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K 매거진(더케이매거진)
별이 가고 달이 갈수록
작성자 권*열 2024-05-03
방멸록 샘플
별이 가고 달이 갈수록 더욱 또렷이 보이는 그날 그 음성. “인생은 흙입니다!” 이 한 마디가 저를 해방시켰습니다. 인생의 정체성을 찾도록 해주셨습니다.

1989년 대학 3학년 1학기, 지방 대학생으로 할 수 있는 섣부른 고시 도전은 시험낙방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등신처럼 캠퍼스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습니다. 그 해 가을 2학기, 교양 필수로 어쩔 수 없이 듣게 된 철학개론은 나의 원 소속 경제학과가 아니라 고시 준비로 몇 개 과목을 듣던 행정학과에 개설된 수업이었습니다.

매주 3시간 교수님의 연강은 지금껏 내가 몰랐던 나를 알게 해주었고 여유와 안식과 해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3시간 들은 내용을 일주일 내내 아는 친구들에게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끊임없이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 말들이 얼마나 나를 자유케 했는지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면서(인생은 흙이라는 말, 아무리 잘 난 사람도 결국 숨이 코에 붙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 30여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조금 알게 됩니다) 그렇게 강조하고 다녔습니다.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 놀라운 사실에 날아갈 듯한 기분은 여전합니다.

직장을 얻는 것을 두고 대구에 있는 은행을 가느냐 서울에 본사를 둔 은행을 가느냐 그렇게 고민하다가 현실에 닥쳐 포항에 직장을 두었습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 매주 월요일 새벽 포항과 대구를 오고 가는 고속버스에서 교수님의 얼굴과 말씀을 들으러 달려가는 것이 좋았습니다. 결국, 직장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3년 6개월의 포항생활을 접고 대구로 되돌아왔습니다.

29세에 알아보는 직장은 될 듯 될 듯 하다가 막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전전하고 긍긍하면서 제 모습은 또 등신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예전에 선을 본 처자는 제 갈 길로 가버렸습니다. 인생이기에 한치도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게 되었습니다. 흙의 운명, 옴짝달싹 못하는 모습을 경헙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선생님이 되는 길로 새롭게 공부하자는 교수님의 제의를 받았고 그 길로 들어섰습니다. 1997년 5월로 기억합니다. 본가에서 재수하기는 부모님의 눈치로 어려게 되었습니다. 재숙누님(교수님의 사모님, 이제는 누님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께서 해주시는 도시락을 들고 재수학원으로 향하는 제 발걸음은 감동과 은혜로 활기차고 가벼웠습니다. 고등학생 반석이, 초등학교 6학년 성현이와 가족으로 지내는 시간이었습니다. 윤동형님(이제는 교수님이 아니라 형님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과 재숙누님 부부의 큰 아들 생활이 얼마나 은혜였는지요! 두 분의 큰 사랑과 두 아들의 배려로 사범대학은 아니지만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소기의 목적이 이루어졌습니다!

1998년 교대 입학과 동시에 지금 아내가 된 강이금 자매와의 결혼을 위해 윤동형님과 재숙누님께서 match-maker로 참 인격의 중매자로 연결해주셨습니다. 4년간 새로운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첫해 봄, 뜻하지 않은 나의 폐결핵 치료와 치료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아이낳고 키우느라 정신없이 지나갔습니다. 그 시간 함께 해준 아내가 얼마나 대견하고 감사한지요! 집사람이 지금도 제 옆에 있도록 해주신 두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2002년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면서 경제적으로 조금 안정되었습니다. 첫째 신애(2000년생), 둘째 신영(2004년생)이가 지금껏 잘 자라고 있습니다. 딸 아이들이 초등부 중고등부 생활을 잘 지내고 지금은 대학생으로 자라는 것을 두 분께서 늘 지켜봐 주시고 애정을 쏟아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세대를 너머 사랑을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은혜입니다.

교수님 부부(형님 누님 부부)를 만난 처음부터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도 두 분의 사랑과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이 저와 저의 가족의 축복입니다. 흙인 제 인생에 생명을 뿌려주셔서 더없이 당당한 인생을 살게 해주시고, 감동적이고 벅찬 삶의 의미를 알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70대를 사시는 윤동형님과 재숙누님 부부와 가족의 건승이 별이 가고 달이 갈수록 더욱 온전하리라 믿습니다.

2024. 5. 3. 곧 있을 스승의 날을 즈음하여 제자 권기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