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비디오 샹들리에 No.1’, 1989, 가변 크기, 텔레스타 흑백 CRT TV 모니터 38대, 크리스마스 전구,
영상선, 분배기, 1-채널 비디오, 컬러, 무성, LD. (*출처: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 ‘비디오 샹들리에 No.1’, 1989, 가변 크기, 텔레스타 흑백 CRT TV 모니터 38대, 크리스마스 전구,
영상선, 분배기, 1-채널 비디오, 컬러, 무성, LD. (*출처: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은 20세기 현대 예술을 이끈 혁신적인 인물로, 비디오아트의 창시자이자 행위예술의 선구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과학기술과 예술을 결합해 새로운 예술 장르를 개척했습니다. 그의 독창적인
실험과 파격적인 퍼포먼스는 세계 예술사에 길이 남을 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백남준의 예술
세계는 20세기 예술의 지형을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글 황인희 역사 칼럼니스트
대학교 졸업 후 줄곧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월간 「샘터」 편집장을 끝으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다수의 책을 저술했고, 현재 역사 칼럼니스트, 인문 여행 작가로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사진 및 자료 제공: 백남준아트센터, 경기도 멀티미디어 자료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서울기록원
*사진 및 자료 제공: 백남준아트센터, 경기도 멀티미디어 자료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서울기록원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이자 파격적 예술가
1960년, 독일 쾰른의 한 스튜디오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동양에서 온 젊은 예술가가 쇼팽의
피아노곡을 연주하던 중, 갑자기 무대 위의 피아노를 도끼로 부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객석에
있던 작곡가 존 케이지에게 달려가 그의 넥타이를 자르고 무대를 떠났습니다. 백남준의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 콘서트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당시 백남준은 관객들에게 충격을 안겨주며 카타르시스를
전달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백남준의 창의적인 실험과 파격적인 행보는 계속되었고, 세계는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텔레비전과 영상매체를 예술에 접목해 현대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
예술가로, ‘비디오아트’의 창시자이자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빌헬름을 추모하는 백남준, 만프레드 레베, ‘장 피에르
빌헬름에 대한 경의’, 1978, 25.4×20.3cm, 흑백사진
(*출처: 백남준아트센터)
빌헬름을 추모하는 백남준, 만프레드 레베, ‘장 피에르
빌헬름에 대한 경의’, 1978, 25.4×20.3cm, 흑백사진
(*출처: 백남준아트센터)
파격과 혁신을 향한 예술적 여정
백남준은 재벌가의 아들로 태어나 당시 접하기 힘든 피아노와 전축을 비롯한 문화적 자산을 즐기며 성장했고,
저명한 음악가에게 피아노 연주와 작곡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그는 아놀드 쇤베르크의 전위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이 경험은 그가 음악의 틀을 깨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백남준은 이후 행위음악을 작곡하고
퍼포먼스를 통해 이를 표현하는 독특한 예술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56년 백남준은 일본 도쿄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대학교의 철학과에 입학해 음악학과
미술사를 공부했습니다. 독일 유학 시절 그는 존 케이지, 조지 마치우나스 등의 영향으로 행위예술을 접하게
되었고, 이후 미국 뉴욕과 독일을 오가며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백남준은 1964년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비디오를 사용한 작품 활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B급 예술가로 평가받았습니다.
1967년 백남준은 첼리스트 샬럿 무어먼과 함께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공연을 펼쳤습니다. 샬럿이 웃통을 벗은
채 공연에 참여하면서 두 사람은 ‘대중의 품위를 공공연히 모욕한 예술’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술적 검열의 한계에 대한 법적 논의를 촉발했습니다.
▲백남준과 이경성의 만남. 뉴욕에서
▲1984년 서울시청을 방문한 백남준(오른쪽에서 두 번째)
▲ 대한민국역사박물관_백남준의 예술 세계 특별 우표
▲ 서울올림픽을 기념하는 비디오 타워 작품 ‘다다익선’
▲백남준과 이경성의 만남. 뉴욕에서
▲1984년 서울시청을 방문한 백남준(오른쪽에서 두 번째)
▲ 대한민국역사박물관_백남준의 예술 세계 특별 우표
▲서울올림픽을 기념하는 비디오 타워 작품 ‘다다익선’
예술과 과학을 넘나든 혁신의 예술가
1960년대 후반, 백남준은 비디오아트의 영역을 개척하며 텔레비전을 표현 매체로 활용한 작업을 선보였습니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계기는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서였습니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생중계 쇼로, 훗날 인공위성 예술의 대표적 사례로 자리 잡았습니다.
1986년 백남준은 동양과 서양은 만날 수 없다던 러디어드 키플링*의 말을 반박하며 미국, 일본, 한국을 위성으로
동시 연결한 ‘바이 바이 키플링’으로 다시 한번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1988년 백남준은 서울올림픽을 기념해
비디오 타워 작품 ‘다다익선’을 제작하며 국내외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는 국립현대미술관장 이경성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한국 관객들에게 비디오아트를 소개하는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습니다.
*『정글북』의 작가로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
▲백남준 탄생 90주년 특별전 《백남준의 보고서 1968-1979》 전시전경, 백남준, 〈걸리버〉, 2001
(*출처: 좌우 사진 모두 백남준아트센터 소장품 ⓒ Nam June Paik Estate.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 〈TV 첼로〉, 2002
▲백남준 탄생 90주년 특별전 《백남준의 보고서 1968-1979》 전시전경, 백남준, 〈걸리버〉, 2001
(*출처: 좌우 사진 모두 백남준아트센터 소장품 ⓒ Nam June Paik Estate.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 〈TV 첼로〉, 2002
혁신적 예술가가 남긴 세계 예술사의 유산
백남준의 창의성과 독보적인 예술 성과는 수많은 수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독일관 작가로 한스 하케와 공동 초대되어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뒤, 1995년 후쿠오카 문화상, 1996년 제5회
호암상 예술 부문, 1997년 미국 뉴욕 괴테연구소 수여 괴테상을 연달아 수상했습니다. 1998년 현대 예술과
비디오를 접목한 공로로 교토상, 1999년 마이애미 예술가상, 2000년 금관문화훈장도 받았습니다. 또 1996년
독일 「포쿠스」가 선정한 올해의 100대 예술가와 1997년 「카피탈」이 선정한 세계의 작가 100인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백남준은 1996년 뇌졸중으로 왼쪽 신경이 마비되면서 거동이 불편해졌지만, 그럼에도 1997년 독일 비디오
조각전, 1998년 서울판화미술제, 2000년 구겐하임 회고전, 2006년 무빙타임전 등 예술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백남준은 단순히 ‘괴짜’나 ‘기인’이 아닙니다. 그가 개척하고 틀을 세운 퍼포먼스 예술과 비디오아트는 현대
예술에서 중요한 분야로 자리 잡았습니다.
백남준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포스트모더니즘 예술가 중 가장 도발적이고 혁신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업적은 세계 예술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는 점에 모두가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