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방대광 역사교사
고려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방대광 역사교사
밴 플리트는 1892년 3월 19일 뉴저지주 코이츠빌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사관생도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플로리다에서 주로 사냥과 낚시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번 그는 교육 환경이 좋은 도시에서 자란 동기생들보다 사회성과 학과 공부가 조금 부족했다. 그런 그에게는 큰 장점이 있었는데, 바로 플로리다의 자연환경이 키워낸 강인한 체력이었다. 이러한 체력 덕분에 그는 사관학교 재학 당시 육군을 대표하는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할 수 있었고, 1914년에는 탁월한 풀백으로 팀을 무패로 이끌기도 했다.
밴 플리트가 소위로 임관할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격변기였다. 1918년 유럽 전선 파견을 지원한 그는 프랑스에서 독일군과 교전 중 폭격으로 양쪽 다리와 등에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입었지만 간단한 치료만 받고 부대로 복귀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학군단 단장 등 여러 직책을 두루 맡았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다시 전쟁터에 지원했다. 대령으로 제8보병연대 연대장이 된 그는 부대원을 이끌고 1944년
노르망디상륙작전에 참전했다. 그는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하며 소수의 희생으로 오마하 비치에 상륙하는 데 성공하는 등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맹활약을 펼쳤다.
밴 플리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건 1951년이다. 당시 6·25전쟁을 지휘하던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후임으로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이 임명되었는데, 그의 후임으로 밴 플리트 장군이 미 제8군 사령관직과 유엔군 총사령관직을 넘겨받게 된 것이다. 밴 플리트 장군 임명 직후 유엔군을 향한 중공군의 대대적 공격이 단행됐다. 당시 중공군은 압도적으로 많은 병사를 앞세워 밀고 들어오는 인해전술을 펼쳤는데, 이에 맞서 밴 플리트 장군은 아군 병력의 희생을 줄이고 적의 공세를 차단하기 위해 고지전의 특성을 고려한 포병 전술을 활용했다. 일반적인 탄약량보다 몇 배나 많은 탄약을 쏟아부어 적군에게 대대적 포격을 가한 덕분에 서울을 재점령하려는 중공군의 공세는 좌절되었다. 이러한 활약으로 밴 플리트 장군은 중장에서 대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밴 플리트 장군은 북진 작전을 통해 중공군과 북한군을 궤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여러 차례 북진 작전을 통해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공산군의 정전을 제안받은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정전협상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군사 활동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정전협정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반대하고 있었고, 밴 플리트 장군의 생각도 그와 같았다. 양측 군대는 정전협상이 종결되기 전까지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51년 늦여름, 밴 플리트는 여러 건의 소규모 공격 작전을 전개해 단장의 능선, 피의 능선 등을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밴 플리트 2세는 6·25전쟁에 참전한 아버지를 따라 B-26 전투기 조종사로 지원해 1952년 3월 14일 한국 땅에 처음 발을 디뎠다. 사실 그는 1949년에 끝난 그리스 내전에 미 공군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해외 근무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사령관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는 한국에 반드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한국전 참전을 자원한 그가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 어머니에게 쓴 편지 중 일부다.
“사랑하는 어머니! …… 이제 바야흐로 제가 아버지를 지원할 때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싸우고 있으며 드디어 저의 미약한 힘이나마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부디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조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자유 수호를 위해 국가의 부름을 받은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1952년 4월 4일 새벽 1시 5분, 밴 플리트 2세는 승무원 존 매칼리스터 중위와 기관병 랠프 펠프스 일병과 함께 B-26 폭격기에 올라탔다. 그러나 압록강 남쪽 평안남도 순천 상공을 지나던 그의 비행기는 다시 기지로 돌아오지 못했다. 곧이어 수색 작업이 진행됐지만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의 생존 소식이 전해지지 않자 아군의 희생을 막기 위해 수색 작업을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이후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 이후인 1954년 3월 밴 플리트 2세는 전사 처리되었다.
6·25전쟁 초기 국군의 군사학교들은 북한군의 남침으로 대부분 파괴되어 폐교되었다. 미 제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한 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 육군에 가장 필요한 존재가 잘 훈련된 초급 장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군사학교를 다시 설립해 미 군사 고문단에게 교육을 받게 하자고 건의했다. 그 결과 육군사관학교가 4년제로 재창설되었다. 또 고급 장교들의 지휘와 참모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육군대학도 설치했다. 이어 밴 플리트는 한국군 장교의 질적 향상을 위해 미국 유학을 추진하기도 했다. 전시 중인데도 그의 노력 덕분에 선발된 장교 250명이 미국에서 단기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이들에 대한 성과가 좋자 모든 한국군 장교를 대상으로 교육을 확대 실시했다. 이는 미군 교육 시스템이 국군에 이식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밴 플리트 장군이 ‘한국 육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연유다.
1953년 1월 밴 플리트 장군은 미 제8군 사령관의 지휘권을 신임 테일러 사령관에게 넘겨주었다. 이로써 그는 22개월간 한국 전선에서의 야전 사령관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1953년 3월 38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하고 전역했음에도 그는 한국과의 인연의 끈을 이어 나갔다. 미국을 순회하며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의 전쟁고아를 돕기 위한 모금 활동 연설에 나섰으며, 미국 내 친한(親韓) 인사를 규합해 1957년 코리아 소사이어티(The Korea Society)라는 민간단체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 단체를 통해 그는 한미 상호 이해와 협력 증진, 그리고 친선을 목표로 정책·통상·경제·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후 그는 100회 생일을 보낸 지 약 6개월 후인 1992년 9월 23일 플로리다주의 농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시 미국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장성이었던 그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밴 플리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밴 플리트 상’을 제정했는데, 한미 관계 발전에 기여한 인물에게 1992년부터 매년 수여하고 있다. 이 상은 한미동맹의 상징이자 밴 플리트가 한국과 미국에 남긴 위대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밴 플리트 부자는 미국인이지만 한국의 평화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6·25 전쟁부터 전역 후 이어진 ‘코리아 소사이어티’ 설립까지 밴 플리트 장군의 노력은 한결같이 계속되었고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국적도 인종도 다른 먼 타지에서 군인으로서의 사명감으로 책임을 다한 밴 플리트 부자의 모습을 통해 힘겹게 지켜온 민주주의의 소중함과 호국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