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The–K 인터뷰 1

틀 안의 공부를 벗어나
틀 밖에서 창의력을 펼쳐라

미국 윌리엄메리대학교 교육심리학과 김경희 교수 강렬한 붉은 원피스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흔히 접하던 대학교수의 옷차림과는 사뭇 다르다. ‘대학교수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의 틀 안에서 그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답답한 교육 현실을 벗어나 미국으로 건너간 그가 집중한 분야는 ‘창의력’이다. 그렇다면 창의력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그 실마리를 창의력 교육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김경희 교수에게서 들어보았다.
  • 글. 정라희
  • 사진. 김도형

다른 것을 싫어하는 사회에서 다르게 살기

약 15년 전부터 공식 석상에서 빨간 옷을 입기 시작했다는 김경희 교수의 별명은 ‘닥터 레드(Doctor Red)’다. 누군가는 ‘너무 튄다’라며 고개를 옆으로 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성이 묻어나는 차림새는 그를 어디서든 한 번에 알아보게 하고, 이후에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과 기준에 자신을 맞추느라 주눅 들었다면, 지금의 그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대학원 수업을 들을 때 ‘교수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가 지적을 받은 일이 있어요. 미국에서는 그때부터 토론이 시작되는데, 한국에서는 ‘너는 왜 그래’라고 하는 거죠. 정해진 틀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무조건 지적을 받았어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을 일상적으로 겪었던 시절. 한국에서 10년간 교사 생활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학생을 위한 교사’와 ‘승진하는 교사’의 진로는 확연히 달랐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색다른 교수법을 도입하면 학교에서는 ‘일을 키운다’라며 근무 평가를 박하게 했다. 새로운 교육적 시도를 장려하지 않고 도로 죽이는 환경이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해도 여전히 넘어야 할 벽은 높다. 우수한 인재들이 교사로 임용되고 있지만, 정해진 수업과 과중한 행정 업무를 소화하느라 연구할 시간이 부족하다. 학교를 넘어 전반적인 교육 환경을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말만 할 뿐, 막상 한국의 교육은 창의력과는 거리가 멀다. 좋은 대학에 가려고 정해진 코스대로 ‘열심히’ 하고,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남과 협력하기보다 ‘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현실에서 창의력이 자라기는 힘들다.
“옛날에는 무조건 외우는 방식이 통했을지 몰라도 이제는 아닙니다. 과거에 세계를 호령했던 기업 중에 지금도 선두를 달리는 기업이 많지 않죠. 과연 그들이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요? 지금은 열심히 하기보다 다르게 해야 합니다.”

“누구든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전문성이 있으면
이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비판력과 융합력이 더해져
창의력으로 이어지죠.”
다른 점을 발견하고 새로움을 더하라

김경희 교수는 창의력 교육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미국 영재아동교육연합(National Association for Gifted Children)의 창의력회 회장을 역임했고, 2018년에는 세계 창의력 교육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토런스상’을 외국인 최초로 받았다. 그가 미디어에서 주목받은 계기는 2010년에 ‘미국의 창의성 위기’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부터다. 미국 아동과 성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약 30만 건의 창의력 검사 분석 결과, “미국의 IQ는 꾸준히 오르고 있지만 창의력은 1998년 이후 급격하게 하락하고 있다”는 내용의 연구였다. 이 연구 결과는 당시 미국 사회에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에서는 10년에 한 번씩 IQ와 관련한 표준화 작업을 합니다. 이전까지는 ‘IQ가 올라가면 창의력도 올라간다’고 생각했는데, 연구해보니 그렇지 않은 거예요. 노벨상 수상자들의 이력을 살펴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IQ가 높은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노벨상 수상자나 세상을 바꾼 혁신가의 공통점은 높은 지능이 아니라 뛰어난 창의력에 있어요.”
창의력을 강조한다고 해서 노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창의력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으로 오해하지만, 김경희 교수는 “기존의 지식과 기술을 활용해서 가치 있고 색다른 것을 만드는 힘이 창의력”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가치’는 곧 ‘전문성’이다. 전문성을 갖추려면 최소한 10년은 기존의 것을 배우고 익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면 남들이 쉽게 볼 수 없는 다른 지점을 발견하고 새로움을 더할 수 있다.

창의 영재를 키우는 부모의 힘

모든 아이는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자라면서 부모나 학교, 사회에서 정한 틀 때문에 잠재력을 잃어버린다. 30년간 창의력 교육 연구를 해온 김경희 교수는 아이들이 지닌 잠재력을 창의력으로 싹 틔우는 네 가지 요소로 ‘4S’를 꼽았다. 그가 직접 정리한 4S는 ‘밝은 햇살(SUN)’, ‘거센 비바람(STORM)’, ‘다양한 토양(SOIL)’, ‘자유로운 공간(SPACE)’이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배움을 즐기고,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시도하는 회복탄력성을 키울 수 있으며, 다양한 문화를 접하며 견문이 넓어진다. 나아가 자신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 졸업자 중에서도 성공하는 사람의 비율은 10% 내외입니다. 학벌이 아니라 스스로 무언가 이룰 수 있는 것이 중요하죠. 아쉽게도 대다수 동양인은 ‘시키는 대로 잘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풍토에서 자라면 한국에 있든 미국에 있든 결과는 같아요. 그래서 부모가 달라져야 한다고 항상 말합니다.”
제도를 바꾸려면 기나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부모의 태도는 마음만 먹으면 바로 바꿀 수 있다. 그래서 김경희 교수는 “창의 영재를 키우는 이는 부모”라고 말한다. 아직은 가정에서 엄마가 주 양육자를 맡을 때가 대부분인 까닭에, 어쩔 수 없이 엄마의 역할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들과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의 아빠들은 아이들을 권위로 누를 때가 많았다. 대부분 ‘버릇이 나빠질까 봐’라는 이유를 대지만, 그는 “지나친 겸손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서로 존중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는 얼마든지 튀어도 괜찮다.
각자 개성 있게 살수록 협력은 더욱더 중요하다. 연구 결과, 상상력이 뛰어난 인재는 비판력이 약하고, 비판력이 강한 인재는 상상력이 약한 편이었다. 결국 창의력 교육의 목적은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바탕을 만드는 것이다. 어쩌면 ‘틀을 벗어나라’는 조언을 가장 깊게 새겨야 하는 이들은 어른들이 아닐까. 틀 밖에서 아이들의 미래를 보면 세상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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