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홍균은 음력 1881년 8월 20일 함경남도 북청군 신북청면 동상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한의업을 가업으로 이어왔고, 그도 마찬가지로 한의사로 성장했다. 당시 일본은 한의학을 민족정신의 일부로 보고 민족말살정책을 통해 없애고자 했지만, 이 계보는 끊기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독립정신뿐만 아니라 한의학 역시 그가 후세에 전하고자 한 유산이라 볼 수 있다.
1911년, 30세의 신홍균은 갑작스레 가족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압록강을 건넜다. 그가 도착한 곳은 중국 봉천성이었다. 그가 어떤 이유로 만주로 향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독립에 대한 염원이 간절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그러던 1916년 여름, 김중건(원종교 창시자이자 독립운동가)이 자신의 부하 6~7명을 이끌고 신홍균을 찾아왔다. 1914년 봄에 북간도로 망명한 김중건은 독립운동 단체인 ‘대진단’을 조직하기 전 민족종교인 원종교를 만들어 한인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독립운동가 김중건과의 만남은 한의사 신홍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민족종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김중건의 큰 뜻에 감명받은 신홍균은 남은 삶을 그와 함께하기로 했다.
1920년 5월 김중건은 신홍균과 함께 독립군 대진단을 창설했다. 당시는 일본이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북간도지역 63개 한인마을의 민간인 2,200여 명을 살해하고 2,500여 채를 불태운 경신참변을 자행하던 시기였다. 이때 원종교 역시 타격을 입었다. 원종 총사 집무실이 불타고 김중건도 일본군에 체포됐다. 대진단 본부가 와해될 위기에 처했으나 당시 인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군 부대와 연합해 무장투쟁을 이어나갔다.
이 어려운 시기에 원종교를 재건한 인물들이 바로 신홍균, 김준, 김전 등이다. 이들은 일본군의 감시를 벗어나 탈출에 성공한 김중건과 함께 1921년 원종 교도들을 이끌고 지방 법회를 조직한 뒤 원종 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김중건은 대한국민단(1921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의 간도 지방 지단장으로도 활동하면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는데, 이 행적을 알아챈 일본군의 급습을 받게 된다. 이 사건으로 김중건을 포함한 동지 10여 명이 다시 검거됐고, 3년간 중국 재류금지 명령을 받아 고향으로 강제 추방당했다.
이때 김중건의 빈자리를 신홍균이 채워 단장이 사라진 대진단을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독립운동가 양성에도 힘썼다. 이러한 노력 중에 3년만에 국외로 추방됐던 김중건이 돌아와 「새바람」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순회강연과 연극 활동을 통한 계몽운동을 전개하며 원종교와 대진단 세력을 키워나갔다.
원종교와 대진단은 한인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지역 내 한인 사회를 결집시키는 역할을 했다. 특히 이들은 토착 도적 세력들로부터 지역 마을 사람들을 지켜냈다. 당시 도움을 받은 마을 사람들이 이들의 업적을 기록한 자료들이 훗날 발견됐을 만큼 김종근과 더불어 신홍균이 받았던 신임은 매우 두터웠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급기야 1932년 3월 만주국과 만주군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이는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단체들이 중국 민중들과 함께 본격적인 한·중연합 작전을 벌이게 되는 계기가 됐다.
만주사변 이후에도 신홍균은 김중건과 함께 원종교와 대진단을 이끌며 독립운동을 지속해나갔다. 그러던 1933년 3월 초 한국독립군의 장군인 지청천으로부터 김중건에게 연합 제의가 들어왔다. 당시 한국독립군은 동만주 소련 국경지대에서 중국 항일의용군인 길림구국군과 연합해 1933년 2월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고 동경성을 점령한 상태였다. 김중건은 이 제의를 받아들여 비축했던 물자와 제1진 정예병 50여 명을 파견했다. 여기에 신홍균도 속해 있었다. 그러나 김중건은 지청천과의 합류를 준비하던 중 조선공산군의 습격으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이 사건은 신홍균의 가슴 속에 평생의 한으로 남게 된다. 김중건을 지키지 못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낀 것이다.
