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The–K 인터뷰 1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최재천 석좌교수
동물의 세계에서 인간을 보다

평생 동물행동을 연구해온 최재천 교수에게 인간사회의 갈등이나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구하는 이들이 많다. 끊임없이 생존투쟁을 해야 하는 인간의 굴레를 동물세계에서 더욱 자세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진화의 끝에 다다른 듯 보였던 인간사회는 여전히 불투명한 미래 앞에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더욱 그에게서 해답을 찾고 싶다.
  • 글. 정라희
  • 사진. 한제훈

전 세계가 인정하는 동물행동학자

지난 봄, 전 세계 동물행동학자 530여 명이 저자로 참여한 <동물행동학 백과사전> 개정판이 출간됐다. 모두 네 권으로 제작된 이 백과사전에는 인지·진화·학습·번식 등 15개 주제의 동물행동학 최신 연구 성과가 담겨 있다. 그 과정에서 최재천 교수가 총괄편집장을 맡아 전체 집필을 주도했다. 2010년 초판 제작 당시에도 그는 편집장으로 참여했다. 17명의 편집장 중 유일한 유색인종. 단순히 인종차별의 문제는 아니었다.
동물행동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선진국에서나 해오던 학문이었기에 생긴 일이다. 초판 총괄편집장이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후임으로 최재천 교수를 추천했다.
경제적인 보상이 크지 않은 일에 많은 수의 학자를 필자로 섭외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복잡한 이해관계를 순조롭게 풀어가는 통솔력을 발휘하며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완수했다. 국제학계에서 당당하게 그의 능력과 입지를 증명한 셈이다. 동물행동학에 관심 있는 학생과 대중에게도 이번 개정판은 의미가 있다. 기존 백과사전 형식처럼 책으로 만들어진 것은 물론 온라인에서도 볼 수 있도록 제작한 것이다.
“이 책의 초판은 2010년에 나왔습니다. 그때는 책으로만 만들고 끝났는데, 이번에는 시작부터 ‘온라인과 오프라인 두 가지를 모두 만든다’고 하더군요. 사실 요즘 시대에 백과사전은 좀 고리타분하잖아요. 그런데 지난 10년간 다양한 분야에서 백과사전이 꾸준히 만들어졌습니다. 이번 작업을 해보니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데 책을 만드는 것보다 효율적인 일이 없더군요.”
최근에는 그 유명한 찰스 다윈의 역작 <종의 기원> 출간에 관여했다. 진화학자인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장대익 교수가 번역하고 최재천 교수가 감수를 맡았다. 다윈 시대에 유행했던 긴 호흡의 문장을 적절하게 끊어 번역했다. 덕분에 어렵게만 여겨지던 다윈의 사상과 이론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번에 번역하면서 기존에 ‘생존경쟁’이라고 소개된 부분을 ‘생존투쟁’으로 바꿨습니다. 이 세상에 짝이 없는 생물은 없어요. 모두 손잡고 사는데 네트워킹을 미처 하지 못한 개체가 탈락하는 거죠.”
돕는다는 것은 일방적인 자선사업이 아닌 동맹체제를 구축하는 것. 동물행동을 오래 연구해온 그가 숙고해 내린 결론은 ‘경쟁적 협력’이다. 한쪽이 이기고 지는 관계가 아니라, 도태되지 않고 이기기 위해서 손을 잡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많은 분과
제가 결정적으로 생각이 다른 지점은 ‘인공지능은 진화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만든 틀 안에서 정해졌지만, 생물은 누가 누구를 만나서 어떤 자식을
낳느냐에 따라서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조합이 매번 만들어집니다.
개미에게서 발견한 ‘함께’의 힘

