 찾아달라고 사진을 들이미는
사람도 있었다. 김재민 작가는 이런 모습에서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꼈다. 특히 베트남전쟁 관련 유적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쓰렸다. 한국 사람들이 베트남의 역사와 여행 정보를 제대로 알고 이곳을 찾게 만들어야겠다는
사명감도 들었다.
김재민 작가는 1994년 첫 가이드북 『한국사람 베트남 캄보디아 가기』를 펴냈다. 이후 『인사이드 베트남』,
『인사이드 베트남 앙코르 방콕』 등도 세상에 선보였다. 인도와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문화에 크게 영향을 끼치는
신화 ‘라마야나’를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게 정리해 소개하기도 했다. 2013년에는 EBS ‘세계테마기행’에
출연해 베트남 전통 바구니 배(thuyền thúng)를 비롯한 베트남의 문화와 민족을 소개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있게 소개하고, 베트남 여행도 함께 다녔다. 대내외적으로
베트남 전문가이자 작가로 인정받은 셈이다.
2020년 인천 송도고등학교를 끝으로, 35년의 교직 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임한 김재민 작가. 그는 퇴직 5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해 활발한 작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동안 안산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초대전
등 10여 차례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열고, 인천광역시근로자종합예술제 대상 등 다수의 상도 받았다.
김재민 작가의 작품은 베트남 사람들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담은 것이 특징이다. 메콩강 삼각주 지역 수상시장,
시장에서 흥정하는 사람들 등 베트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을 화폭에 옮긴다. 한국으로 이주해 온
베트남 사람들을 위해서다.
“베트남의 생활상을 화폭에 담겠다고 결정했을 때 말리는 사람도 있었어요. ‘돈이 안 되는 그림’이라는 이유였죠.
그림을 비싼 값에 팔거나 큰 상을 받겠다는 욕심은 없어요. 그보다 제가 받고 싶은 것은 ‘공감’입니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오거나 일하러 온 사람들이 제 그림을 보고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면 좋겠어요. 또 그들의 자녀가
부모의 나라에 자부심을 품으면 좋겠고요.”
김재민 작가는 더 많은 사람이 그림으로 위로받길 바라며, 다문화 관련 축제와 행사, 관련 기관을 찾아다니며
무료로 그림을 전시한다. 베트남전쟁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비영리단체 ‘한베평화재단을 통해 기부도 한다.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위해 그림을 가르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앞으로도 김재민
작가는 베트남을 향한 진심을 계속 전할 것이다.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특히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다 독립하고, 곧바로 전쟁을 겪고, 다시
일어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똑 닮았죠. 비슷한 운명을 갖고 탄생한 두 나라가 계속해서 서로 돕고 응원하며
앞으로 나아가면 좋겠어요. 또 우리나라 국민이 베트남을 비롯한 다문화가정을 더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 주면
좋겠습니다.”
김재민 작가는 베트남을 한국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리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는 베트남이 그를
돕는다. 퇴직 후에도 작가로서 계속 달리게 한다. 이들의 긴밀한 동행처럼, 한국과 베트남 양국이 파트너로서
더욱더 가까워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