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을 고수하는 이들은 전환보다는 지지를 통해 ‘인내의 열매’를 얻으려고 하지만, 지금과 같이 무엇이 정답인지 확신할 수 없는 무한 경쟁 시대에는 빠른 전환이 모색될 수밖에 없다.
SK이노베이션은 원래 석유 중심 회사였다. 석유만이 이익 극대화 실현의 최고 재료라고 여기는 ‘원칙’을 고수했다면 지금 이 회사의 빛나는 성장은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매출과 이익은 늘었으나 기업 가치는 떨어지는 유기적 성장의 한계를 느낀 회사는 2011년 1월 SK에너지에서 SK이노베이션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전기차 배터리(2차 전지)로 업종도 바꿨다. 이렇게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 바뀌는 거역할 수 없는 세계적 추세에 맞춰 진화한 이 기업은 현재 주식 시장에서도 테크노 기업처럼 가장 ‘핫’한 종목으로 연일 달아오른다.
피보팅은 농구 경기에서 선수가 공을 든 채 한쪽 발은 바닥에 붙이고 이를 중심축으로 해서 다른 발을 여러 방향으로 옮기면서 전진하는 모습을 일컫는 스포츠 용어다. 요약하면 ‘축의 전환’인 셈이다. 최근에는 위기 상황이나 시장 트렌드가 급격히 변할 때, 기업도 기존 사업 방향이나 전략을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의 피보팅은 시장 상황이 예상과 다르거나 성과가 예상보다 저조할 때 주로 이뤄진다. 가장 많이 애용되는 분야는 스타트업이다.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내놓은 뒤 시장의 반응을 보고, 사업 모델이나 제품 특성을 발 빠르게 전환하는 피보팅은 스타트업 전략의 핵심이 된다.
기존 기업들도 한쪽 발을 바닥에 붙이는 식의 기존 역량과 자원을 활용해서 다른 발로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모색하는 방식을 통해 현실적이면서 창의적인 사업을 펼칠 수 있다.
마케팅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필립 코틀러 교수는 “당신이 현재 하고 있는 사업을 5년 후에도 똑같이 하고 있다면, 당신의 회사는 결국 사업에서 퇴출당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예상한 듯 변신에 성공한 테크(Tech) 기업들이 즐비하다. 유튜브는 애초 온라인 데이팅 영상 사이트로 출발했지만, 사람들이 관련 영상을 올리지 않자 개인이 쉽게 올리고 감상할 수 있는 사이트로 전환해 지금의 성공 신화를 썼다.
팟캐스트에서 짧은 메시지 전달 서비스로 전환한 트위터, 소셜 게임에서 이미지 기반 SNS로 사업을 바꾼 인스타그램 역시 축의 전환이 가져올 미래를 파악하고 있었다. 넷플릭스가 우편으로 비디오테이프를 배달하는 서비스에서 출발했다가 스트리밍 기반 온라인 영화 플랫폼으로 전환해 세계에서 가장 큰 영상 서비스 시장을 이끈 성공 이야기는 더는 화젯거리가 아니다.
기존 자산을 최대한 활용해 소비자의 변화무쌍한 니즈에 맞춰 새로운 방향으로 사업을 펼치는 피보팅 전략은 기업에 국한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즐기는 문화 생태계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극장의 변신이 대표적이다. 극장은 이제 영화를 ‘상영’하는 시대를 지나, ‘공연’하고 ‘강연’하며 ‘중계’하는 모양새로 탈바꿈하고 있다. 지난해 5월 CGV는 헤비메탈 그룹 메탈리카와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공연 실황을 틀었고,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e스포츠 대회를 생중계하기도 했다. 또한, 극장은 하나의 강연장으로써 투자자를 위한 재테크 강연이나 세미나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호텔업계에서의 피보팅 전략은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코로나19로 여행객이 감소하자 호텔업계는 재택근무를 하는 직장인을 위해 호텔 출근 패키지를 내놓고, 집에서 일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재택근무를 돕기 위해 숙소에서 오피스로의 변신을 단행했다. 출근 패키지의 경우 회사 출퇴근 시간에 맞춰 체크인·체크아웃 시간을 조정하기도 했다.
피보팅이 우리 일상에 깊숙이 침투한 것은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이 크다. 코로나가 우리 사회를 ‘가속화’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AI)의 발전, 비대면 사업의 확산, 환경에 대한 관심 증대 등 미래에 다가올 사회의 진행 속도를 획기적으로 끌어당겼다. 코로나19가 우리 사회를 ‘규모의 경제’에서 ‘속도의 경제’로 전환하면서 그 빠른 속도에 맞춰 결국 ‘축의 전환’도 발 빠르게 이뤄진 셈이다.
피보팅은 미리 철저하게 계획하고 실행하는 혁신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소비자 니즈에 대응하기 위해 ‘가설-실행-수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전략 방향을 수시로 수정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코로나19 시대에 탄생한 ‘과정의 삶’과 닮았다.
변화하는 현실에 신속하게 대응해 제품과 서비스를 우선 제안하고 소비자의 반응을 살핀 후 이에 따라 원래의 계획을 빠르게 수정하는 것이 피보팅의 핵심이지만, 발상의 전환 자체도 이에 못지않은 피보팅의 또 다른 얼개라고 할 수 있다.
1996년, 언어학자 미셸 토머스는 선생님도 포기한 프랑스어 낙제생들을 대상으로 색다른 실험을 감행했다. 강압적 교육 방식이나 꾸준한 반복 학습 같은 습관적 행태를 모두 없애고 대신 강의실을 전면 개조하는 일에 나섰다. 안락의자에 쿠션, 화분으로 온화한 분위기를 조성한 뒤 책상이나 칠판, 종이를 모두 없앴다. 토머스는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이해하며 실수를 다그치지 않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BBC 다큐멘터리를 통해 소개된 5일간의 특강에서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5년 배운 것처럼 변해있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천천히, 그러나 면밀히 지켜본 결과였다. 피보팅이 속도의 시대에 어울리는 전략이긴 하나 거기에 온전히 맞출 필요는 없을 듯하다. 우리가 느끼고 실행해야 할 진정한 피보팅은 타인의 속을 읽거나 마음이 통하는 ‘발상의 전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