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경쟁 시대 속 ‘방학’
우리나라 사교육 실태를 조사한 영국의 한 사회학자는 한국 부모들은
냉전 시대 군비경쟁 같은 사교육 무한 경쟁에 휘말려 있다고
진단했다. 방학 때만이라도 아이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혹시 아이
교육을 포기한 게 아니냐는 주변 시선과 다른 집 애들은 치고
나가는데 집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볼 때 불기둥처럼 치밀어 오르는
‘낙오 공포’를 감당해야 한다. 방학을 핑계로 잠시 편하자고
아이를 느슨하게 풀어줬다가 결국 아이 인생을 망치는 건 아닌지,
꼭 그렇게 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면 빡빡한 방학 시간표를 짜고
나서야 겨우 안심한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교육 전문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미 방학 시간표 정도는 대부분 구상을 마치고 기대 효과를 높이기
위한 정보 수집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학군지를 중심으로 지역별로
대세를 장악한 방학 시간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치동에서 방학 컨설팅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크게 세 가지 경우로 나눠 이야기 해본다.
주도자에 따라 달라지는 방학 시간표
우선 부모 주도로 학교생활의 공백을 사교육으로 채우는 경우다.
만약 필자에게 방학 시간표를 짜라고 하면
한 과목에 집중하는 전략을
쓸 것이다. 이번 방학은 국어, 다음은 수학, 그다음은 영어처럼 공부해야
할 과목을 하나만 정하고 대신 가급적 여유를 주는 방법이다.
여러 과목으로 주의력이 분산되는 것보다 학습 효과가 좋으며, 공부 피로감을
덜어주는 것도 학기 중에 기대할 수 있는 방학 효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중위권 학생인 경우 방학 동안 한 과목에만 집중하면 방학이 공부해도
남는 게 없는 것 같은 공부 허무감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다음은 부모와 아이가 합의해 방학 생활을 설계하는 경우다.
교과 공부보다는
평소 자신의 관심사에 몰입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곤충에 대한 관심을
깊이 파고들어 명문대 진학에 성공한 사례를 분석해 보면 ‘전이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한 사례를 보면 아이가 곤충 관련 영문 잡지를 읽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대화하기 위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또 곤충 관련 통계 자료를 이해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수학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정말 하고 싶은 곤충 공부를 통해 결과적으로 교과 공부에도
전이 효과가 나타나 억지로 교과 공부에 매달린 경우보다 탁월한 학습 효과를 얻게 된 것이다.
특히 진로를 고민하는 경우라면 교과목보다 자신의 평소 관심사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지막은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허용할 필요가 있는 경우다.
먼저 방학 내내 공부와 담을 쌓고 살아도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분명히 말해둔다.
중위권 학생의 상당수와 대부분 하위권 학생에게 필요한 것은 공부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미 차곡차곡 쌓인 공부 스트레스는 아이들을 스트레스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 자극을 갈망하는 상태로 몰아간다. 자신들도 공부 같은 권장 행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문제 행동에 매달리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스트레스 상태에서 빠져나올
기회로 방학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방학 내내 밤낮으로 게임만 하면 중독이 걱정되지만
스트레스 없이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본 경험의 기대 효과가 훨씬 클 것이다.
스트레스가 줄어들면 현실이 보인다. 이제부터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아이의 마음에서 일어나도록 하는 가장 유력한 대안이다.
핵심은 ‘자발적 실천 의지’
이제부터 방학 계획의 성공 확률을 높이는 방법을 알아보자.
비록 방학 시간표대로 생활하지 못해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경우와 온갖 핑계를 대며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모습은 다르다. 전자라면 그래도 조금씩 나아질 가능성이 있지만,
후자라면 파국을 피하기 어렵다. 부모는 지시·통제·관리의 강도를 높이고,
아이는 더욱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잦은 충돌이 생기고 악순환이 반복된다.
진이 빠진 부모는 하루빨리 개학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처지가 되기 십상이다.
“너 때문에 못 살겠다!” 이런 식으로 흔히 아이 탓을 한다. 아이에게 화살을 돌리면 부모는
자기 잘못은 없다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지만 정말 잠시일 뿐 이내 화가 치밀어 오른다.
아이 탓을 잠시 미루고 심리학자들이 발견한 자기 결정성 이론의 도움을 받자.
아이의 자발적 실천 의지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합리적 의사 결정 과정이 필요하다.
우선 방학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적고 나서 해야 할 일을 기록하게 한다.
해야 할 일은 집중력을 발휘해 필요 시간을
줄이는 효과적인 방법을 같이 궁리한다. 방학이라고 어영부영 낭비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방법도 함께 찾아본다.
또 시간에 쫓겨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을 예방하기
위한 방안을 함께 모색해 본다.
의사 결정 과정에서 부모 마음 즉, 할 일만 제대로 하면 굳이 자유를
빼앗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아이가 느껴야 한다. 부모의 욕심이
느껴지는 계획을 세우게 한 뒤 얼마나 지키는지 두고 보겠다는 식의
태도는 처음부터 아이의 실천 의지를 꺾을 뿐이다. 대치동에서
컨설팅할 때의 경험인데 아이가 방학 시간표를 보는 순간의
느낌을 물었다. “이게 어디 사람 사는 거예요? 공부하는 기계지!”
계획은 충실하지만 실천은 빈약할 것이고, 결국 실패로 끝날 방학
시간표임을 강력하게 예측하는 아이의 반응이다. “이렇게만 되면
저도 좋을 것 같아요!” 계획은 다소 부실하지만 실천은 충실할
것이고, 결국 방학 생활이 성공적일 것임을 예측하는 아이의 반응이다.
부모 욕심은 down, 아이 의지는 up
늘 깨닫지만 부모의 욕심과 아이의 실천 의지의 총합은 비슷한 것 같다.
부모가 욕심을 거둬들인 만큼 생긴 빈자리를 아이의 자발적 실천 의지가 채우는 듯하다.
당연히 부모의 욕심이 강할수록 아이의 실천 의지는 위축된다. 아이들의 부족한 실천 의지를
보완하는 방법이 있다. 벌칙을 정할 때 상호 연관성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게임 시간
총량제를 도입해 지금 게임을 많이 하면 앞으로 게임 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화를 내고 반성과 개선을 촉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용돈을 줄인다거나 자유 시간을 제한하는 것처럼 게임과 관련이 없는 벌칙도 효과가 없다.
게임 조금 더 하려다가 오히려 게임 시간이 줄어드는 것처럼 벌칙이 논리적이어야
아이들이 부족한 자제력을 기를 수 있다.
코로나19가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크게 교란했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자연에서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코로나19 후유증을 치유할 것이다. 당장 급한 불도 꺼야
하지만 아이의 삶 전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러기 위해 이번 방학에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볼 이유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