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생각하기
[+55] 인생 2모작

인생 2막은
공짜로 산다

재능기부 강사 박용범 회원

위기가 길어질수록 우리는 단순하고 명료한 것에서 힘을 얻는다. ‘덕분에’라는 세 글자가 코로나 전선(戰線)에서 싸우는 의료진을, ‘사랑해요’라는 한 마디가 언택트 시대 새로운 환경에서 수업을 준비하는 교직원을 일어서게 하는 것처럼. 학생들에게 전산세무회계 분야 무료 인터넷 강의를 하는 박용범 강사를 움직이게 하는 것도 짧은 한마디 ‘고맙습니다’이다.
  • 글. 이성미
  • 사진. 김도형

선생님이 되기 위해 선생님을 그만두다

‘박쌤 전산회계’는 전산세무회계 자격증 취득을 위해 공부하는 수험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유명 인터넷 카페다. 카페 회원 수 17만 명, 일일 방문자 수 1만 명, 게시글 수는 16만 건이 훌쩍 넘는다. 이 카페의 주인장은 제주도에서 상업정보를 가르치던 교사 박용범. 그는 현재 이 카페를 중심으로 전산세무회계 자격증 취득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 인터넷 강의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1989년 제주중앙고등학교에 부임해서 25년간 학생들에게 상업정보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2013년 퇴직 후 경기도로 이전해 2014년부터 지금까지 전산세무회계 분야 재능기부 강사로 일하고 있죠. 부끄럽지만 이 분야에서는 나름 유명인이랍니다.”
교직 생활을 돌아보면 그가 떠올리는 풍경은 2000년 전후가서로 다르다. 컴퓨터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기만 해도 그는 행정보다는 수업과 학생 생활지도, 수업 개발 등을 주 업무로 하며 힘들지만 행복한 시기를 보냈다. 당시 그가 근무했던 제주중앙고등학교는 한라산에 인접해 있어서 학생들과 야영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전산 시스템이 발달하고, 교원의 성과를 나누는 기준이 생기고, 학교를 평가하는 기준이 취업률이 되면서 수업보다는 행정 업무에 치중해야 할 때가 많아졌다. 쏟아지는 행정 업무에 수업 준비는 엄두를 못 냈고, 학생들의 취업 준비로 육지와 바다를 오가며 몸과 마음은 지쳐갔다. 선생님의 지혜를 먹고 자라나는 학생들을 보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던 그였다. 몸이 축나는 것은 견딜 수 있지만, 학생들의 수업에 충실할 수 없다는 죄책감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결국, 교직 25년 차에 진로를 고민하게 되었다.
“퇴직 이야기를 꺼냈을 때 모두가 말렸어요. 안정된 직장이고, 10년 더 학교에 있으면 노후 연금도 더 많이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저도 경제적인 부분에서 두려움이 컸어요. 백세시대라는데 이렇다 할 노후 준비를 해 놓은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신 선생님들이 훨씬 많지만, 당시의 저는 선생님이 되기 위해 교단을 내려왔습니다.”

“전산세무, 전산회계는 국가가 정한공식적인 절차를 알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자격증이에요. 그러나 자격증을 따도
정작 회사에 들어가서 어떻게 실무를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원리를 알면 어디에나 대입할 수 있는데 그걸 못하는 거죠.
최대한 쉽고 실생활에 가깝게, 원리를 이해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쉽게 배우는 ‘박쌤의 전산회계’

