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생소한 위인, 현철
K-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특정 국가에 한정되지 않는다. K-문화는 한반도라는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 국가와 세대를
아우르는 보편성을 지니게 되었다. 분야도 음악을 넘어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형태로 계속 확장되고 있다. 그중에는 연극도 있다.
연극이라고 하면 단순히 배우가 각본에 따라 연기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시나리오 작성부터 무대연출, 분장, 연기, 춤,
노래 등이 포함되는 종합예술이다. 연극이야말로 예술 활동의 종합체이며 기본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연극으로 시작해 세계적으로 히트한 드라마와 영화 대본을 만든 작가나 연출가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만난다.
또 오랜 세월 연극을 통해 기본기를 닦은 뒤 드라마와 영화 분야로 진출해 사랑받는 연기자도 자주 만난다.
이들은 공통으로 연극을 하던 시절 배고프고 힘들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시절이 훈장처럼 자랑스러운 순간이며, 언제라도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라고 말한다. 그 이면에는 연극이 대한민국 문화 발전의 초석이라는 자긍심이 깔려 있다. 이런 풍토는
갑자기 만들어지 않았다. 연극인들의 부단한 노력이 모인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시작점에 100여 년 전 활동한 연극인
현철(1891~1965, 본명 현희운) 선생이 있다. 그는 대중에게 무시당하던 배우가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여건과 토대를 마련해 주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연극을 통해 희로애락의 감정만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인에게 삶의 희망을 주고 독립이라는 당위성을
심어주고자 했다.
현철 선생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엘리트 코스를 벗어나 연극에 빠진 청년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현철 선생은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의사가 되고 싶었던 그는 도쿄의 세이소쿠영어학원에서
공부하다 진로를 바꿔 메이지대학교 법과에서 공부했다. 이때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지 3년밖에 안 되는 시점이었다. 혈기 왕성하던
20대 초반 현철 선생은 국권을 상실했다는 사실에 매일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그러던 중 우연히 ‘민족적 의력(意力)이
발달하지 못한 나라는 연극이 발달하지 못하였다’라는 문구를 읽으면서 비로소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당시 현철 선생의
심경을 1959년 동아일보에 기고한 칼럼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지금 연극이 있는가? 생각해 보니 한심스러웠고, 국민의 의지력을
기르려면 연극이 발전되어야 하겠다고 마음 한구석에 다짐했다. 국민의 의지력을 강인하게 길러서 빼앗긴 나라를 도로 찾자 이렇게 결심한
나는 드디어 의학 공부를 포기하고, 연극의 길로 발을 디디기로 하고 시마무라 호케스(島村抱月)
*가 주재하는 예술좌에 입단한 것이다.’
그는 단순히 연극을 좋아해서 진로를 바꾼 것이 아니라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이 결정은 현철 선생스스로 꿈을 포기하는
것이며, 앞으로 평탄할 수 있는 삶 대신 고단한 삶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시마무라 호케스(島村抱月): 일본 근대극 운동의 선구자로 명성이 높았던 인물
연극을 배우기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다.
연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현철 선생은 무작정 시마무라가 운영하는 게이주쓰좌 부속 연극학교에 입학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연극학교에 들어간 것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들어서야 중국과 인도에 서양
연극이 소개될 정도여서 일본 외에는 연극을 배울 곳이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분장술과 화장품 제조법 등 연극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여기에는 서양 연극론처럼 이론 공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철 선생은 4년간 연극학교에서 ‘부활’ 같은 대중적 신극과 ‘바다의 부인’ 같은 번역극 공연에 연기자로 참여했다. 이론과
실기 모두를 알아야 한국인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연극을 제작할 수 있다고 믿으며 힘든 시기를 버텼다. 그런데도
정답을 찾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함이 느껴졌다. 특히 서양 연극과 전통극, 그리고 일본에서 도입된 신파극을 어떻게 정의하고
활용할지 정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더 넓은 세상에서 정답을 찾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높은 인기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던 중국의 근대극 배우 어우양위첸(歐陽予倩)을 만났다. 그리고 그가 있는 싱지 연극학교의 운영과
관리를 도와주며 2년 동안 머물렀다.
문예지 「개벽」 현철 격야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본과 중국의 연극을 몸소 체험해 익힌 현철 선생이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1919년이었다. 이때는 3·1운동으로 민족 감정이
매우 고조되어 독립을 향한 의지와 노력을 전 계층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시기였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연극을 통해
한국인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적절한 때라고 판단했다. 천도교의 재정 후원을 받아 만드는 종합잡지 「개벽」의 문예부장으로
취임한 그는 연극에 대한 자기 생각을 알렸다. ‘희곡의 개요’, ‘현당극담’, ‘문화사업의 급선무로 민중극을 제창하노라’
등의 연극 비평을 통해 연극이야말로 한국인이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를 알려준다고 말했다.
하믈레트(Hamlet 햄릿)(1923.05.26.)
[출처: 동아일보]
현철이 1921년~1922년 월간지 개벽에 연재한 ‘하믈레트’를 1923년 박문서관에서 출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하다
조선배우학교 로고
현철 선생은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민중극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벌이기 위해서 1923년 동국문화협회를 창설했다.
그러고는 동국문화협회 산하에 ‘항일 이념하에 단합할 수 있는 민중문화의 창출’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배우를 양성하는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했다. ‘배우 양성의 시대 요구’, ‘인격자의 배우를 양성’, ‘사회가 요구하는 배우’ 등 조선배우학교
학제는 그가 연극을 통해 무엇을 꿈꾸고 바랐는지를 잘 보여준다.