경쟁적 협력의 개념은 그의 교육 방식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평생 대학교수로 살아온 그는 조교수 시절 이후 한 번도 시험을 낸 적이 없다. 어떤 교수는 ‘시험 없이 어떻게 성적을 나누느냐’고 묻는다. 성적에 민감한 요즘 세대에게 적용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돌아온다. 최재천 교수는 시험 없이 성적을 내지만, 이제껏 단 한 번도 학생들로부터 항의를 받지 않았다. 지금도 봄 학기면 그의 강좌가 개설된다. 일찍이 마음먹지 않으면 수강하기 어려운 인기 과목이다.
“대학의 문을 나가는 순간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해야 하는데, 시험에 익숙한 교육을 받고 나면 사회에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요. 제 수업에서 학점의 절반은 팀 활동에 할당됩니다. 팀워크가 안 이뤄지면 그 팀 안에서 A를 받기는 어려운 구도이죠. 자신이 A를 받고 싶으면 팀에 기여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도 더 좋은 성적을 받고 싶다면 따로 공부해야죠. 첫 시간에 이 이야기를 하면서 제 수업에서 인생 경험을 해보라고 합니다.”
원하는 성과를 얻기 위한 동맹체제, 팀 활동은 경쟁적 협력이 핵심이다. 최재천 교수가 경쟁적 협력의 개념을 찾은 배경에는 ‘개미’가 있다. 과거 ‘아즈텍 개미’를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국제학계의 주목을 받은 그는 평생 개미를 연구해 ‘개미 박사’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그가 인간과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생물은 침팬지 같은 영장류가 아닌 개미다.
“침팬지를 수십 년 관찰해봐도 대통령을 선발하거나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거나 하는 일이 없어요.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노예를 부리지도 않고,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기르지도 않죠. 인간은 하고 침팬지는 하지 않는 이 모든 일을 개미는 합니다. 인간과 개미 양쪽이 누구의 답을 베꼈는지 헷갈릴 정도로 매우 많은 점이 비슷하지요.”
아즈텍 개미 중 몇 종은 땅굴이 아닌 나무 안에 산다. 나무의 마디 하나하나마다 새로운 개미 왕국이 만들어지는데, 먼저 왕국을 세운 개미 집단에 정복당하지 않으려고 후속 개미 왕국들이 동맹을 맺는다. 끝까지 살아남으려면 함께 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아즈텍 개미를 연구하면서 빨간 개미와 까만 개미가 같이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종이 다른 데도 여왕개미들이 우선 살림을 합하고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힘을 모은 거죠. 생물학계에서 종이 다른데 함께 자식을 키운 최초이자 아직은 유일한 사례입니다.”

다양성이 곧 생존의 길

4차 산업혁명이 대두되고 인간의 고유성이라 여겨졌던 지능의 영역까지도 기술이 대체할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이 도태되는 것은 아니냐는 디스토피아적 전망도 이따금 나온다. 그러나 진화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공지능은 인간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물론 미래를 누구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서다.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많은 분과 제가 결정적으로 생각이 다른 지점은 ‘인공지능은 진화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만든 틀 안에서 정해졌지만, 생물은 누가 누구를 만나서 어떤 자식을 낳느냐에 따라서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조합이 매번 만들어집니다. 많은 경우 그 조합이 대단하지 않지만, 개중에는 매우 기막힌 조합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또 엄청난 세력이 등장하죠.”
다윈의 주요 이론의 두 갈래는 ‘자연 선택’과 ‘성 선택’이다. 다윈의 성 선택 관점에 입각하면 지구상에 무성생식을 하는 생물도 많다. 특히 번식에는 무성생식이 유리하다. 그런데도 절반의 에너지를 낭비해 양성생식을 하는 생물이 세상을 지배하는 역설은 ‘다양성’ 때문이다. 갑자기 환경이 변하면 무성생식을 하는 생물들은 다양성이 부족해 한 번에 몰살된다. 유성생식이 불리한데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가 여기 있다. 생물의 관점이 아닌 교육의 관점에서도 다양성은 필요하다. 요즘 그는 자신의 고향인 강원도에서 폐교 위기에 처한 초등학교를 살리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6개 초등학교가 신청해 그중 한 곳을 시범학교로 정해 일종의 생태학교를 운영할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만들고 싶은 바람도 크다. 은퇴를 몇 년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그는 현재진행형으로 지낸다. 학문을 넘어 사회를 변화시키는 깊이 있는 관점과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그가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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