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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으로 대변되는 인도양의 섬나라,
스리랑카

SRI LANKA 홍차와 불교 유적지로 유명한 나라인 스리랑카는 한때 ‘실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오랫동안 유럽 몇몇 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1972년에 본래의 이름인 ‘스리랑카’를 되찾았다. 스리랑카는 인도 남쪽에 있는 섬나라다. 얼핏 보기에 섬의 형태가 마치 작은 나뭇잎 또는 눈물방울을 연상케 한다. 그 형태 때문에 혹자는 스리랑카를 가리켜 ‘인도양의 눈물’이라 부르기도 한다.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관광자원은 불교 유적지다. 기원전 3세기 무렵에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로 일찍이 찬란한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다. 아누라다푸라를 비롯해 폴론나루와, 캔디, 시기리야 등이 스리랑카에서 훌륭한 불교 유적을 만날 수 있는 대표 명소다.
  • 글_사진. 송일봉(여행작가)
*송일봉 작가는 (사)한국여행작가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해외여행전문지 ‘코리안 트레블러’ 편집부장과 대한항공 기내지 ‘모닝캄’ 편집장을 지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주관하는 ‘길 위의 인문학’ 기획위원과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주관하는 ‘국립공원 대표경관 100경’ 선정위원 등을 지냈다. 현재 문화답사 프로그램 ‘송일봉의 감성여행’을 24년째 진행하고 있으며, 매주 KBS, MBC, 교통방송 등에 출연하고 있다.

  • 01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보리수나무
  • 02 ‘스노우 모빌 타기 체험’을 준비하는 관광객들
  • 03 벽돌로 지은 불탑인 제타바나라마야
  • 04 아누라다푸라에서 가장 오래된 불탑인 투파라마
  • 05 아누라다푸라 근교에 있는 시골장터
스리랑카의 고대 도시, 아누라다푸라

스리랑카의 역사는 싱할라 왕조가 시작된 기원전 483년부터 따지면 2,500년이 넘는다. 싱할라 왕조의 유래에 대해서는 데바남피야 티사 왕이 통치하던 기원전 247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누라다푸라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불교 유적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곳곳에 크고 작은 탑과 사원들이 산재해 있다. 세계 각국의 불교 신자들을 비롯해 고건축에 관심이 많은 건축학도와 미술학도들 그리고 세계적으로 저명한 문화재 전문가들과 고고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다.
아누라다푸라는 기원전 4세기 무렵에 건설된 이후로 남인도 침략자들의 공격을 받은 993년까지 1,300년이 넘게 싱할라 왕조의 수도로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곳이다. 아누라다푸라 최대의 전성기는 두투가마니 왕이 통치하던 기원전 167년부터 137년까지 30년. 현재 아누라다푸라 곳곳에 산재해있는 불교 유적들 대부분은 바로 이 시기에 조성되었다.
하지만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태평성대를 누리던 아누라다푸라는 수백 년 동안이나 밀림 속에 파묻혀 있었다. 잦은 외침을 견디다 못해 수도를 근처의 폴론나루와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 후 1800년대 초에 이르러 영국의 한 젊은 관리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면서 아누라다푸라는 세상 사람들에게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후 1912년부터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불교문화 중심지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 아누라다푸라에는 옛 왕궁을 비롯해 사원, 불탑 등 수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일명 ‘스리 마하 보디 트리’라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보리수나무(사진 01)다. 수령이 약 2,260년으로 추정되는 이 거목은 인도 아쇼카 왕의 딸이었던 상가미타 공주가 기원전 245년 무렵에 인도 부다가야의 보리수에서 꺾어온 나뭇가지를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아누라다푸라에는 높이 55m의 커다란 흰색 불탑인 루반벨리세야(사진 02)를 비롯해 발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제타바나라마야 불탑(사진 03), 아누라다푸라에서 가장 오래된 불탑인 투파라마 대탑(사진 04), 옛 스리랑카 사람들의 높은 문화수준을 엿볼 수 있는 고고학 박물관, 그리고 인공호수인 티사웨바 동쪽의 바위를 뚫어서 세운 사원인 이수루무니야 사원 등이 있다.

