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벌판 찬 바람 속에서 민족의식을 높이다
한의사 신광렬(개명 전 이름 신현표, 가명 신호) 선생은 1903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5대째 한의업을 이어오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을사늑약에 이어 한일병합조약으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1911년 민족의식이 투철하던 작은아버지 신홍균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은 북청을 떠나 압록강 건너 봉천성 장백현으로 이주했다. 신광렬 선생의 집안은 북청에서 오랫동안 한의업을 이어왔고, 20여 두락(마지기, 1두락은 한 말의 종자를 파종할 면적의 땅)의 토지를 소유할 만큼 부유했다. 따라서 편안한 생활을 포기하고 온 집안이 압록강 건너 서간도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삼숙 신동균 선생이 1919년 독립운동을 펼치다 일제 헌병대에 의해 피살되어 압록강에 수장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신광렬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일제를 향한 원한과 분개심을 갖고 항일의식을 키웠다.
청파 신광렬(靑坡 申光烈) 선생[출처: 자생의료재단 홈페이지]
신광렬 선생은 1921년 용정시 동흥중학교에 입학해 근대식 교육을 받았다. 동흥중학교는 대성중학교와 함께 1920~1930년대 항일투쟁에 앞장선 간도 지역의 대표적인 사립학교다. 특히 1920년 경신참변으로 지역과 계층을 뛰어넘는 민족 단결을 주장한 민족주의 독립운동이 약화하고 노동계급의 해방, 민족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독립운동 사상이 확산했을 때 진보적 지식인들이 사회주의 혁명 사상을전파하는 주요 기지였다. 이후 조선공산당만주총국 동만 구역국의 활동 기반이 되기도 했다. 동흥중학교의 사회주의적 성향은 신광렬 선생이 1930년 제3차 간도 공산당 활동을 전개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신광렬 선생은 22세에 동흥중학교 졸업 후 장백현 녹강가의 제일정몽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제일정몽학교는 장백현의 한인 사회를 하나로 묶기 위해 ‘바르게 깨우친다’ 라는 뜻을 담아 세운 학교로 3·1운동 당시 지역 만세 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또한 장백현 지역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광정단 간부 출신 오주환이 교장을 맡는 등 지역 독립군 단체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곳이었다. 광정단은 대한국민단·대진단·대한독립군비단 등 지역의 독립군 단체가 연합한 조직으로 1924년 정의부로 통합된 단체다. 신광렬 선생이 제일정몽학교에 근무한 것도 대진단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숙부 신홍균의 영향이었다.
일제의 핍박 속에서도 꿋꿋이 꿈을 좇은 청년
신광렬 선생은 1926년 결혼한 이후 고향 북청으로 돌아가 한의학을 공부하며 가업을 이으려고 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던 집안이 일본 관청으로부터 ‘요시찰 집안’으로 지목되어 의사 시험에서 수험 번호조차 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 신광렬 선생은 훗날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 의사 시험이 고시되었지만 요시찰 가족의 인물로 왜정 관청에 주목되어 시험 번호조차 받지 못한 것이 수차례였다. 그 이유는 우리 가족이 독립군 활동이 활발하던 중국 남만주 지역에 살았고, 또 숙부 신홍균이 독립군 두목인 대진단 단장으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당시 왜인들이 우리 집을 호감으로 대우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신광렬 선생은 의사 면허 취득이 어려워지자 1928년 숙부 신홍균이 거주하던 연길현 수신향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한의학을 공부해 지역 중국인과 조선인을 치료해 주면서 마을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또 숙부의 영향을 받아 수신향 인근 용정의 조선공산당만주총국 산하 동만청년총동맹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다.
1929년 11월 광주광역시에서 식민지 교육과 민족 차별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생했다. 학생 운동은 12월 초 진상 조사를 명목으로 한 신간회의 지원과 서울 학생들의 궐기에 힘입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민족 차별 반대와 식민지 교육 반대를 내용으로 하는 격문이 배포되었고, 학생과 민중의 총궐기를 촉구하는 시위 운동으로 확산하였다.
