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새롭게, 항상 처음처럼
진남초등학교 3학년 3반 교실에는 ‘손바닥’이 그려진 종이 한 장이 칠판 옆 벽면에 걸려 있다. 자신이 직접 그린 이 그림 앞에서 그는 매일 아침 마음먹는다. 손가락 세 마디가 오늘은 모두 칠해지기를, 항상 처음처럼 다짐한다. 이 그림의 제목은 ‘교사 나승빈의 약속’이다. 배움의 세계로 초대하기, 판단과 평가를 줄이고 미소로 기다리기, 놀이와 함께 즐거운 시간 만들기. 그날의 수업이 끝나면 그 약속을 지켰는지 하나씩 색칠하며 자신을 스스로 점검한다. ‘초심’이라는 이름의 진심을 하루하루 그렇게 지켜나간다.
“저뿐 아니라 아이들도 자신과 약속해요. 각자 정한 세 가지 약속을 ‘손바닥 그림’으로 만든 뒤 매일매일 다짐과 점검을 해나가죠. 바르게 앉기, 책 읽기, 복도에서 뛰지 않기…. 스스로 약속하고 스스로 지키면서 어제보다 나아지려 다 함께 노력해요.”
세 가지 약속이 각자의 실천 사항이라면, ‘재미·배움·평화’ 는 학급 전체의 급훈이다. ‘함께 있어 행복한 우리’로 나아가기 위해 아이들과 같이 정한 올해의 목표다. 등교 직후 선언하고 하교 직전에 점검하는 것은 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이 쌓인다. 최선을 다하려는 매일의 노력 덕분에, 그날이 그날 같을 수 있었던 ‘모든 날’이 별처럼 반짝인다.
“‘함행우(함께 있어 행복한 우리)’는 교육자로서 제가 나아가려는 지향점이에요. 함께 행복해야 하고, 지금 행복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놀면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놀면서 즐겁게 배울 때 아이들이 가장 잘 익히더라고요. 지금 제가 맡은 3학년 아이들은 코로나19 시국에 접어들자마자 초등학교에 입학한 친구들이에요. 무려 2년간 대면 수업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아이들이죠. 이 친구들과 함께하면서 교육에서 놀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고 있어요.”
다행히도 올해 진남초등학교의 ‘중간 놀이’ 시간이 부활했다. 또래들과 어울려 놀기 시작했으니 아이들의 배움이 금세 제자리를 잡을 것이라 그는 굳게 믿고 있다.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 기록하고 공유하다
시련이 먼저였다. 2009년 9월 광주효덕초등학교에서 교사로서 첫발을 내딘 그는 그 학교에서 3년 반을 지낼 때까지 자신이 ‘교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그 환상이 깨졌다. 자신의 말에 ‘좋아요’라고만 답하던이전의 아이들과 달리 ‘싫어요’라는 말을 툭툭 하는 아이들을 비로소 만난 것이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땐 전혀 몰랐다. 처음 겪는 그 상황이 너무 막막했다.
“한창 힘들어하던 어느 날, 존경하는 선배님이 해주신 말씀이 생각났어요. 기억에 의존하지 말고 기록을 해나가라는….
해답을 찾으려면 저를 돌아봐야 하고, 그러려면 제가 학교에서 하는 것들을 적어나가야겠더라고요. 그때부터 블로그에 수업 내용, 수업 방법, 아이들의 반응 같은 것을 하나하나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2014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뜨린 적이 없습니다. 지혜로운 선생님은 많은데, 그 지혜가 잘 전수되지 않는게 늘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저라도 공유하기로 마음먹었죠.”
그간의 기록을 모아 여덟 권의 「월간 나승빈」을 펴냈고, 최근에는 ‘주간 나승빈’이라는 제목으로 아이들과의 일상을 유튜브에 올리고 있다. 일간이든, 주간이든, 그의 기록엔 자신의 ‘미숙함’까지 고스란히 담긴다. 시행착오를 돌아보며 미래의 본인이나 현재의 타인이, 그보다 나은 방법을 찾게 되길 진심으로 바라기 때문이다.
