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전쟁의 기반을 마련한 열사
‘이석영 선생’
오직 나라를 위해 전 재산을 바치고, 가족까지 희생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석영 선생. 그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권세와 재산을 모두 포기하고,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서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적인 표본을 보여줬다. 일평생을 나라와 민족만을 위해 살며 대한민국의 독립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긴 이석영 선생의 숭고한 정신은 오래도록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글. 정상규(「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의 저자)
- 이석영(李石榮) 선생(1855. ~ 1934.2.16.)
- -독립운동가
- -1911년 경학사 설립, 독립군 사관학교 신흥강습소 개교
- -1919년 신흥무관학교 설립
-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이석영은 이항복의 10대손으로 185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1885년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섰다. 승지로서 고종을 보필하기도 했지만, 갑오개혁(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3차에 걸쳐 추진되었던 일련의 개혁운동) 이후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조선의 정치계는 국제 정세에 눈이 어두워 옛것만을 고집하는 ‘수구파’와 서양의 문물이 무조건 옳다는 ‘개화파’가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석영을 포함한 6형제는 민족의 앞날을 위해 힘을 쏟아야 한다는 마음을 품었다. 동생 우당 이회영이 국권수호운동에 나서자 이석영은 자신의 소유인 남산 쌍회정을 모임 장소로 제공하며 이회영의 활동을 지원했다.
한편, 이석영의 동생 이회영은 젊은 시절부터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꿈꾸던 혁명가였다. 이회영의 주위에는 헤이그 특사(고종이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국권 회복을 이루고자 네덜란드 헤이그에 파견한 특사, The-K 매거진 2020년 7월호 참고)로 알려진 이상설과 독립운동가 이동녕·여준 등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이 함께했다. 이들에게 이석영의 집인 남산 쌍회정은 집합처였고, 그곳에서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며 대책을 강구했다. 그리고 이석영은 그들에게 넉넉한 품을 제공했다. 이석영의 형제와 동지들이 해외 독립군기지 개척에 나선 것은 을사늑약(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직후였다. 동생 이회영과 이상설이 첫 후보지로 꼽은 곳은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북간도 용정이었다. 용정은 일찍부터 한인사회가 발달했으며, 러시아 연해주와 가깝고 국내와 왕래가 편한 지리적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헤이그로 향하던 이상설이 1년 간 용정에 머물며 세운 것이 서전서숙(瑞甸書塾)이었다. 북간도 최초의 민족교육기관이라 불리 는 서전서숙의 궁극적인 목표는 독립군기지 개척이었다. 그러나 1907년 4월 이상설이 제2차 만국평화회의(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창으로 세계 평화를 도모하고자 개최된 국제회의) 특사로 용정을 떠나고, 한국통감부 간도파출소의 탄압으로 서전서숙은 문을 닫았다. 이후 북간도에서는 서전서숙을 계승한 명동학교, 서동학교 등이 독립군 양성의 요람으로 발전해갔다.
일본의 간섭으로 점점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고, 헤이그 특사 이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당하자 1908년 가을, 동생 이회영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상설을 찾아가 독립군 기지 개척의 방도를 다시 논의했다. 이를 통해 독립군 기지 개척의 구도와 틀을 잡을 수 있었다. 급기야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최후를 맞이하자, 더는 독립군 기지 개척을 미룰 수가 없었다. 이석영의 재가를 받은 이회영은 독립군 기지를 물색하기 위해 서간도 답사에 나섰다. 남만주 일대를 시찰하고 터를 물색한 이회영은 일전에 답사하며 확인한 서간도에 국외 무관학교를 건립하자는 내용을 6형제를 불러 모아 논의했다. 특히 이회영은 이석영에게 남양주 땅을 처분하여 독립군기지 건설자금으로 쓰자고 제안했고, 이석영은 남양주 화도읍 가곡리의 모든 땅(전답 6,000석)과 재산을 처분했다. 결국 6형제와 일가족 60명은 1910년 12월 30일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떠났다. 워낙 대규모 인원의 망명이라 비밀리에 구성원을 일사불란하게 분산해 남대문, 용산, 장단 등에서 별도로 기차를 타고 출발했다. 가문 차원에서 이뤄진 이들의 집단 망명에는 이석영의 경제적 뒷받침이 압도적인 역할을 했다. 1911년 2월 이들은 목적지인 삼원보 추가가(鄒家街)에 도착했다. 그렇게 이석영 일가의 서간도 망명 생활이 시작됐다.
남양주시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6형제가 토지와 가옥을 매각해 마련한 돈 40만 원은 1969년 기준 약 600억 원, 2020년 기준 약 2조 원에 달하는 규모다. 당시 많은 권문세가가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친일파가 되던 때였기에 이들의 결정은 역사에 남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 되었다.
