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The–K 인터뷰 1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하는
‘法古創新(법고창신)’의 마음으로

건국대학교 사학과 신병주 교수 어제나 오늘이나 시간은 재깍재깍 흘러간다. 그러나 어떤 순간은 의미 있는 역사로 남아 후대에 전해진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시작하는 이 무렵,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격언을 떠올리며 사학자 신병주 교수를 만나 역사가 전해주는 교훈을 생각해본다.
  • 글. 정라희
  • 사진. 김도형

지금 이곳이 바로 역사의 현장

누군가는 역사를 과거 기록 속 문자로만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병주 교수에게 역사는 지금 우리가 발 디딘 ‘현장’이다. 오늘날 현대적인 대도시로 통하는 서울도 알고 보면 조선시대 역사를 켜켜이 품고 있는 거대한 유적지다. 역사를 익히 아는 사학자의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면 곳곳에서 흥미로운 옛이야기들이 책장을 펼친 듯 스쳐 간다.
“세종대왕이 학자들과 훈민정음을 창제했던 집현전은 지금의 경복궁 수정전 자리에 있었습니다. 집현전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던 신숙주가 잠들었을 때 세종대왕이 도포를 덮어준 이야기는 많이들 알고 계실 겁니다. 이런 일화를 떠올리며 그 주변을 둘러볼 때와 별생각 없이 볼 때의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학생들과 답사를 갈 때면 그 장소에서 역사적 배경을 떠올려보라고 당부합니다.”
우리나라는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역사적 의미를 지닌 장소가 무궁무진하게 많다. 위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도 그들이 거닐었던 역사의 현장은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더불어 기념해야 할 역사적 사건들도 해마다 돌아온다. 당장 2020년은 정조대왕 승하 100주년이다. 개혁정치의 산실인 규장각을 세우고 문화 중흥을 이끌었던 정조의 업적을 떠올리며 수원 화성을 찾는다면 분명 감회가 다를 터. 그렇게 역사는 지나간 듯 보여도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

역사의 대중화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지만,
그래도 그 역할을 사학자들이 맡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크다.
대중들은 학계를 ‘그들만의 리그’로 여기는데,
학계에서는 대중성을 추구하면 ‘세속적’이라 비판한다.
그러나 그는 역사를 어렵게 공부하기보다
좀 더 쉽게 공유하기를 기대한다.
역사 전문가들이 대중성을 키운다면, 역사 강연의
양과 질도 지금보다 한층 풍성해질 것이다.
역사를 더 흥미롭게

조선시대 전문가인 신병주 교수는 조선시대 역사를 지속해서 연구하는 동시에, 그 역사를 대중에게 좀 더 친숙한 표현으로 전해주는 가교이기도 하다. 「역사추리」, 「역사스페셜」, 「불멸의 이순신」 등을 비롯해 EBS 어린이 역사 드라마의 자문을 맡았으며, KBS 「역사저널 그날」과 KBS1라디오 「신병주의 역사여행」 같은 방송 프로그램의 진행자를 맡기도 했다.
“대중이 역사에 관심이 없다고 한탄하는 분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역사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대중서도 다양하게 출간되고 있고, 역사 현장 탐방 프로그램도 예전보다 많이 늘어났습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늘어나는데, 대중을 대상으로 역사를 흥미롭게 풀어낼 수 있는 전문가 수가 오히려 부족합니다. 그러다 보니 대중 강사들이 사학자가 할 일을 대신하고 있어요. 물론 저는 그분들의 역할도 있다고 봅니다. 제아무리 교수라고 해도 듣는 사람의 흥미를 끌지 못하면 소용이 없지요.”
역사의 대중화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지만, 그래도 그 역할을 사학자들이 맡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크다. 대중들은 학계를 ‘그들만의 리그’로 여기는데, 학계에서는 대중성을 추구하면 ‘세속적’이라 비판한다. 그러나 그는 역사를 어렵게 공부하기보다 좀 더 쉽게 공유하기를 기대한다. 역사 전문가들이 대중성을 키운다면, 역사 강연의 양과 질도 지금보다 한층 풍성해질 것이다. 실제로 신병주 교수는 오랜 기간 언론매체에 역사 칼럼을 연재하며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표현으로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풀어냈다. 시대순으로 역사적 사건을 줄줄이 늘어놓는 교과서식 정리에서 벗어나 ‘왕’이나 ‘참모’ 같은 키워드 중심으로 서술한 칼럼은 읽기도 쉽고 기억에도 오래 남았다. 꾸준히 정리한 칼럼을 엮어 2019년에는 왕을 도와 조선을 이끌어간 참모를 중심으로 「참모로 산다는 것」을, 2018년에는 500년 조선사를 통해 현재를 되새겨보는 「조선 산책」을, 2017년에는 조선시대 리더십에서 국가경영을 찾는 「왕으로 산다는 것」을 내기도 했다.

왕의 리더십에서 얻은 교훈

그의 책 「왕으로 산다는 것」은 조선시대 왕의 리더십을 살필 수 있는 책이다. 태조부터 순종에 이르는 조선의 27대 왕 대다수를 조명했다. 왕과 다른 시대를 사는 개인에게도 여러 왕이 보여준 리더십은 좋은 본보기가 된다. 신병주 교수는 이 책의 서문에서 “조선의 왕들이 보여준 긍정적, 부정적 리더십을 반면교사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일반적으로 ‘왕권’이라고 하면 ‘절대적’이라는 수식어가 함께 떠오른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절대 왕권이 강하지 않았고, 오히려 언론 3사가 활발하게 활동하며 왕권을 견제했다. 왕이라면 소통과 포용의 덕목을 갖추어야 했다.
“교사의 리더십을 이야기할 때도 충분히 왕의 리더십에서 참고할 것이 많습니다. 학생과 소통하고 학생을 포용하는 것도 교사의 리더십에 해당하니까요. 한 학교를 관리하는 교장이나 교감 선생님들에게도 조선시대의 리더십이 참고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쓴소리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500년 이상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신하들이 왕의 독재를 방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경연을 통해 왕과 신하가 함께 국가 경영을 연구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했지요. 그런 활동을 잘한 왕일수록 후대에 성군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시대를 초월해 모범으로 삼을 만한 군주가 있다면 아무래도 세종과 정조다. 옛 시절의 리더십이지만 이 시대에 그대로 가져와도 어긋나는 부분이 거의 없다. 성종과 숙종도 뒤를 이어 꼽을 만한 리더였다.
“당시 왕들은 소통과 포용력 외에도 도덕성과 청렴성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키워드는 정치권은 물론 교육 현장에도 적용할 수 있어요. 흔히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하는데, 역사 속에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내용이 참 많습니다. 좋은 것은 잘 계승하고, 부정적인 것은 가능하면 차단해야지요. 그것이 바로 역사가 지닌 힘이자, 교훈 아니겠습니까.”
2020년 경자년이 시작된 지금, 그가 되새기는 한 마디 역시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다. 과거를 낡은 것이라 치부하며 새로운 것을 탐닉하기 좋은 이 시대. 그러나 우리가 본으로 삼아야 할 옛것은 분명히 있다. 그 지혜를 찾기 위해 올해는 마음먹고 역사서를 펼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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