신홍균은 1933년 3월 김중건의 마지막 지시에 따라 부하들을 이끌고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에 합류했고, 이로 인해 한국독립군은 그 규모나 군사력이 크게 향상됐다. 독립군에 합류한 신홍균은 ‘한의사’라는 본업을 살려 군의관을 맡았고, 그의 능력을 이용해 대전자령 전투(1933년 지청천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이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여 대전자령을 지나는 일본군을 격파한 전투로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와 함께 ‘독립군 3대 대첩’으로 불림)에서 크게 활약할 수 있었다.
1933년 6월 일본군 공격을 위해 대전자령에서 매복하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위기에 빠졌던 한·중연합군은 신홍균의 기지로 극적인 재정비에 나설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일본군의 철수가 지체됐고, 독립군을 비롯한 한·중연합군은 잠복한 장소에서 어쩔 수 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데 식량이 모두 떨어진 상황에서 장병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렸다. 이때 신홍균이 숲속에서 검은 버섯(목이버섯)을 잔뜩 따서 장병들에게 분배했다.
한의사로서 약재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던 신홍균은 식량으로 쓸 수 있는 식재료를 발견한 것이다. 이를 본 지청천은 모든 부대에 지시하여 장병들에게 버섯을 먹게 했고, 굶주림을 해결한 한·중연합군은 기운을 회복하여 이틀 뒤 대전자령을 지나던 일본군을 공격해 큰 승리를 맞았다. 신홍균은 독립군들의 부상을 치료하고 건강을 돌보는 것을 지속했고 대전자령 전투 이후로도 병사들을 끌고 산림지대를 이동해가며 항일 운동을 펼쳤다.
한편, 중국 길림구국군 사령관 오의성은 한국독립군에게 무기의 절반 이상을 넘기라는 요구를 몇 차례나 강요해왔는데 지청천은 이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를 빌미로 오의성은 330여 명의 한국독립군을 강제 무장해제시키고, 상당수의 장교와 사병들을 구금했다. 지청천 역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신홍균은 다행히 구금되지 않아 남은 병사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했고, 이때 선전대(한국독립군의 활약상을 알리기 위해 단원 8~10명으로 조직된 팀)와 계몽강연을 나갔던 한국독립군 참모 조경한이 돌아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조경한도 매우 당황했지만, 오의성을 찾아가 설득함으로써 한국독립군은 대다수 풀려났으나 지청천만은 풀어주지 않았다. 이때 신홍균이 불쑥 나서며 한국독립군과 길림구국군 사이에서 다음과 같이 일장 연설을 했다.
“내 나이 50이 되도록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처자를 버리고 만주에 와서 돌아다니다가 김소래(김중건) 선생을 만나 지도를 받았는데 그분은 불행히 공산도배에게 학살됐다. 그분의 평일 유명에 의해 지청천 장군의 휘하에 들어와 장군을 유일한 지주로 앙모하고 섬겨 왔는데 또 장군을 잃게 됐으니 내 살아 무엇하랴? 이로써 목숨을 끊겠노라.”
실제로 신홍균은 자결을 시도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목숨을 건 그의 연설을 듣고, 지청천과 신홍균의 활약상이 컸던 대전자령 전투에서 승리한 시점에 전리품을 더 갖기 위해서 지청천을 감금하고, 신홍균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건 옳지 않다는 내부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길림구국군은 결국 지청천을 풀어주었다.
만약 신홍균이 아니었다면 지청천은 필시 사망했을 것이고, 1940년대 임시정부계열 인사들과 함께 광복군을 설립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후 신홍균은 목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독립운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
신홍균이 걸어온 항일의 길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월남유서(신홍균의 조카 신현표가 이북에서 내려오면서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기록한 자신과 가족의 일대기)에 따르면, 1919년 가을 일본 헌병들이 신홍균의 독립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그의 동생인 신동균을 살해해 압록강에 수장했다는 가슴 아픈 가족사가 나온다.
그 뒤 1년 6개월여가 지난 1921년 1월 신홍균은 동생의 복수에 나섰고, 이러한 비통한 감정은 일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신홍균의 유지를 받든 이들 중에는 비슷한 시기 독립운동가·한의사로서 활동한 조카 신현표와 종손인 신준식 자생의료재단 명예이사장과 신민식 자생의료재단 병원장도 포함됐다. 현재까지도 신준식 명예이사장은 ‘의술(醫術)이 아닌 인술(仁術)’이라는 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의 신념을 자생한방병원 설립 가치의 근간으로 삼아 한의사 독립운동가문 후손의 의무를 다하는 데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