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

임시정부의 파수꾼
‘차리석 선생’을 만나다

‘3·1 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를 맞아 독립유공자분들을 모시고 특별한 여행을 다녀왔다. 이들은 대다수 생계의 문제가 있는 기초생활수급자였다. 각자가 사관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여행길에 올랐고 종로 탑골공원을 시작으로 청와대, 효창공원을 거쳐 상해로 떠났다. 필자는 동암 차리석 선생의 아들인 차영조 선생과 함께하면서 차리석 선생에 대해 깊이 알게 되었다. 그는 임시정부가 가장 힘들 때, 20년간 임시정부를 지킨 파수꾼이었다. 201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2020년은 6·25가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숨겨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소개하여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고자 마련한 코너입니다.
  • 글. 정상규(<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의 저자)
*정상규 작가는 지난 6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 차리석 회갑 기념
  • 앞줄 왼쪽부터 조완구, 이동녕, 이시영
    뒷줄 송병조, 김구, 조성환, 차리석
젊은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1907년 차리석 선생은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대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젊은이들에게 민족교육을 가르쳤다. 그 후 안창호, 양기탁 선생이 주도하여 조직한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평양지역에서 활동했으며, 신민회의 ‘교육으로 나라를 구한다는 교육구국’, ‘독립군 기지 개척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군사기지 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배워나갔다. 당시 신민회는 이 두 가지 목표를 위해 다양한 방법을 준비, 계획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1911년 이상룡, 이시영 선생이 서간도로 건너가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여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차리석 선생은 안창호 선생의 영향을 참 많이 받았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안창호 선생의 철학은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을 계몽시키자는 것이었다. 그 젊은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안창호 선생의 교육철학을 실천하던 선생은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데라우치 총독 암살 시도 사건’에 연루되어 1911년 1월에 체포되어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 후 1919년 평양에서 3·1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한 선생은 무력투쟁의 뜻을 품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상하이에서 선생이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곳에서 선생은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기자로 주 3회씩 신문을 발행했는데 만주 지역 독립군들의 활동을 자세히 알리고 임시정부의 활동 및 진행 사항에 대해 동포들과 독립운동가들에게 전함으로써 독립의 꿈과 희망을 알려주는 언론인으로서의 역할을 시작했다. 또한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과의 연계를 취재 보도하여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세력들이 외롭지 않도록 독립의 열망을 북돋아 주었다.

기초생활수급자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상해 임시정부 답사 전, 청와대에서 함께한 단체사진
독립운동의 멈추지 않는 열정

1920년대가 지나면서 독립운동사에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대표적으로 만주 지역의 봉오동 전투, 대전자령 전투, 청산리 전투, 간도 참변, 자유시 참변 등이 이때 일어난다. 이 때문에 독립운동 단체들이 분산되고 임시정부가 필요 없다는 무용론이 제기되는 등 독립운동의 암흑기가 찾아온다. 이런 시기에 선생은 김구, 이시영, 조소앙, 이동휘, 조완구 선생 등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계의 단결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는 것을 신문을 통해 피력했다. 아래는 선생이 당시 지면을 통해 한 말이다.
“임시정부의 내일은 곧 군주제의 청산이며, 민주화의 새 출발을 기약함에 있습니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전진하고 대동단결합시다.”
선생은 글을 발표하는 것 외에도 안창호 선생이 조직한 흥사단에 가입하여 청년 인재 양성을 위한 노력에도 힘을 보탰다. 수시로 청년들을 모아놓고 강론회를 개최하여 여러 주제로 강연과 토론을 진행했으며, 우리의 뿌리와 역사를 교육했다. 흥사단에서 선생은 이사로 재직하며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활동했다.
1922~1931년은 임시정부의 침체기였음을 고려해보면 독립운동의 암흑기에도 선생의 독립운동을 향한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던 것 같다. 이봉창, 윤봉길 선생의 의거 후 일제의 독립운동 단체에 대한 감시는 절정을 이루었고 상하이 임시정부는 항저우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임시정부는 여러 번 옮겨가야 했는데 중국이 중일전쟁에서 불리하게 돌아가자 어쩔 수 없이 이동하게 되었다. 결국, 임시정부는 피난길을 전전긍긍하다 충칭으로 옮겨가게 되었으며, 이곳에서 임시정부 직할부대인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어 광복 전까지 군사작전을 전개하게 된다.

  •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 사진(1941.3. 중국 중경)
    제일 아랫줄 왼쪽부터 박찬익, 조완구, 김구, 이시영, 차리석
  • 흥사단 원동위원부 선언서(1940)
한국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어

이러한 과정에서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고 변절자와 밀정이 있었을 것이며, 서로 다른 단체들과의 연합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중국과의 외교, 임시정부 운용자금 확보 등 각자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한 숨은 영웅들이 있었다.
선생도 이렇게 임시정부를 지켜온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선생은 국무위원, 중앙감찰위원장을 겸직하며 광복군의 항일전투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고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인한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광복군은 서울 진공작전을 코앞에 두고 실행하지 못했다. 1945년 9월 9일, 차리석 선생은 광복을 맞은 후에도 조국 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임시정부 청사에서 한 많은 세상을 등지고 눈을 감았다. 그 뒤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 장군이 이동녕 선생의 유해와 함께 선생의 유해를 모셔다가 지금의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1948년 사회장을 치를 당시 이시영, 김구 선생은 차리석 선생에 대해 이렇게 말하며 이제는 떠나버린 그를 추모했다.
“차리석 선생은 해외혁명 운동가 가운데 특히 강력한 정신력을 소유하시기로 유명하시었다. 탁월한 사무 처리의 기능이나 병중에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맡으신 사명을 완수하신 강한 책임감은 한국 독립운동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년간 임시정부를 지킨 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
- 광복 직후 한 달 뒤, 1945년 9월 9일 서거.
-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1995년 9월의 독립운동가.
1945년 9월 12일 차리석 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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