퇴직하면서 그는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기보다는 그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일인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명예퇴직 직후 한 달은 인천금융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했다. 그리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전산세무회계 자격증을 취득하고 싶어도 엄두를 못 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학원비만 수십만 원이 들기 때문이다.
비로소 온전히 자신을 필요로 하는 학생들의 얼굴이 보였다. 결국 그는 무료로 온라인 강의를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학교에서는 신학기에 다시 수업을 맡아달라고 했지만, 거절하고 강의 준비에 매진했다.
“6개월간 도서관에 틀어박혀 교재를 집필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방송 장비와 편집 장비를 준비했어요. 그리고 이동식 칠판 하나를 두고 영상을 찍어 2014년 5월 처음 유튜브에 ‘거꾸로 보는 회계’ 강의를 올렸습니다.”
학생들을 위한 강의였기에 박용범 강사는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그러했던 것처럼 쉽고, 재미있게 회계 원리를 전달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물 하나를 사는 데에도 세무 원리가 숨겨져 있다며 최대한 실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예시를 들으려 했다. 단순히 공식을 외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금이 어떻게 발생하고 계산되는지 원리를 먼저 깨우치게 하고 싶었다. 허울뿐인 자격증이 아니라 회계와 세무를 다룰 줄 아는 진짜 자격을 얻게 하기 위해서다.
“전산세무, 전산회계는 국가가 정한 공식적인 절차를 알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자격증이에요. 그러나 자격증을 따도 정작 회사에 들어가서 어떻게 실무를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원리를 알면 어디에나 대입할 수 있는데 그걸 못하는 거죠. 최대한 쉽고 실생활에 가깝게, 원리를 이해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 2막을 살게 하는 한 마디, ‘고맙습니다’

유튜브와 네이버 카페에 올라온 무료 강의와 교재로 공부한 후 전산회계 시험에 합격했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고, 처음 서너 명에 불과하던 카페 회원은 2020년 7월 현재 17만 3천 명을 넘어섰다. 덕분에 강의를 계속 무료로 제공해도 교재를 판매하는 데에서 일정 부분 수익을 낼 수 있게 되었다. 강의를 듣는 사람들도 중·고등학생은 물론 대학생·취업준비생·경력단절 여성·탈북인 등 점차 다양해졌다. 쏟아지는 질문에 밤을 새우며 답을 해주면서도 그는 행복했다. 학생들의 ‘고맙습니다’ 한 마디 때문이었다.
실제로 카페에는 ‘돈 없는 대학생에게 박쌤의 강의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다’, ‘어려운 줄만 알았던 회계가 퍼즐 맞추는 것처럼 재밌어졌다’, ‘육아휴직 중에 박쌤 강의를 들으며 전산세무 2급에 도전하려 한다’, ‘회사에 다니다 50세가 넘어 권고사직됐다. 뭐라도 하려고 전산회계2급 시험에 도전했고 시험에 합격했다’, ‘북한에서 온 새터민으로 세금이 무엇인지도 몰랐는데, 박쌤 강의를 듣고 전산회계1급에 합격했다’, ‘상고에서 회계원리를 가르치는 교사다. 방과 후 수업을 담당하게 되어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있다’ 등 다양한 이야기기가 쏟아졌다. 그리고 ‘선생님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라는 한 마디가 더해진다.
더욱 좋은 것은 무료 강의 덕분에 시험에 합격하고 취업한 선배들이 멘토가 되어, 사회 초년생들이 카페에 남긴 고민에 대해 조언해준다는 것. 자신의 재능을 기부한 박용범 강사처럼 그의 랜선 제자들도 다시금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부의 대물림을 지켜보며 박용범 강사는 교육자로서 더없는 만족감을 느낀다. 오늘의 그를 계속 달리게 하는 첫 번째 원동력은 옳은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며, 두 번째 원동력은 질문하는 학생이며, 세 번째 원동력은 자신과 비슷한 길을 가는 제2, 제3의 박용범이다.
학생들에게 전산회계를 가르치지만, 정작 그는 오늘도 학생들을 위한 일에는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는다. 올해부터는 새로운 강사와 합심해 컴퓨터활용능력 시험에 대비할 수 있는 무료 강의를 제공할 예정이다. 오래전 그에게 학원비가 없어 애태우는 학생을 돕고 싶은 마음보다 큰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면, 오늘날의 박용범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트로피보다 빛나는 삶. 그것은 어제의 박용범이 오늘의 박용범에게 주는 상장이며, 17만 명의 랜선 제자들이 그에게 주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수업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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