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과거 급제자, 이상설 선생
이상설 선생은 1870년 충북 진천 덕산에서 시골 선비 이행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했기 때문에 7세 때 자식이 없던 친척 동부승지 이용우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상경하였다.
당시 함께 공부했던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은 그를 이렇게 회고했다. “이상설의 총명 탁월한 두뇌와 이해력에는 같은 학우들이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모든 분야의 학문을 거의 독학으로 득달하였는데, 하루는 논리학에 관한 어떤 문제를 반나절이나 풀려다가 (못 풀어서) 낮잠을 자게 되었는데, 꿈 속에서 풀었다고 잠에 깨어서 기뻐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전국이 어수선하던 때 조선의 마지막 과거(갑오문과)에 응시한 선생은 25세에 병과 2등으로 급제했고, 세자의 선생님인 세자시독관을 잠시 역임하였다.
이후 갑오개혁으로 중앙 관제가 개편되자 27세의 나이로 성균관 교수 겸 관장을 지내다가 한성사범학교 교관, 탁지부 재무관 등을 역임하였다.
『수리(數理)』 표지
[출처 : 박영민 외 ‘수학자 이상설이 소개한근대자연과학:「식물학」’ 수학교육 제25집 제2호, 2011.]
『산술신서(算術新書)』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검색(공공누리)]
근대 수학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다
이시영의 회고담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이상설 선생은 과거 급제 이전부터 당시 서울의 수재로 알려진 인물들과 함께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또 육영공원(1886년, 고종23년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명문귀족 공립 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온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 B. Hulbert)와도 친분을 쌓으면서 영어·수학·물리·화학·국제법 등 근대 학문에 대한 깊은 식견을 갖게 되었다.
이상설 선생이 근대적 학문을 본격적으로 익히기 시작한 시기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열기가 고조되고 민권사상이 널리 보급되던 무렵으로 보인다.
특히 선생은 수학과 법률에 큰 관심을 갖고 공부에 매진하였다. 이때 「수리(數理)」라는 수학책을 집필하였다.
「수리」는 청나라로부터 들어온 「수리정온(數理精蘊)」을 연구하여 전통 수학 개념에 서양 수학 내용을 더해 정리한 책이다.
이 밖에도 다양한 분야의 서양 자연과학 서적을 접하면서 독학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책을 남겼다.
서양 자연과학 서적의 중국어 번역본을 공부하고 일부를 정리한 「식물학(植物學)」, 「화학계몽초(化學啓夢抄)」, 일본 도쿄대학에서 번역한 물리학 서적을 참고하여 정리한 「백승호초(百勝胡艸)」 등은 이상설 선생이 자연과학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식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훗날의 기록이지만 영국인 베델(E. T. Bethell)이 책임을 맡고 있던 「대한매일신보」 1905년 11월 24일 ‘찬(讚) 이참찬 기사’에서는 선생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이상설 씨는 대한에서 학문으로 최정상급이니, 일찍이 학문적 소양이 비길 바 없이 뛰어나서 동서 학문을 독파했는데, 성리 문장 외에 특히 정치·법률·수학 등의 학문이 부강의 발판이 되는 학문임을 일찍이 깨달았다.”
1895년 고종은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고 한성사범학교 관제, 외국어학교 관제, 성균관 관제, 소학교령을 공표하였다.
이상설 선생은 27세의 나이임에도 비상한 능력을 인정 받아 새롭게 직제가 개편된 성균관의 교수 겸 관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그동안 관심을 갖고 공부해온 신학문의 식견을 바탕으로 성균관의 교육과정에 국내에서는 최초로 중등 과정에 서양 수학을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였다.
당시 학부 편집국장 이규환은 그의 신학문과 수학에 대한 식견을 알아보고 「산술신서(算術新書)」 편찬을 부탁하였다. 「산술신서」는 일본에서 서양 수학책을 편집해 발행한 「근세산술(近世算術)」 상·중·하권을 이상설 선생이 한글로 번역하며 설명을 붙이고 새롭게 편집해 발간한 것이다. 이 책은 소학교용이 아니라 교사를 배출하는 한성사범학교에서 예비 교사 교육용으로 개발된 사범학교 및 중학교용 수학 교과서다. 당시 기준으로 적지 않은 1,000부를 발행하였고, 1908년에 수정판도 출간하였다.
이 책은 국한문 혼용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해법 과정에서 가로쓰기를 지향하는 등 당시로써는 가장 근대적인 수학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5월 일제는 조선 정부를 압박하여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을 체결하였다.
대한시설강령은 한국을 일본의 식량과 원료 공급지로 개편하고 일본인의 이민을 대대적으로 실시하기 위한 제도적 발판으로 조선의 농업과 황무지 개간권 장악을 명시하고 있었다.
이상설 선생은 유생, 전직 관료들과 함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상소 이후 일제의 황무지 약탈을 저지하기 위한 단체로 ‘보안회’가 활동하였고,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언론도 대대적으로 일제의 불법행위를 규탄하는 여론을 형성하였다.
결국, 일제는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은 이상설 선생의 활동을 눈여겨보고 1905년 11월 의정부 참찬(정2품 관직)에 발탁하였다.