이 항일운동의 여파는 두만강 너머 용정 지역에도 미쳤다.
이때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은 광주학생항일운동을 3·1운동에 필적할 만한 조직적·대중적·혁명적 운동으로 목표를 정하고, ‘우리 피압박 민중은 일제히 궐기한다. 재만 단체는 협동 전선을 구축해 이 운동을 옹호 원조하라’는 격문을 배포하며 만주 지역 독립운동과 조선공산당 재건의 계기로 삼으려고 했다. 1930년 1월 용정 시내에 격문 수만 매가 살포되었고, 동흥중학교를 비롯해 주변 학교 학생 수천 명이 동만청년총동맹의 지휘 아래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신광렬 선생은 동만청년총동맹원이자 동흥중학교 선배로서 학생들의 시위를 지도했다. 이때 시위를 진압하던 일본 총영사관 기병대원의 칼에 옆구리를 맞아 깊은 상처를 입기도 했다.
신광렬(당시 이름 신호申琥)의 체포를 실은 당시 신문기사(「중외일보」 1930.4.26.)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선공산당만주총국 동만주지역위원회는 학생 시위를 3·1운동 제11주년과 연계해 대대적 만세운동으로 확산하고자 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 연길현과 화룡현 지역 농민 300여 명도 2월 28일부터 3월 2일까지 연쇄적으로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또한 동만주지역위원회는 이 여세를 몰아 ‘5월 1일 메이데이’ 시위와 함께 대대적 민중 봉기를 계획하면서전동만폭동위원회(全東滿暴動委員會)를 조직해 시위를 준비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3월 중순 관련 청년, 학생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발각되었고, 주요 인사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를 ‘제3차 간도 공산당 사건’ 이라고 한다. 이때 다수는 경찰을 피해 함경북도 혜산진으로 피신했으나 혜산진경찰서에 발각·검거되었고, 신광렬 선생도 함께 체포되었다. 신광렬 선생은 1개월간 조사를 받은
뒤 서울로 호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고, 100일 넘게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었다. 만주로 돌아온 신광렬 선생은 서간도 임강현에서 의사 시험에 합격한 뒤 광생의원을 열어 8년 동안 운영했다. 이후 함경남도 북청으로 거처를 옮겨 의업과 농업을 병행하며 독립군의 군수품을 전달하는 등 항일 투쟁을 지원했다.
그 무엇보다 소중했던 정부 수립을 향한 열정
1945년 8월 그토록 그리던 해방을 맞이했지만 남북이 다시 분단되고, 신북청인민종합병원 원장으로 근무하던 신광렬 선생은 소련군에 대항해 반공 활동을 펼치다가 신분이 노출되어 가족도 챙기지 못하고 다급하게 12월 혈혈단신으로 월남했다.
‘한참 동안 해방이니 독립이니 떠들더니 소련 군대의 진격이 시작되자 자유와 인권침해는 불가형언이고 보안대가 당시 무법천지에서 강권을 발동하고 동시에 소련군은 흥남질소공장, 일철공장 등의 기계뿐만 아니라 우마(牛馬)를 반출하고자 웅진항을 통해 소련으로 가져갔다. 만주에서 떠나온 전재민(전쟁 이주민)들을 죽였다.’ 이는 신광렬 선생이 그의 저서 「월남유서(越南遺書)」에 해방 이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만행을 기록한 내용이다.
그리고 곧 서울에서 지인의 소개로 신익희 선생이 주도하는 정치공작대에 가입하기에 이른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장으로 활동하다 귀국한 신익희가 조직한 정치공작대는 임시정부의 하부조직으로 출발했다. 정치공작대는 임시정부의 국민적 기반을 마련할 목적으로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했고, 신광렬 선생은 정치공작대의 함경도 책임위원으로 북한 지역의 지방 조직망 결성을 위해 1946년 1월 북청에 파견되었다.
