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K 매거진(더케이매거진)
작성자 김*현 2025-05-09
스승의 날 아침, 교사로서 보낸 10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찾아왔다. 늘 그렇듯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편지 한 통이 눈에 들어왔다. 연한 파스텔 색상의 봉투, 그 위에 또박또박 적힌 내 이름. 조심스레 봉투를 열자, 떨리는 글씨체로 쓰인 한 문장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선생님, 매일 웃으며 가르쳐줘서 학교 오는 게 행복해요. 선생님 덕분에 내가 소중하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편지의 주인공은 2학년 반에서 가장 조용한 학생, 민수(가명)였다. 그 한마디는 단순한 고마움이 아니었다. 민수와 함께했던 지난 1년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민수를 처음 만난 건 작년 3월, 새 학기가 시작된 첫 수업 날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서로 인사하고 떠들썩하게 교실을 채울 때, 민수는 창가 구석 자리에서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눈을 마주쳐도 금세 시선을 돌리던 아이였다. 수업 중 질문에 대답하는 법이 없었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담임으로서 민수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이 아이는 왜 이렇게 자신을 숨기려 할까?’ 궁금증과 함께, 민수에게 다가가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작은 것부터 시작했다. 수업 시간에 민수가 정답을 아는 듯해도 망설일 때, “민수 생각이 궁금한데, 얘기해 볼래?”라며 부드럽게 물었다. 틀려도 괜찮다고, 시도 자체가 멋지다고 격려했다. 처음엔 어색한 미소로 대답하던 민수가 점차 작은 목소리로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수업 후엔 짬을 내어 민수와 이야기를 나눴다. 좋아하는 책, 게임, 꿈 같은 가벼운 주제들로 대화를 이어갔다. “선생님, 저 사실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해요”라며 수줍게 보여준 스케치북엔 상상력 넘치는 그림들이 가득했다. 그 순간, 민수의 숨겨진 빛을 발견한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학기가 지나며 민수는 조금씩 변해갔다. 수업 시간에 손을 들고 발표하는 횟수가 늘었고, 조별 활동에서도 친구들과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한번은 과학 시간에 태양계 모형을 만들며 민수가 팀원들과 깔깔대며 웃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웃음소리는 민수가 교실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학부모 상담 때 민수의 어머니께서 “아들이 집에서 선생님 얘기를 자주 해요. 학교 가는 게 즐겁대요”라고 말씀하셨을 때, 가슴 한편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민수의 변화는 단순히 외향적이 된 것 이상이었다. 2학기 중반, 학교에서 열린 ‘꿈 발표회’에서 민수가 용기를 내 무대에 섰다. 떨리는 목소리로 “저는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싶어요”라고 말하며 자신이 그린 그림을 설명했다. 그 자리에서 민수의 그림을 본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멋지다!”를 외쳤고, 민수의 얼굴엔 처음 보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교사로서의 보람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느꼈다. 민수는 더 이상 구석에 숨은 아이가 아니었다. 자신을 사랑하고, 세상과 마주할 용기를 얻은 아이였다.

그리고 스승의 날, 민수의 편지를 읽으며 그 모든 순간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편지엔 민수가 처음으로 느낀 자신감, 친구들과의 우정, 그리고 교실에서 보낸 행복한 시간들이 담겨 있었다. “선생님이 저를 믿어줘서 저도 저를 믿게 됐어요”라는 문장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민수의 변화는 단순히 한 학생의 성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교사로서 내가 아이들의 삶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 그리고 그 책임의 무게를 깨닫게 하는 선물이었다.

민수의 편지는 지금도 내 책상 서랍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다. 힘든 날, 교사라는 직업에 지칠 때면 그 편지를 꺼내 읽는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민수 같은 아이들이 교실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믿음,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따뜻한 격려와 믿음이 또 다른 기적을 만들어낼 거라는 희망. 민수의 한마디는 단순한 감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 교직 인생을 비추는 등불이자, 앞으로도 아이들과 함께 걸어가야 할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