  • 06 폴론나루와 옛 시가지에 있는 왕궁터
  • 07 폴론나루와를 대표하는 불교유적지인 '갈 비할라'
08 고원도시 캔디에 있는 인공호수인 '캔디 호수
중세의 불교성지, 폴론나루와

스리랑카 싱할라 왕조의 수도였던 폴론나루와는 아누라다푸라에서 100km쯤 떨어져 있다. 폴론나루와는 인도의 잦은 침략에 견디다 못한 싱할라 왕조가 1293년에 수도를 포기한 이후로 수백 년 동안 밀림 속에 방치돼 있었다. 그 후 1900년 무렵에 유적 발굴이 시작되면서 중세의 불교성지(사진 06)로 빛을 보게 되었다.
폴론나루와 옛 시가지 한가운데 있는 ‘파라크라마 바푸 1세’의 왕궁터는 여행자들이 가장 먼저 찾는 명소다. 지금은 비록 다 허물어져 가는 옛 건물들이, 앙상한 기둥과 벽을 드러내고 있지만 우아한 기품과 위엄이 건물 곳곳에 서려 있다. 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폴론나루와 옛 시가지에는 왕궁터 외에도 거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투파라마 불당을 비롯해 폴론나루와에서 가장 예술적인 건물로 평가받고 있는 바타다게 불당, 그리고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비석인 갈포타 등과 같은 불교 유적들이 있다.
또한 폴론나루와 최고의 명소라 할 수 있는 ‘갈 비할라’에는 커다란 바위를 깎아서 3체의 불상을 만들어 놓은 불교사원 유적이 있다. 이들 불상 가운데서도 맨 오른쪽에 누워 있는 열반불상(사진 07)은 그 길이가 무려 13.4m나 되어서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이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불교 유적지들이 많은 북부 내륙지방과 인구 밀집 지역인 중남부 지방을 연결하는 산악지대는 고원 휴양지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해발 500m 지점의 아늑한 분지에 있는 ‘캔디’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휴양지이자 문화 여행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비밀스러운 느낌을 주는 데다 스리랑카 고유의 전통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가장 스리랑카다운 도시’로 불리는 곳이다.
오늘날 ‘캔디 문화’라 일컬어지는 스리랑카 고유의 특성을 잘 유지하고 있는 캔디는 1474년에 싱할라 왕조의 수도가 되면서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도시다. 캔디에 정착한 싱할라 왕조는 이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등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꾸준히 이어 나갔다. 그러나 350년 가까이 유지되던 싱할라 왕조는 1815년에 이르러 왕권 내부의 갈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결국 멸망하게 된다.
캔디 시내 한가운데 있는 캔디 호수(사진 08)는 1812년에 싱할라 왕조 마지막 왕이었던 ‘라자싱하’에 의해 조성되었다. ‘호반의 도시, 캔디’로서의 명성에 걸맞게 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잘 관리되고 있다. 호수 속에서는 캔디 사람들이 매우 신성하게 여기는 흰색 자라와 함께 여러 물고기들이 자라고 있으나 낚시는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다. 캔디의 가장 대표적인 명소인 ‘불치사’(스리 달라다 말리가와)(사진 09)는 불치(부처의 치아)를 모시고 있는 사원이다. 이곳에 모셔져 있는 불치는 기원전 543년 인도에서 석가모니를 화장할 때 수습한 것이라 한다. 불치가 캔디로 옮겨진 것은 1590년이다. 불치사는 새벽부터 해 질 무렵까지 개방되어 있어서 누구나 자유롭게 참배를 할 수 있다. 불치가 있는 방의 문은 하루에 세 번 행해지는 푸자(예불) 때만 열린다. 하지만 불치 실물이 공개되는 것은 1년에 한 번뿐이다. 해마다 8월에 열흘 동안 불치를 일반에 공개하는 ‘에살라 페라헤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축제 가운데 하나다.

  • 09 부처의 치아가 봉안되어 있는 불치사
  • 10 시기리야에 있는 바위산 전경
tip 스리랑카의 특산물
대표적인 특산물은 ‘실론 티’라 불리는 홍차다. ‘세계 최대의 홍차 수출국’이라는 타이틀이 이를 대변한다. 이 홍차들은 스리랑카 중부의 고산지대인 하푸탈레(우바 주)에서 많이 생산되고 있다. 스리랑카 홍차인 ‘우바’는 중국의 ‘기문’, 인도의 ‘다즐링’ 등과 함께 ‘세계 3대 홍차’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스리랑카는 보석의 산지로도 유명하다. 사파이어, 루비, 캣츠아이(묘안석) 등이 ‘보석의 도시’인 라트나푸라 등지에서 많이 산출되고 있다.
싱할라족의 정신적인 성지, 시기리야