당시 정치공작대는 북한 지역에서 반탁·반공 활동 및 김일성, 최용건 등 북한의 주요 인사에 대한 테러 활동을 주요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경비가 삼엄해진 상황에서 보안대에게 발각된 신광렬 선생은 기지를 발휘해 가까스로 탈출했으나, 북청에 남아 있던 그의 부인은 그의 행적을 수소문하던 북한 당국에 의해 고문 끝에 사망했다. 1950년대 후반 아내의 사망 소식을 들은 신광렬 선생이 죽을 결심을 하고 자신의 행적을 담은 유서를 기록한 것이 바로 「월남유서」다. 그가 자식에게 남기기 위해 작성한 「월남유서」에는 그의 행적과 집안의 독립운동 이야기, 주변 인물의 활동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이후 독립운동사 연구를 통해 미국 중앙정보부 (CIA) 기밀문서의 내용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이후 같은 한의사이자 숙부인 신홍균 선생이 독립운동을 인정받고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월남유서(越南遺書)」 초안본(1959) 표지
[출처: 이계형·신민식·정상규
<「월남유서」를 통해 본 신광열 한의사의 독립운동과 생애>]
‘인술’을 베풀며 쌓은 민족 의학의 토대
남한으로 돌아온 신광렬 선생은 약방을 운영했다. 그러나 또다시 6·25전쟁으로 피란하던 도중 당진에서 반신불수로 고통받던 남자아이를 침과 약으로 고쳐준 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광생의원을 열었다. 1955년 50세가 넘은 나이에도충남 아산에서 한의사 시험에 합격한 뒤 도고역에 청파한의원을 개원했다. 한방과 양방의 의사 자격을 모두 취득한 그는 당시 낙후한 의료시설과 부족한 의료 인력 문제로 열일곱 번이나 이사 다니면서 지역을 위한 의료 활동을 하며 인술을 펼쳤다. 이후 서울로 올라온 신광렬 선생은 함남한의원을 개원하고 1980년 작고할 때까지 한의학의 과학적 검증과 치료법 표준화 정립에 힘써 민족 의학 부흥의 토대를 마련하는 한편, 의료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했다. 정부는
신광렬 선생의 독립운동을 기려 2022년 8월 15일 제77주년 광복절에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고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현재 한의사 출신으로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인물은 신광렬 선생까지 총 8명이다. 다른 직업군에 비해 한의사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이 많은 것은 한의사라는 직업적 특수성과 역사와 민족정신이 깃든 한의학에 대한 제국주의 일본의 차별이 심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의생(醫生, 전문의가 아닌 학생) 규칙을 제정해 한의사를 의사가 아닌 의생으로 분류하고 의료 활동을 하던 한의사들의 의사 자격을 박탈해 한의사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많은 한의사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독립군 부대의 군의관으로 활동한 경우도 많았다. 더욱이 다수의 한의사가 약재를 캐기 위해 마을과 산 주위를 다니고 먼 지역까지 왕진을 다니기 때문에 정보 수집에도 용이했다. 한약방은 의료시설이 열악하던 일제강점기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장소였고, 거금의 한약재 거래도 종종 있었기에 독립운동 관련 비밀 연락 장소로 활용되었다. 실제로 서울의 동화약방(현재 동화약품 본사)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 지역 연통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신광렬 선생의 숙부 신홍균도 1933년 지청천이 지도하는 한국독립군 군의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대전자령전투에서 독립군의 부상을 치료하면서 숲속에 자생하는 검은 버섯(목이버섯)을 이용해 굶주림 해결과 대승을 이끄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서울 연통부 기념비(서울 중구 순화동 동화약품 앞) [출처: 월간중앙]
※ 민족대전자령 전투의 숨은 영웅, 독립군 군의관 신홍균 선생의 이야기는 지난 「The-K 매거진」 2021년 1월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