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에세이

그해, 9월의 성혼선언문
이로써 결혼이 성립되었음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에세이>는 교사의 마음이 느껴지는 공감 에세이로 수많은 사건 사고를 겪으면서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코너입니다.
  • 글. 김성효(전라북도교육청 장학사)

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냈다. 성혼선언문 마지막 문장은 짧고 묵직했다. 고개를 들었다. 9월의 신부가 된 아름다운 네가, 오래전 나를 그렇게나 속 썩이고 슬프게 하던 네가 훌쩍 자라 어른이 되어 거기 서 있었다.
그해 아이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속을 썩였는지 모르겠다. 허구한 날 싸우고 울고 누군가는 다쳤다. 아이들이 울고불고 난리칠 때마다 너는 그 가운데에 있었다. 처음에는 좋게 시작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멀어졌을까, 너를 볼 때마다 생각했더랬다. 우리의 시작은 정말로 괜찮았으니까.
“선생님, 머리 만져도 돼요? 저는 다른 사람 머리 만지는 게 좋아요.”
“머리 만지는 게 왜 좋은데?”
“그냥요. 저는 이렇게 다른 사람 머리 만지고 빗어주는 게 좋아요.”
“그럼 틈날 때마다 이렇게 머리 만져줘. 선생님은 누가 머리 만져주면 좋더라.”
네가 머리를 만질 때면 내 마음은 한없이 풀어졌다. 어릴 때도 너는 머리 땋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네가 땋아준 머리는 언제나 맘에 들었다. 어느 날이었다. 수업시간에 네가 머리를 자꾸만 이쪽으로 넘겼다가 저쪽으로 넘겼다가 했다. 왠지 모르게 그런 네가 거슬렸다.
“왜 그렇게 머리를 넘기는 건데?”
그 말에 머리를 넘기다 말고 너는 나를 빤히 보았다. 안 그래도 동그랗고 큰 눈이 더 동그래졌다.
“그게, 아, 그…….”
못된 선생, 나는 네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누가 고무줄 좀 줘라. 머리 묶어. 수업에 집중해.”
그 다음부터였을까. 너와 나는 서서히 멀어졌다. 네가 선생님과 사이 나쁜 아이들 가운데 하나가 된 뒤 어느 날 갑자기 깨달았다. 더 이상 네가 쉬는 시간에 내 머리를 만지지 않는다는 걸.
시간이 흘러 너희들은 졸업을 했다. 더는 수업 시간에 지지고 볶지 않아도 됐다. 왜 자꾸 화나게 하냐고 소리 지르지 않아도 됐다. ‘성효샘’ 삶에 유일한 흑역사라고 스스로 말하는 너희들과의 시간은 그렇게 잊혀졌다. 너희들을 까맣게 잊고 살던 어느 날이었다. 머리를 하러 미용실에 갔다가 너를 우연히 만났다.
“혹시 김성효 선생님 아니세요? 선생님, 저 재희예요.”
노랗게 탈색한 긴 머리에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지만 동그랗고 큰 눈, 정말 너였다.
“어머, 진짜 오랜만이다. 너무 반가워. 이 미용실에서 일하는 거니?”
너는 내 머리를 감기면서 짧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학에서 미용을 전공했고 미용실에서 보조로 일을 시작했다고, 서울로 가서 더 경험을 쌓을 거라고. 여긴 너무 좁아서 배울 게 없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너의 꿈을 들었다. 그리고 네가 해주었던 뜻밖의 이야기, 너는 기억하려나.
“선생님, 그때 제가 엄청 속 썩였잖아요.”
“그랬지. 그때는 선생님이 경험도 없고 잘 못 가르쳐서 그랬나봐.”
“아니에요. 저 처음에는 선생님 되게 좋아했어요.”
“근데, 왜?”
가슴이 쿵했다. 수없이 생각했던 ‘왜 그랬을까’를 드디어 듣는 거였다.
“선생님이 저 머리 새로 하고 간 날 묶으라고 했어요. 그게 어찌나 기분 나쁘던지.”
세상에! 너는 그날 머리를 새로 하고 왔던 것이다. 매직스트레이트라는 비싼 파마를 하고 왔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너한테 머리를 묶으라고 했던 거였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내가 싫어졌다고?”
“네. 그래서 싫어졌어요.”
할 말이 없었다. 그래, 그렇지. 사춘기 아이들은 아주 작은 일 하나로도 선생과 사이가 멀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온전하게 회복되기도 한다. 그땐 왜 그걸 몰랐을까. 그저 다시 네가 머리를 만져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 했는데, 네가 진짜로 머리를 만져주는 사람이 되었을 줄이야.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너는 내가 자주 다니던 미용실의 디자이너로 왔다. 너는 그사이 꿈꾸던 대로 서울에서 경력을 쌓았고, 수많은 손님들의 머리를 해줬다고 했다. 너는 곧 미용실을 차렸고 나는 자연스레 네 단골이 됐다.
“선생님, 저 결혼해요. 부탁이 있어요. 꼭 들어주시면 좋겠어요.”
뜻밖에도 너는 내게 성혼선언문을 읽어달라고 했다. 주례 없는 결혼식이기에 성혼선언문을 읽어줄 누군가가 필요한데, 그게 꼭 나여야 한다고 했다.
“선생님이 안 해주신다고 할까봐 엄청 걱정했어요. 선생님, 정말 감사해요. 당일에는 저희 미용실에서 머리 하고 오세요. 공짜로 해드릴게요.”
특별히 그날은 머리를 공짜로 해주겠다면서 쾌활하게 웃던 너. 나는 네가 시킨 대로 네 미용실에서 머리를 했다. 식장으로 가는 내내 떨렸다. 성혼선언문을 다 읽은 다음 네 눈에 번지던 눈물을 보고 얼마나 울컥했던지 모른다. 요즘은 미용실에 갈 때마다 네가 말한다.
“제가 손님들한테 선생님 자랑 많이 해요.”
재희야. 너는 모르지만 나도 많이 자랑한단다. 어딜 가나 꼭 하는 말이 있지.
“이 머리, 우리 제자가 해준 거예요.”
시간이 더 흘러 네가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고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으면 좋겠다. 선생님은 여전히 너를 사랑하니까.

*김성효 장학사는 세상을 바꾸는 힘은 교육에서 나온다고 믿는 열혈 독서가 선생님이자 글쓰기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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