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미경 l 사진 이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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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웨이 무대가 아니어도 김경주 회원의 자세는 매우 꼿꼿하다. 오랜 습관 덕분이다. 몸의
중심을 바로잡는 일이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과 같다고 믿기에, 휴식을 취할 때조차 그는
늘 고개를 들고 허리를 편다. 당당한 인상을 줄 뿐 그 모습이 깐깐한 느낌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눈빛과 목소리에 다정함이 가득 담겨 있는 까닭이다. 그는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한 ‘어른’으로서의 태도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3월 25일부터 4월 1일까지 열린 ‘2024 상하이 패션위크’에 참가하고 그제 돌아왔어요. 한국
시니어 모델 22명, 중국 시니어 모델 2명과 중국의 젊은 모델 14명이 함께한 패션쇼에 제가
운좋게 서게 됐거든요. 그 무대가 시니어 모델을 내세운 중국 최초의 패션쇼였다고 해요.
뉴욕이며 파리에서 온 기자들이 우리 기사를 크게 실어줘 국위를 선양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는 ‘2024 상하이 패션위크’에 앞서 열린 ‘2024 F/W 파리 컬렉션’에서도 런웨이를 누볐다.
꿈의 무대에 잇달아 진출한 새봄이었다. 단지 운이 좋았다고 하기엔 그의 전문성이 매우
뛰어나다. 타고난 체격에 노력으로 만들어진 표현력까지, 디자이너들이 그를 선호하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리더’로서도 맹활약 중이다. 현재 한중시니어모델협회 한국지회장으로도
활동하는 김경주 회원은 얼마 전 상하이 패션위크 참가차 중국에 갔을 때 ‘더칭(德清)’이란
도시의 시니어 모델 아카데미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고 왔다. ‘민간외교’라는 말의 뜻이
그의 가슴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
“우리가 보여주는 모습이 곧 한국의 이미지잖아요. 양국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작게나마
힘을 보태고 싶어요.”
생활 속 운동으로 몸을 관리하고, 긍정적 생각으로 마음을 단련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다.
시니어 모델로서의 삶이 그를 점점 더 ‘좋은 쪽’으로 이끌어간다.
2021년 8월 인천청람중학교 교감으로 교직 생활을 마감한 그는 정년퇴직을 넉 달 앞두고 주말마다
시니어 모델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36년간의 미술 교사 생활도 4년간의 교감 생활도 더없이
행복했다. 충만한 마무리를 앞두고, 자신이 새롭게 해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시니어 모델은 그 고민의 결과였다. 그에게 ‘옷’은 자신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도구였다. 커다란
벨트를 손수 제작해 착용하곤 했는데, 학생들이 그걸 아주 좋아해 줬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패션을
통해 자신을 마음껏 표현하기에는 제약이 많았다. 꼭꼭 눌러뒀던 자기 안의 ‘끼’를 이제라도 한껏
펼쳐보고 싶었다. 그 길에 들어서니 미처 몰랐던 행복이 그를 기다렸다. 3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120여 회의 패션쇼에 참가하면서 자기만의 색깔을 차근차근 찾아 나갔다.
“시니어 모델을 하면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됐어요. 교직에 있을 땐 제가 남을 이끌기보다
받쳐주는 걸 더 편안해하는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도
정말 행복하더라고요. 저만의 방식으로 우아하고 품격 있게, 디자이너의 옷이 돋보이도록 노력해
왔어요. 그 노력이 좋은 평가로 이어지니 자존감이 크게 높아졌죠.”
자기만의 색깔을 찾게 해준 건 모델 활동만이 아니다. 퇴직 후 인천여성작가연합회 소속으로 화가의
삶을 병행해 온 그는 지난해부터 패션쇼에 치중했던 삶의 무게중심을 그림으로 조금씩 옮겨왔다.
‘시니어 모델로 언제까지 활동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모델과 화가의 양 날개로 날아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먹의 농담이 한지의 거친 질감을 만나 독특한 조화를 이룬다. 채색화를
전공한 그가 ‘먹’이라는 신세계를 만나 자기만의 끼와 색을 또 찾아가고 있다.
“작년 10월 송도센트럴파크호텔에서 제 작품들로 사흘간 아트페어를 했어요. 거기서 ‘첫 제자’를
만나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1982년 문산종고(현 문산제일고)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제가 지도한 미술부 학생 중 한 명이 근사한 언론인이 되어 그 자리에 왔더라고요. 그 친구가 제
그림이 너무 좋다며 적극적으로 개인전을 열어줬어요. 수십 년 만에 해후한 제자가 최고의 은인이
되어준 셈이죠.”
그렇게 마련된 전시회가 지난 2월 1일부터 18일까지 서울 N2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Vertical Mind’다.
그는 안정감이 느껴지는 가로선보다 다소 경직되어 있지만 ‘어딘가로 움직이려는 힘이 있는’ 세로선을
좋아한다. 세로선이 가진 긴장감 속에서 ‘도전’의 가능성을 읽어내는 것이다. 표제작 ‘Vertical Mind’는
영화 ‘파피용(Papillon)’에서 주인공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장면을 떠올리며 그린 작품이다. 영화
속 주인공이 ‘살기 위해’ 그런 행동을 선택했듯, 그는 절벽에서 절망 대신 희망의 날갯짓을 발견한다.
낭떠러지라고 생각했던 그 자리에 ‘작지만 큰’ 희망이 숨어 있음을 말해 주는 것. 이 땅의 어른인 그가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그것이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지만 여러 이유로 화가 대신 교사의 삶을 선택했어요. 돌이켜보면 그게
최고의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교사가 천직이었거든요. 학생들과 사랑을 주고받았던 모든 순간이
지금의 저에게 아주 큰 힘이 돼요.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 교육자로 뿌리내린 40년이
있었기에 끼를 분출하며 살아도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으며 살고 있어요.”
나무처럼 깊이 뿌리를 내려본 사람들에게 그는 권한다. 두려움을 잠시 접고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뎌 보라고. 혹여 잘 해내지 못하더라도 도전 그 자체로 이미 꽃길을
걷는 거라고. 절벽에서 ‘희망’을 보는 그가 은퇴를 ‘꽃길’에 비유한다. 문득 바라본 창밖에 봄꽃이
환히 피어 있다.
“두려움을 잠시 접고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뎌 보세요. 도전 그 자체로 당신은 꽃길을 걷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