내일이 두렵지 않은 준비된 교사 되기
기록으로 공유의 보람을 알게 된 그는 ‘내일이 두렵지 않은 준비된 교사 되기’라는 워크숍을 통해 교사들의 고민 덜어주기에 앞장선 적이 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든 교과목을 가르쳐야 하는 초등교사는 자신이 ‘취약한’ 수업을 두려워할 때가 많다. 방법을 나누면 그 두려움이 덜어질 것 같아 용기 내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을 만나면 ‘내일 체육 수업 땐 뭘 하지?’, ‘내일 미술 시간은 어떻게 하지?’ 같은 걱정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잘하고는 싶은데 방법을 몰라 고민하는 걸 보면서 체육 편, 미술 편, 국어 편, 놀이 편, 상담 편, 학습 용구 편 등 분야별로 수업 아이디어를 공유했어요. 우리끼리 나누기도 하고 외부 강사를 초빙하기도 하면서요. 글자 그대로 내일이 두렵지 않은 교사들이 되어갔죠.”
‘내일이 두렵지 않은 준비된 교사 되기’ 프로젝트가 끝나자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이름의 끝 글자를 딴 ‘빈 스쿨’이다. 아이들에게 학문적 기술과 사회적 기술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를 공유한 이 공부 모임은 2016년부터 한 달에 두 번씩 이어오다 아쉽게도 2020년 코로나19 확산 이후 잠정 중지한 상태다. 그때 공유한 결과물을 책으로 묶었다. 「나쌤의 재미와 의미가 있는 수업」, 「핵심 역량을 키우는 수업 놀이」, 「나승빈 선생님의 전 학년 수업 놀이」, 「승승장구 학급경영」 등이 그것이다. ‘빈 스쿨’이 그가 자신의 지혜를 전달하는 공부 모임이었다면, ‘학급&수업 살이 A to Z’는 전국 초등교사가 토론을 통해 함께 답을 찾는 공부 모임이다. ‘아이들이 우유를 안 먹어요’, ‘일기 검사를 해야 할까요?’, ‘진도가 너무 느려요’ 등 별별 것을 다 토론했다. 광주, 서울, 인천, 부천, 대전, 대구, 제주… 각 지역을 차례로 방문하면서.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소소하되 시시하지 않은 고민을 나눴다. 함께여서 든든한 시간이었다.
같이 놀아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
“요즘은 두 개의 공부 모임을 하고 있어요. 하나는 2018년부터 해오고 있는 ‘놀이 위키’예요. 전국 초등교사 60여 명과 한 달에 한 번씩 신체 놀이, 감정 놀이, 미술 놀이, 음악 놀이 등 다양한 놀이를 공부하죠. 다른 하나는 ‘따함모(따뜻하게 함께 성장하는 모임)’라고 광주·전남 지역 교사 30여 명과 학급긍정 훈육법(PDC)을 한 달에 두 번씩 공부 중이에요. 학급긍정 훈육법을 간단히 설명하면, 아이가 학교에서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가정할 때 그 행동이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해 가는 공부예요. 아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함께 배워가는 과정이죠.”
그가 자신의 지혜를 기꺼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은 그 스스로 ‘배움’의 현장을 수없이 찾아다녔기 때문이다. 국내는 물론 타국의 교육 상황도 숱하게 견학했다. 일본, 중국, 인도, 몽골,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등을 다니며 그들이 어떻게 교육하는지, 사회는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고 어떤 지원을 하는지 공부하고 왔다. 보고 온 것을 「세계 최고의 교육법」이란 책으로 썼다. 이제 우리도 다른 나라에 배움을 나눠주는 나라가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조선족 자치구 흑룡강성 교사들에게 온라인으로 자신의 수업법을 전수하기도 했다.
“일본의 교육 기술 법칙화운동(TOSS)을 이끄신 무코야마 요이치 선생님을 참 존경해요. 그분이 자신의 ‘인생 수업 베스트 5’를 꼽으셨는데, 그중 세 수업이 퇴임한 해와 바로 그 전 해에 하신 거더라고요. 정말 감동했어요. 저도 그분처럼 퇴임하는 순간까지 끝없이 발전하는 교사가 되고 싶어요.”
그는 아이들에게 말로 놀이를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아이들 속으로 직접 들어가 함께 논다. 아이들의 ‘동료’가 되어야 아이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이들이 자신에게 “같이 놀자”고 말해 올 때다. 또 그가 가장 기뻤던 경험은 감정조절이 전혀 안 되던 아이가 자기 조절 연습을 통해 극적으로 나아지는 것을 지켜봤을 때다. 그의 행복은 철저히 아이들과 함께일 때 깃든다. ‘연결’이 곧 ‘행복’임을, 그가 ‘말’이 아닌 ‘삶’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