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을 일깨운
의열투쟁의 화신
‘나석주 의사’
일평생 조국의 자유를 위해 치열히 투쟁하며 마지막 최후의 순간까지 2천만 민중의 분투를 촉구한 나석주 의사. 그는 조선 경제 침탈의 첨병인 일본의 수탈기관을 저격하며 민족혼을 일깨운 진정한 청년 투사였다. 비록 비운의 독립운동가였지만, 그의 투쟁은 일본의 수탈 정책에 허덕이던 조선 농민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주었다는 것에 대해 각별한 의미로 평가된다.- 글. 정상규(「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의 저자)
나석주는 1892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그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재령 명신학교에서 2년간 공부한 뒤 농사를 짓다가 스무 살이 되던 1912년, 황해도 안악에 있는 애국문화계몽 운동자들이 관리하는 양산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신민회’의 서북지방 책임자였던 백범 김구가 양산학교 교장이었는데, 나석주는 이곳에서 교육을 받고 영향력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보면서 독립정신을 키워나갔다. 이 때문에 훗날 김구와 나석주의 관계를 ‘스승과 제자’ 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나석주는 이듬해 처자식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친척 형인 나석연이 있던 만주 모아산으로 이동했다. 1915년에는 독립운동가 이동휘가 설립한 왕청현의 나자구 무관학교에 들어가 8개월 동안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1915년 모친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고향에 돌아온 그는 농부로 살고자 했으나, 1910년 경술국치(일본의 침략으로 한일합병조약에 따라 국권을 상실한 일) 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1908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기관. 이하 ‘동척’)의 수탈정책으로 집안의 땅을 일본에 모두 빼앗기고 소작농(토지를 지주로부터 빌려서 경작하는 사람)으로 전락했다. 동척은 “한국민에게 문명의 혜택을 입게 한다”고 표방했지만, 일제강점기 조선 최대의 지주로 한국 농민을 수탈하는 첨병 역할을 했다.
동척은 소작료를 생산량의 50%로 대폭 인상했다. 생산량도 그해에 실제로 생산된 양이 아니라 5년간의 생산량 중 최대·최소 2년 치를 빼고, 3년 동안의 평균값으로 결정했다. 흉년이라도 들면 소작료는 50%가 아니라 70~80%를 넘기기 일쑤였다. 3년마다 갱신하게 만든 소작권도 문제였다. 대대로 물려받은 경작지를 3년마다 갱신토록 바꿔버렸으니 농민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동척은 소작료를 미루거나 다른 소작인에 비해 작황이 떨어지면 3년이 되기 전이라도 가차 없이 소작 계약을 해지했다. 그는 동척의 무리한 소작료 인상에 항의했으나, 그 결과로 오히려 소작 농지마저 박탈당했으며 이는 동척에 대한 분노와 함께 독립운동의 계기로 작용했다. 이후 가족들과 함께 인근 지역인 황주군 겸이포로 이사를 한 그는 쌀가게를 운영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아가던 중, 기미년(1919년) 3·1 만세운동을 마주하게 됐다.
그는 동지들과 태극기를 만들어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1919년 3월 10일 내종리 장터에서 만세시위 운동을 주도했다. 이때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석방된 뒤 그는 정미업에 종사하다가 1920년 1월 김덕영, 최호준, 최세욱, 박정손, 이시태 등 동지 50명과 함께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그는 권총 등 무기를 구입한 뒤, 군자금 모집 활동과 친일파 처단에 나섰다.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금하여 보내고 대한독립단원들과 황해도 일대에서 친일파 숙청 공작 대원으로 활약했다. 또한 악질 친일파인 은율 군수를 처단하는 등 맹활약을 하던 중 일본 경찰의 체포 대상으로 지목되면서 감시가 심해지자 그는 상해 임시 정부로 향했다. 김구를 찾아간 그는 상해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일하며 밀정 색출, 처단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1923년 초, 정식 군사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되어 중국 허베이성에 있는 군관학교인 육군 제1군사강습소 군관단에 입교해 사관 훈련을 수료하고,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며 김구의 경호원을 지냈다. 그 뒤, 1925년 상해로 돌아와 톈진에서 의열단원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입단했고, 1926년 6월 톈진의 푸자오러우 여관에 체류 중이던 유림 출신 독립운동가 김창숙을 찾아가 김구의 소개장을 보여주며 거사를 모의했다. 이때 동척과 조선식산은행(이하 ‘식산은행’)을 파괴할 계획을 세웠다. 식산은행은 1918년 산업 개발을 목적으로 농공은행을 통합하여 설립한 후, 동척의 실질적 지배하에 성장했다. 중요 산업 기관에 자금을 대출해 줌으로써 경제 침략의 선봉에 섰던 은행이다. 훗날 6·25 전쟁 이후 경제 재건과 부흥을 위해 산업금융기관이 필요해지자, 1954년 국가 권력과 외국 원조를 바탕으로 국책에 순응하는 한국산업은행으로 재편·강화됐다.
