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에 자리한 한국생명의전화 본사 안의 상담실. 이곳에서는 매일 크고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되살아난다.
한국생명의전화 (☎1588–9191)는 우울증, 스트레스 등으로 살아갈 의지를 잃은 사람들과 24시간 365일 상담하는 곳이다. 살아갈 의지를 잃은 사람과의 상담뿐만 아니라, 자살 유가족과 뜻하지 않게 자살을 목격하면서 정신적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활동도 한다. 2020년 1~5월만 두고 봐도 정신 건강 문제, 자살 위기를 호소한 사례가 614건으로 지난해 대비 70% 이상 늘면서 상담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자살 예방을 위해 한강 교량 등에 설치된 긴급상담전화기 SOS생명의전화도 한국생명의전화에서 운영한다. 의사가 육체의 불씨가 되살아나게끔 돕는 사람이라면, SOS생명의전화 상담사는 삶의 의지에 대한 불씨가 다시 타오르게 돕는 사람이다. SOS생명의전화 상담사들은 한강 교량을 찾았다가 용기 내 수화기를 든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상담을 통해 일상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SOS생명의전화 상담사로 봉사활동하고 있는 최장숙 회원의 두 평 남짓한 상담실 벽도 위기대응 수칙과 지원기관 관련 자료 등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교사 퇴직 후인 2009년부터 상담을 해왔으니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하지만 연차가 오래되었다고 해서 긴장을 늦출 순 없다. 전화벨이 울리면 여전히 심장이 쿵쾅거린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전화를 받은 그는 먼저 “고맙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인다. 상담을 하는 사람이지만 그가 가장 잘해야 하는 일은 ‘듣는 것’이다. 내담자(상담받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안에 살아야 할 이유가 단서처럼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할 일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 끄집어내주는 일이다. 살아갈 이유는 밖이 아닌 내담자 자기 자신 안에 있다.
“우리 주변에는 극심한 우울감과 절망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중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고요. 다행인 것은 우리에게 전화를 하는 사람에게는 조금이나마 삶의 의지가 남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내담자에게 ‘전화해줘서 고맙다’고 해요. 달리 말하면 살아갈 의지를 꺾지 않아 고맙다는 뜻이에요. 전화해준 덕분에 살아갈 이유를 우리가 함께 찾을 수 있게 됐고요.”
1967년 처음 교단에 선 최장숙 회원은 2009년 서울 서교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42년간의 교직생활을 정리했다. 교장으로 근무할 당시 그는 학교 현관을 갤러리로 꾸미고, 교내에 북카페를 만듦으로써 학생들의 올바른 정서 함양을 도왔다.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비가 그치기만 기다리는 학생에게 우산을 빌려주고, “넌 세상의 희망이다”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해주는 등의 모든 일은 학생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비롯됐다. 재직 중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상담교육 석사 학위를 받으며 상담사로서의 역량도 키웠다. 그리고 퇴직 전 직원을 통해 우연히 생명의전화에 대해 알게 된 그는 1년 간의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생명의전화 상담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교사라는 직업은 처음부터 엄청난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교사가 되고 학생들과 생활해보니 ‘이것이 내 운명이고 천직이구나’ 여겨졌죠. 상담사도 마찬가지예요. 상담사가 되고 보니 이것도 하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최장숙 회원은 현재 오후 6시부터 밤 9시까지 SOS생명의전화 야간 상담을 맡고 있다. 생명의전화 상담 외에도 재소자를 대상으로 교정 상담을 하고,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상담 교육도 진행한다. 주말과 공휴일도 당번인 날엔 상담실에 나온다. 상담만으로 밤을 꼴딱 새우는 날도 있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후에도 지구대에 전화해 내담자의 상태를 묻고 “내담자가 아직까지 밥을 못 먹었다고 해요. 꼭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등의 당부를 덧붙인다.
상담 후에는 어떻게 상담했고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 정리하고, 상담사끼리 모여 재교육을 한다. 평소에도 상담사로서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내담자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는 일부터 상담 방법까지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수화기를 드는 그 순간부터 그는 내담자의 어머니가 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자녀에게 베푸는 마음처럼 그의 활동은 어떠한 댓가를 바라지 않는 무료 봉사다.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기 위해 체력 관리도 열심히 한다. 그는 지인들과 평소 운동을 통해 체력을 다지고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면서 마음의 양식도 채운다.
교사에서 상담사로, 가보지 않았던 길 위를 걷는 것이 처음엔 쉽지 않았다. 자살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의 발걸음을 돌려야 한다는 중압감이 그를 짓눌렀고, 가슴 먹먹한 사연을 듣다 보면 슬픔이 옮아오기도 했다. 그럴 때는 더욱더 중심을 잡으려 했다. 내가 두 발에 힘을 주고 서있어야 내게 전화하는 사람도 마음을 기댈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상담사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지탱할 줄 알아야 해요. 교사가 행복해야 학생이 행복하듯, 이 일도 나의 심신이 먼저 안정되어야 상대를 안정시킬 수 있어요. ‘당신은 신이 주신 선물이에요’,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주세요’ 내담자에게 말하다 보면, 어느새 저도 마음을 추스르게 돼요. 물론 상대의 기분을 무조건 맞춰주는 것이 최선은 아니에요. 쓴소리를 해야 할 때도 있어요. ‘나약해져서는 안 된다’, ‘살아 숨 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해야 한다’고 내담자에게 강하게 이야기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당장의 위기를 벗어나는 것만큼 앞으로 살아갈 용기를 주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최장숙 회원은 내담자에게 지금의 위기를 이겨내고 꿈을 이뤘을 때의 모습을 그려준다. 부모로서, 또 교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상담 후 생명의전화를 통해 “상담사 선생님께 저 잘 있다고 전해주세요”, “선생님 말씀처럼 원하는 대학에 가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라며 안부를 전해오는 사람들도 있다. 내담자의 “덕분에 잘 살고 있다”라는 말은 최장숙 회원에게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라는 말처럼 들린다.
상담사로 일하며 또 좋은 점은 존경할만한 사람들과 늘 함께한다는 것이다. 30대에 상담을 시작해 70세가 넘어서까지 40년 넘게 봉사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좋은 자극이 된다. 최장숙 회원은 “이제 11년 차인 저는 아직 멀었다”라며 웃는다.
“상담사로 일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제가 점점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거예요. 퇴직 후 할 수 있는 일은 많지만, 자긍심을 얻을 수 있는 일만큼 좋은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퇴직 교사들이 희망을 전하는 이 일을 함께하면 좋겠어요.”
최장숙 회원은 매일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며 선한 영향력을 널리 펼치고, 전문성을 키우며 매일 성장한다. 상담에는 정년이 없으니 앞으로도 그는 계속 성장할 것이다.
“70세가 넘은 제게도 이렇게 가능성이 열려있는데, 여러분은 왜 살기를 주저하세요? 살아 성장하세요. 그리고 힘들 때는 저희에게 전화해 주세요. 항상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