러·일전쟁 후 을사늑약 체결을 위해 일제가 공작을 벌이던 때로, 선생은 조약 체결 저지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일본군이 가로막아 회의에 참석조차 할 수 없었기에 비통한 마음에 땅에 머리를 부딪혀 자결을 시도했으나 그를 에워싼 시민들에게 구원되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그는 관직을 버리고 조약 파기를 위한 거국 항쟁을 전개하던 중 이회영, 이동녕 등과 논의 끝에 국외 망명을 결정하였다.
국외에서 신학문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으로 국권 회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상설 선생은 북간도 중에서도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던 연길현 용정촌에 들어가 1906년 8월 항일 근대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였다.
학교 부지와 건물 매입은 충북 진천의 자기 소유 전답과 서울의 재산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충당하였다.
서전서숙은 중학교와 소학교 과정의 신학문을 교육하면서 학생들에게 근대 의식과 민족 독립사상을 가르쳤다.
선생은 서전서숙의 숙장(교장)을 맡아 직접 수학을 가르쳤다.
고종은 1907년 4월 비밀리에 이상설 선생에게 특사 파견 밀지를 내렸다.
선생이 특사의 정사(正使)였고, 이준
*과 이위종은 부사(副使)였다.
1907년 6월 세 특사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만국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 수석 대표 넬리도프 백작을 비롯하여 미국과 프랑스, 독일 위원 등을 만나 회의 참석을 위한 협조를 구하고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밝히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때 이상설 선생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하여 각국 위원에게 발송하였다.
“만국평화회의의 대표 자격으로 ··· 우리나라의 독립이 여러 나라에 의해 보장되고 승인되었음을 각국 대표 여러분에게 알립니다. 저는 의정부 참찬으로 국제법을 무시하고 외교 관계를 강제로 단절하고자 한 일본의 음모를 목도하였습니다. ··· 대한제국과 우방국과의 단절은 결단코 대한제국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대표 여러분의 호의적 중재를 간청하면서 여러분에게 공고하는 바입니다.”
특사들의 회의 참석은 이미 강대국으로 성장한 일제의 방해 공작과 열강의 외교적 외면으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만국평화회의 기간 특사들의 활동은 각국 대표의 수행원들과 이름난 언론인, 기자단들이 모두 참여하는 신문기자단 국제협회에 조선의 현실과 일제의 부당한 침략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The-K 매거진」 2020년 7월호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 수록
서전서숙 옛터기념비
[출처 : KBS 다큐멘터리 ‘이상설 불꽃의 시간’]
눈 감는 날까지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던 애국지사의 삶
이상설 선생은 1909년 4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다. 선생이 이곳으로 온 것은 중국과 조선, 러시아의 접경지대이면서 북간도와 함께 의병 활동이 활발하여 독립운동 기지의 최적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상설 선생은 이곳을 중심으로 의병 조직인 ‘십삼도의군’, 항일단체인 ‘성명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후 일제의 방해로 조직이 해산되자 1911년 ‘권업회’ 창설을 주도하였다. 권업회는 표면적으로 상공업 등의 실업 활동을 권장하면서 민족교육과 한인 사회의 정치적·경제적 지위 향상을 도모하는 활동을 내세웠지만,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한 광복군 양성을 목적에 둔 단체였다.
1914년 러시아가 일제와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식이 들리자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은 권업회를 중심으로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높이고 광복군의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한광복군 정부’를 수립하였다.
대한광복군 정부는 연해주를 비롯한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국외에서 최초로 수립한 망명정부였다.
이상설 선생은 망명정부의 정도령(正都領)으로 선출되어 대한광복군 정부를 운영하는 실질적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는 일본과 동맹을 맺고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선인 주요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추방하였다.
이로써 대한광복군 정부는 치명적 타격을 입고 사실상 해체되고 말았다. 선생은 1915년 중국 상하이로 이동하여 ‘신한혁명당’을 창설, 고종의 망명을 통한 망명 정부 수립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연이은 독립운동으로 병석에 눕게 되고, 1916년 초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근대 교육과 국외 독립운동의 선구자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의거 이전 연해주 조선인들과 만나 자신의 국권 회복 활동과 동양 평화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때 이상설 선생을 여러 차례 만나기도 하였다.
의거 이후 안중근 의사의 재판 기록을 보면 그가 이상설 선생을 평가한 기록이 여러 번 등장한다.
“이상설은 재사(才士)이며 법률에 밝고 수학에 통달하며 영어·프랑스어·일어에 능통하다.
세계 대세에 능통해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었다. 애국심이 강해 교육 발달을 도모하고 국가 백년대계를 세우는 자는 이 사람일 것이다.
또 동양 평화주의를 가지는 데 이 사람과 같은 친절한 마음을 가진 자는 드물다.”
헤이그 특사로서의 이상설, 대한광복군 정부의 대표 이상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이상설 선생은 조선 말부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한반도와 연해주, 중국을 넘나들며 전방위적으로 국권 회복을 위해 활동한 독립운동가로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신학문을 수용하고, 근대 수학 교육을 정착시킨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상을 추서했다.
이제 이상설을 진정한 독립운동가로 평가할 때 세계 대세를 간파하고 국가 백년대계를 염두에 둔 뒤 근대 수학 교육을 도입한 개척자로서의 모습도 새롭게 조명해야 할 것이다.
이상설 선생 유허비
(러시아 우수리스크)
[출처 : 세계한민족문화대전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