‘중국 산둥성 출신 노동자, 나이 35세, 이름 마중덕.’
1926년 12월 26일 톈진에서 상선 융극호에 편승하여 이튿날 인천항에 도착한 이 중국인은 다름 아닌 신분을 위장한 나석주였다. 그는 열차를 타고 평안남도 진남포로 향했고, 중국인 전용여관이던 동춘여관에 투숙했다. 조국의 겨울은 몹시 추웠다. 그는 다음날 아침밥을 든든히 먹은 후, 마지막으로 거리를 지나다니는 동포들의 얼굴과 조국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민족의 고혈을 짜내고 있는 식산은행(현 롯데백화점 본점 자리)에 들어가서 폭탄을 던졌다.
나석주는 식산은행의 일반 통용문을 지나 대부계 철책 앞에서 폭탄 한 개를 던졌는데 터지지 않았다. 절망적인 생각과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바로 주변을 살폈으나 다행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태연하게 걸어 나와서 동척(구 외환은행 본점, 현 KEB하나은행 본점) 경성지점으로 달려갔다. 조선의 경제 착취를 위한 두 회사가 명동의 길 하나를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나석주는 동척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1층에서 일본인 잡지기자를 사살하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가 또 다른 일본인을 사살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도망가는 일본인을 사살하고, 토지개량부 기술과장실로 들어가서 일본인 두 명을 사살한 후, 다른 토지부 간부를 2층에서 집어 던져버리고, 곧바로 폭탄 1개를 던졌다.
나석주는 재빨리 1층으로 내려와서 2명의 일본인을 사살한 뒤, 건물 밖으로 나와 폭음을 기다렸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운명이 장난을 쳤다. 이번에도 ‘불발.’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시야가 노랗게 보였다. 지금의 을지로 1가 쪽에서 달려오는 일본 경찰을 쏘아 쓰러뜨릴 때까지도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다. 을지로 2가에 이르렀을 때는 경찰들의 포위망이 완전히 좁혀진 상태였다. 나석주는 운집한 사람들과 일본 경찰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외쳤다.
“우리 2천만 민중아! 나는 2천만 민중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희생한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분투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나석주는 현장에서 세 발을 더 쏘아 일본 경찰과 일본 경감 다하타 유이지를 사살한 뒤, 마지막 남은 한 발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자신을 향해 쏘았다. 일본 경찰이 곧바로 병원으로 옮긴 다음 이름을 묻자, ‘의열단원 나석주’라고 밝히고, 4시간 만에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 사건은 일본 「고등경찰요사」(일본외무성의 극비문서)에 나오는 실제 사건기록 내용이다. 1927년 5월에 그의 동지였던 의열단원 이화익이 북경에서 붙잡혀 신의주로 압송되자 비로소 그의 의거가 자세히 밝혀지게 됐다. 5월 31일에 그의 장남 나응섭이 상경하여 사진으로 아버지임을 확인하고, 유해를 인도받아 안장했다. 그 후 나응섭이 백운학으로 이름을 위장해 감시망을 뚫고, 상해 임시정부로 가서 이를 알리자 상해의 동지들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그의 추도식을 거행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1999년 11월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의거 장소(현 서울 중구 을지로 KEB하나은행 본점)에 나석주 의사 동상과 의거 표지석이 건립됐다.
(1927년 1월 13일자 호외)
- 나석주(羅錫疇) 의사(1892.2.4.~1926.12.28.)
- - 독립운동가, 군인
- - 의열단에 입단해 조선식산은행 및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 투척
-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