스리랑카 전체 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싱할라족은 그들 스스로 ‘사자의 후예’라 믿고 있다. 국기에도 칼을 든 사자를 그려 넣었을 정도다. 사자를 영물로 여기는 싱할라족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자산’이라는 의미를 지닌 시기리야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시기리야’는 195m 높이의 거대한 바위산(사진 10)과 그 바위벽에 그려진 일명 ‘시기리야 레이디’라 불리는 벽화(사진 11)로 유명한 곳이다. 바위산이 있는 곳은 사방이 드넓은 밀림에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다. 여행자들은 마치 미로처럼 바위틈 사이로 난 돌계단과 철계단을 이용해 바위산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다.
밀림 한가운데 솟아있는 바위산은 473년에 부왕인 다투세나를 죽인 아들 카샤파가 이복동생인 모갈란의 복수가 두려워 세운 임시 왕궁이다.
이 바위산에는 무력으로 왕이 된 카샤파가 아버지 다투세나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당대의 예술가들을 동원해 그렸다는 벽화들이 1,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일설에는 “왕을 따라와 객지 생활을 하게 된 병사들이 고향의 아내를 그리워하며 그린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벽화가 있는 바위벽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옛날에는 정원이 있었다는 넓은 공터가 하나 나타난다. 이곳에서 다시 사자의 발톱이 새겨진 ‘라이언 테라스(사진 12)’를 지나 가파른 계단을 따라 10분쯤 올라가면 마침내 옛 왕궁이 있었던 정상에 서게된다.

스리랑카 지역 위치 인도-스리랑카, 벵골만 아누라다푸라 시기리야 폴른나루와 담불라 캔디 인도양 스리랑카 콜롬보 래카다이브해
  • 11 시기리야 바위산에 그려져 있는 벽화의 일부분
  • 12 사자의 발톱이 조각되어 있는 '라이언 테라스'
  • 13 2,000년 전에 조성된 담불라 석굴사원

바위산의 가장 높은 지점에는 해가 떠오르는 방향을 향해 커다란 돌을 깎아서 만든 왕좌가 놓여 있다. 아마도 카샤파는 바위산에서 11년을 사는 동안 이 왕좌에 앉아 불안한 상태로 연회를 감상하거나 깊은 사색에 빠지곤 했을 것이다. 왕좌 아래로는 야외 목욕탕을 연상케 하는 대형 수조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게 전부다. 훗날 동생 모갈란의 공격을 받고 생을 마감한 그의 운명처럼 7년 공사의 결실인 왕궁 건물의 흔적도 모두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시기리야의 들머리 역할을 하는 담불라는 2,000년 된 석굴사원(사진 13)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1세기 무렵. 남인도 타밀군에 기던 싱할라 왕조의 발라감부 왕은 잠시 동안 담불라의 야트막한 바위산을 은신처로 이용하게 된다. 훗날 피난 기간 동안 정성껏 도움을 준 승려들을 위해 발라감부 왕이 석굴을 지어준 것이 담불라 석굴사원의 시초다. 현재 담불라 석굴사원은 다섯 개의 석굴에 모두 160여 기의 석불이 모셔져 있다. 석불들을 조성하는 데는 이 동굴 속에서 캐낸 자연석을 사용했다고 한다.

tip 스리랑카 여행 시 주의할 점
스리랑카는 오래전부터 시작된 내전으로 인해 대다수의 국민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스리랑카 내전은 다수의 싱할라족(불교계)이 소수의 타밀족(힌두계)에 대한 차별정책을 펼치면서 시작되었다. 결국 타밀족은 1965년부터 분리 독립을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했다. 특히 1983년부터는 타밀족 무장단체인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와 정부군 사이에 간헐적으로 무력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현재 스리랑카는 우리나라 외교부에서 관리하는 여행 경보단계인 남색경보(여행유의), 황색경보(여행자제), 적색경보(철수권고), 흑색경보(여행금지), 특별여행주의보(철수권고), 특별여행경보(즉시대피) 가운데 1단계인 남색경보에 해당하는 나라다.
그동안의 내전으로 인해 스리랑카에서 외국 여행자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경계는 늦추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단체가 아닌 개인이 작은 도시를 여행할 경우에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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