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배보경 교수는 한국 IBM(미국의 대표적인 컴퓨터 제조회사)에서 근무했다. 당시 IBM은 글로벌 시장을 선도 하는 기업이었다. 회사의 명성이나 성장성보다도 배보경 교수 에게 자부심을 더해준 것은 다름 아닌 기업문화였다. 구성원 개개인을 존중하면서도 책임과 권한을 위임하는 기업문화 덕분에 ‘개인이 성장하려면 조직이 성장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휴직제도를 이용해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다양한 기업 사례 를 접했습니다. 이론서에 나오는 조직이론 대다수를 회사에서는 이미 실행에 옮기고 있었어요.”
회사의 일원으로 성장하고 싶은 마음도 컸으나, 그는 다른 진로를 택했다. 모교인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하기로 한 것. 회사에서 실적을 내는 일은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지만, 미래의 리더들에게 직업 설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은 자신이 더 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시간강사로 강의를 시작했으나, 자원해서 학생들의 상담을 맡았다. 강단에서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소명감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기업에서는 직원들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교육을 받게 한다. 자기계발의 습관이 이미 들어있던 그는 자비를 들여 해외 콘퍼런스까지 참석하면서 역량을 키웠다. 이러한 경험들이 쌓여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그렇게 KAIST 경영대학 EMBA 경영자과정 디렉터 교수를 거쳐 IGM 세계경영 연구원의 원장을 역임했다. 배보경 교수는 KAIST의 경영자과정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파이낸셜 타임스」 Wxecutive Education 경영자과정 랭킹에 진입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배보경 교수가 세 명의 저자와 함께 공동 저술한 「4차 산업혁명 시대, 어떻게 일할 것인가」는 IGM 세계경영연구원에 재직할 때 쓴 책이다. 4차 산업혁명이 이슈화하면서 혼란에 빠진 이들이 참고할 수 있는 생각 혁신 전략을 담았다.
“4차 산업혁명이 전 세계적인 화두가 되면서 ‘우리가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했어요. 세상이 바뀌는데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일한다면 기업의 생존을 담보할 수 없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찾아보니 이미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2년 전, 책에서 다뤘던 ‘융합’과 ‘공유’의 메시지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 배경에는 디지털 역량이 있다. 디지털 역량이란 ‘디지털 기술을 통한 융합과 공유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그는 디지털 역량이 필요한 분야로 ‘고객 경험’, ‘운영 프로세스 혁신’, ‘비즈니스 모델 혁신’ 세 가지를 꼽았다. “예전에는 빨리 따라잡기만 하면 됐지만, 이제는 새로운 것 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입니다. 워낙 세상이 빠르게 변하니 완벽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내놓기도 어려워요. 제품이 출시되었을 때 고객이 기대하는 바가 완전히 바뀌어 있기도 하고요. 그러자면 여러 번의 작은 실험으로 테스트를 해보는 게 좋지요. 실패로부터 학습한 내용을 다시 제품과 서비스에 반영하는 겁니다. 결국 실패를 인정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지난 2019년 1월에 고려대학교에 부임한 배보경 교수는 EEC(Executive Edu Center)의 센터장을 맡아 최고경영자 과정을 정비하고 있다. 고려대학교는 배보경 교수가 석·박사 과정을 밟은 곳이다. 올해는 코로나19로 교육 프로그램에도 상당한 변화가 생겼다. 직접 만나 이루어지던 교육이 실시간 동영상 강의로 대체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저는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어서 화상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데 익숙해요. 특히 미국은 영토가 넓어 대면 회의보다 화상 회의를 선호하거든요.”
혹자는 온라인 교육이 임시방편이라고 여길지 모르나, 그의 생각은 다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은 있다. 아직 한국에서는 ‘온라인 교육’을 ‘비용이 저렴한 교육’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 이 대목에서 그는 “온라인은 저렴한 것이 아니라 유용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업 임원 중에는 온라인 수업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들도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웹캠(인터넷상에서 사용하거나 서비스되는 인터넷 캠코더)이 없어서 화면이 안 나오는 일도 있었어요. 하지만 웹캠이 되지 않는다고 회사에서 사용하는 컴퓨터를 쉽사리 바꿀 수도 없어서 혼선이 있기도 했죠.”
기업의 상황이 이런데 학생들이라고 해서 사정이 더 나을 리는 없다. 노트북이 없어 PC방에 가서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토로하는 학생도 있다. 사회적으로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려면 비용도 시간도 들게 마련이다. 아직은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 적지 않은 셈이다.
점차 기술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으나, 그래도 배보경 교수는 시대를 초월해 지켜야 할 기준은 역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부 강의를 할 때는 학생들이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자신을 돌아보는 글을 쓰게 한다.
“학부에서는 ‘조직행동론’을 가르치면서 다양한 학생을 만납니다. 가장 처음으로 내는 과제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글을 쓰는 겁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성향을 지녔는지는 물론 앞으로 5년, 10년 후에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도 생각해보게 해요. 그 과정에서 각자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도 돌아볼 수 있겠죠. 제대로 방향을 잡아주면 스스로 많은 것을 깨우칩니다.”
변화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감동하기도 한다. 덕분에 그도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가슴에 품었다. 세상이 달라져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