이석영 집안은 원래부터 부자라고 알려져 왔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석영이 부호였던 영의정 이유원(3종숙)의 양자로 들어가 그로부터 상속받은 돈이 많았을 뿐이었다. 이유원은 흥선대원군 시절 유명한 부호였고, 당시 조선에서 네 번째로 부자라는 기록이 황현의 「매천야록」에 나와 있다. 양부로부터 물려받은 큰 재산을 나라가 망하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전부 사용했는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엄청난 일을 실행한 이가 바로 이석영이었다.
중국 서간도 삼원보 추가가에 정착한 6형제는 제일 먼저 한인자치기구인 경학사(耕学社)를 조직하여 국내에서 모여든 청년들을 독립군으로 양성했다. 광복은 장기전이라는 생각에 군 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를 개소했고, 이것이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했다. 그러나 경학사 운영은 연이은 대흉년으로 재정난에 부딪히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신흥학교 설립에도 온갖 고초가 따랐다.
이들을 일본의 밀정으로 의심한 현지 중국인들의 경계가 심해 학교 부지를 구하는 일조차 만만치 않았다. 이들은 신변 보호를 위해 중국 국적을 취득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1911년 추가가 마을의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신흥학교 개교식을 가졌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군부대가 허름한 옥수수 창고였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이때 신흥학교의 공식 명칭은 신흥강습소였다. ‘신흥’이란 나라를 새롭게 일으킨다는 뜻을 지녔고, ‘강습소’라 명명한 것은 중국 당국의 감시와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신흥학교의 첫 학생은 40여 명 정도였다. 학생들은 학비를 내지 않았으며, 이석영을 비롯한 이회영, 이시영 형제의 집에 독립군 청년들이 함께 머물며 심신을 단련했다.
이석영은 1912년 신흥강습소 위치를 추가가에서 합니하(哈泥河)로 이전하고, 1913년 신흥중학교로 개칭한 뒤 중등(간부)과정을 신설했는데 이때 교장을 맡아 학교 경영 전면에 나섰다. 남 앞에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성품이지만, 이석영의 공이 워낙 지대했으므로 주변의 권유를 물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독립운동에서 직함을 가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919년 신흥중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한 후 1920년 폐교 때까지 10여 년간 3,500명 이상의 독립군을 배출했고, 이들은 일제와 전투를 벌인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학교는 산속에 있었는데 열여덟 개의 교실이 산허리를 따라서 줄지어 있었다. 게릴라 전술과 한국의 지형을 깊이 공부했고,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 중요시되었다. 훈련은 힘들었지만 즐거웠고 봄이면 산이 대단히 아름다웠다.(중략)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으며 기대로 눈이 빛났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못 할쏘냐." -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독립운동가 김산의 수기
하지만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자 천문학적인 돈을 기부해 독립군을 양성한 이석영은 톈진, 베이징, 상하이 등을 떠돌며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중 콩비지로만 연명하다 상하이 빈민가 객창에서 영양실조로 별세했다. 부인 박 씨도 조카 집에 얹혀살다가 2년 후에 사망했다. 이석영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이규준은 항일비밀운동단체 다물단(일제 주요 인사들과 일제의 회유로 변절한 밀정을 찾아내 암살하는 단체로, 1923년 조직됐다) 단장으로 활동하던 중 베이징에서 암살됐다. 작은아들 이규서는 행적이 불투명한 사람들과 어울렸는데 그 무리에는 일제의 월급을 받는 밀정이 있었고, 결국 이규서는 숙부 이회영의 계획을 일제에 밀고함으로써 이회영은 체포돼 대련(여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이로 인해 독립군 세력은 작은아들 이규서를 포함한 일제 밀정들을 처단했다.
1930년대 수많은 애국지사와 매국노들이 죽고 죽이는 독립혁명사의 일단면이었고, 그렇게 이석영 집안의 대가 끊겨버렸다.
독립전쟁의 토대 마련에 천문학적인 전 재산을 바쳐 헌신하고 생을 마감한 고인의 공훈을 기려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아직도 그의 유해는 찾지 못했다. 상하이 빈민가에서 별세 후 그의 유해를 홍저우 공동묘지에 임시 안장했는데 도시개발로 유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느 위대한 독립운동가는 잊혀져왔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이는 언제나 고독한 법이듯, 친일파와 매국노가 판치던 격변의 시기에 온갖 부와 영예를 떨치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이석영의 삶과 자취는 한국인의 정의와 양심이 무엇인가를 뚜렷이 보여준 역사의 길이자, 자랑스러운 독립투쟁사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