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8세에 사서삼경을 뗐을 정도로 수재였던 김병로. 힘든 유학 생활을 거쳐 변호사가 된 그는 강직하고 곧은 성품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농민, 노동자들을 변호하며 법정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광복 이후에도 좌우를 포용하고 독재정치를 비판하면서, 할 말은 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김병로는 우선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법조인 신분으로서 당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던 세력들을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이를 위해 1927년에 창립된 좌우합작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에 가입했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광주를 찾아 진상을 조사하고 일제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며 시정을 촉구했다.
이듬해에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서 신간회 ‘해소론(解消論, 신간회를 없애야 한다는 여론으로 젊은 사회주의자들이 주장)’이 대두되자 이에 반대하며 민족협동전선을 유지하려 했으나 결국 신간회는 해체되고 말았다. 김병로는 한때 사회주의 조직인 북풍회(北風會)에도 관여하는 등 좌·우의 이념에 구애되지 않고 민족의 독립을 위한 단결과 협동을 호소했다. 이처럼 민족을 위해 여러 방면에서 활동한 김병로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1929년 김병로는 다양한 사건의 변호를 맡으며 연단에 자주 섰다. 특히 신간회 활동으로 그가 연사로 나선 집회가 당국으로부터 금지되고, 신간회 간부들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1931년에는 6개월 동안 변호사 정직처분을 받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김병로는 건국 운동의 일선에 나섰다.
김병로는 법조인이자 정치인으로서 건국 운동에 투신했다. 여운형(呂運亨,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겸 저술가. 1945년 8월에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9월부터 1946년에는 2월까지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을 지냄)의 건국 준비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건국준비위원회를 방문하여 좌우합작을 제의하기도 했고, 아놀드 미군정장관이 건국준비위원회를 매도하자 이를 비판하는 논평을 내는 등 좌우 세력을 모두 포용하는 건국 운동을 벌였다.
1946년에는 서울에서 신탁통치(국제 연합으로부터 신탁을 위임받은 나라가 일정한 지역을 통치하는 일)를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벌이다 학생들이 체포되자 김병로는 학생들을 변호했다. 또한 1946년에는 비상국민회의 임시의장, 비상국민회의 법제상임위원장,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산하경제전문위원회 위원, 민족통일총본부 간부, 1947년에는 도산기념사업회 발기인, 민족자주연맹 결성 준비위원회 위원 등을 맡으며 대한민국의 정부 각 요직에서 활동했다.
김병로는 1946년 미군정청 사법부 법전기초위원회 위원, 미군정청 사법부장, 1947년 사법부 내 6인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사법제도의 기초를 닦았다. 법조인으로서 누구보다 실력과 성품이 출중한 그가 대한민국 사법부의 첫 수장이 된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1948년 8월 5일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에 임명되어 국회의 인준을 받았고, 이 밖에도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 법조협회회장을 맡아 사법부의 발전을 위해 힘썼다.
하지만 김병로는 친일파 처벌을 둘러싸고 이승만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관장을 맡아 민족정기 회복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인 김병로는 반민족행위자들의 처벌이 민족적 과제임을 천명하고 신속·공정한 재판을 강조했다. 친일파 처벌에 미온적인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법 개정을 요청했을 때에는 이를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전쟁 도중 부인(연일정 씨)을 잃었다.
그는 특히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일으킨 부산 정치파동에 반발했는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법원의 판결을 비난하자 시대 분위기 속에서도 굳은 심지를 드러내며 “억울하면 절차를 밟아 항소하라”라고 받아친 것은 오늘날까지도 사법부의 전설적인 명언으로 꼽힌다. 그가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소장 판사들을 보호한 덕에 사법부는 비교적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후임들은 대부분 친일 판사들이 등용되었다. 사법부가 독재정권에 아부하게 된 탓에 진보당 사건, 사법 파동, 10월 유신을 거치면서 사법부의 독립은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1957년 퇴임사에서도 “법관은 최후까지 오직 ‘정의의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고 외친 김병로. 그는 우리나라 민법, 형법, 형사소송법의 기틀을 다지며 퇴임 이후에도 재야에서 민주화와 사법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