조선배우학교는 2년제 학교로 연극과와 영화극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과마다 각각 1년 기한의 보통과와 고등과를 두고
예술개론, 각본연구, 군중심리학, 무대극감상법, 표정체조, 조선가곡, 분장술, 가극실습 등 23개 과목을 가르쳤다. 1925년
40여 명의 학생으로 조선배우학교가 개교했지만 현철 선생은 꿈을 이루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대중의 연극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었다. 당시 배우는 선망받는 직업이 아니었다. 대부분 사람은 배우를 딴따라, 광대로 부르며 무시하고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추구하던 연극이 민중에게는 낯설고 원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현철 선생은 대중이 좋아하는 전통극과 일본에서 들어온 신파극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쓴 「현당극담」에서는 ‘내가 지금
우리 조선에는 연극이 없다고 하면 독자 제위는 나를 욕하고 허언이라 하며 그 연례(演例)로 소위 구극(舊劇)에는 춘향가나
심청가를 들고 신파로는 임성구, 김도산, 김소랑을 들어 내게 육박할 줄 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던 극단을 가지고는 여러
가지 극과학상(劇科學)으로 보아 연극이 아니고 유희이며 체조라고 한다’라며 전통극과 신파극을 강하게 무시했다. 여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서는 자극적 상업 연극을 지양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현철 선생의 생각을 모두가 환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싫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예를 들어
조선배우학교 제1기 학생들이 올린 입센의 ‘인형의 집’과 체호프의 ‘곰’, ‘개’ 공연은 지식층에게 환영받았지만 대다수 사람은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이런 그를 향해 신파연극의 주도자 이기세는 “현철이 주장하는 형태의 연극이 조선사회에서
실현되어야겠지만 민중이 연극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네. 연극을 천대하는 현 사회에서는 시기상조일세”라며 비판했다.
이기세의 말처럼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한 조선배우학교는 개교한 지 반년도 지나지 않아 위기에 빠졌다. 수입이 적어 학교
운영을 위한 재정이 마련되지 않자 현철 선생과 학생 간 마찰이 발생했다. 결국 간극을 좁히지 못했고, 조선배우학교는 2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하지만 현철 선생은 포기하지 않았다. 1927년 조선극장을 경영하며 배우들이 연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고, 민중을
계몽하고자 했다. 1928년에는 동국문화협회를 예술문화협회로 바꾸고 배우양성소를 설립했다. 그나마 다행인것이 이때는
혼자가 아니었다. 뜻을 함께하겠다는 조선배우학교 1기 졸업생이 강사진으로 참여하면서 보다 양질의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여기에 용기와 힘을 얻은 그는 경성예술학원 야학부를 추가로 설립했다. 이후로도 꾸준하게 연극의 발전과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연기자 훈련 강습소인 조선배우학교 제1회 졸업기념 사진(1926)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소녀 가극부 부원 모집 포스터
[출처: 동아일보]
현철의 부단한 노력이 가져온 변화
현철 선생의 노력은 일제강점기 말이 될수록 빛을 잃어갔다. 일제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수탈이 더욱 심해졌고,
한국인은 경제적 빈곤으로 연극에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더불어 일제는 연극을 통해 그들의 뜻에 반하는 행동이 일어날까
경계했다. 그렇게 그가 할 수 있는일은 점점 줄어들었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그렇다고 연극에 대한 그의 생각과
의지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가 끝나자 그는 「한국 급 한국인」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조선배우학교를
다시 열었다. 그러나 분단 아래 혼란스러운 현실로 또다시 좌절되고 말았다. 그래서일까, 현철 선생은 「고우 윤백남에 얽힌 회상」에서
“나의 자서전 제4편에 사면초가라는 한 편이 있다. 이것은 내가 일생을 걸어 나온 행로 중에 예술학원으로부터 조선배우학교,
조선영화제작소로 여러 가지 문예 방면의 사업설계라고 할까. 이러한 것의 실패담을 말한 것이다. 나는 헛된 생에서 헛된 사(死)로
돌아가는 가시밭길에서”라며 자신의 연극 인생을 평가했다. 이를 통해 그가 걸어온 연극의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가 느껴진다.
여기에 “10여 년의 활동 역사를 쌓아온 신파까지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선구자적 의식만 앞세웠던 점은 한계다”, “현철의 연극론
‘문화사업의 급선무로 민중극을 제창하노라’는 그의 독창적인 주창(主唱)의 글이 아니고 일본 구와키 겐요쿠가 쓴 ‘세계 개조의
철학적 기초’라는 글을 요약, 발췌, 인용한 것이다” 등 비판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당시는 일본을 제외하고는 아시아 모든 국가가
연극을 알지 못했다. 그런 현실에서 현철 선생은 일본 연극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가 연극을
통해 무엇을 꿈꿨는지를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연극을 통해 한국인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주역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개벽」에 발표한 ‘소설개요’와 ‘소설연구법’은 우리나라 소설의 이론을 체계화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희곡의 개요’는 희곡의 구조와 서양의 희곡 이론을 소개함으로써 연극이 체계화되는 기초가 되었다. 힘들어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묵묵한 걸어온 그가 있기에 우리의 연극이 끊임없는 발전을 이뤄 지금에 이를 수 있지 않았을까 반문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