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환자를 위한 최초의 전문 병원 ‘보구여관’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상처를 입어 외과적 치료가 필요했던
명성황후의 총신 민영익을 서구 의사가 치료하면서 서구 의학에
대한 황실의 관심이 높아졌다. 그 결과 황실은 1885년 근대적 병원인 제중원(옛 광혜원)을 설치했다.
서구 의료 혜택을 받고자 하는 여성 환자가 늘자, 서구식 병원이
곳곳에 생겨났다. 조선 조정도 미국의 장로교와 감리교의
인도주의적인 의료 선교 활동을 인정하고 협조하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외국 여성을 위해 일할 여성 의료인을
모집해 파견했고, 여성 의사 메타 하워드(Meta Howard)가
1888년 여성 전용 병원을 개원해 조선 여성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조선 조정도 이에 부응해 ‘보구여관(普救女館)’이라는
현판을 사액하기도 했다.
1889년 2대 원장으로 의료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가 보구여관을 운영하면서 이곳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로제타는 치료뿐 아니라 조선에서 의료 체계의
지속 가능성을 확대하기 위해 의학 교육을 했다. 이는 로제타가
홀로 진단·처방·간호 등을 맡아야 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방안이기도 했다. 간호 교육의 필요성이 시급하던
이 시기에 조선에 파견된 간호 선교사가 바로 마가렛 에드먼즈(Margaret J. Edmund) 선생이다.
이화학당 내 설립된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 보구여관, 1887년 메타 하워드 의사의 된쪽 마루에 여자 조수, 환자, 오른쪽 마당에 기수가 서 있다.
[출처:강희재 건축사무소 홈페이지(gangheejae.com)]
나이팅게일을 꿈꾼 미국인 간호사의 사명
그는 간호학교 설립이라는 특별한 과제를 안고 파견되었다.
1871년 캐나다 온타리오 스미스폴스에서 12남매 중 8번째로
태어났다. 에드먼즈 선생은 ‘사랑’과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따뜻한 천성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1850년대에 일어난 크리미아
전쟁 당시 야전병원에서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부상을
입은 병사들을 헌신적으로 간호한 나이팅게일의 이야기를
접하고 간호사의 꿈을 갖게 되었다.
에드먼즈 선생이 간호학교에 입학한 것은 스물한 살 되던
1892년이다. 미시간대학교 대학병원이 세운 간호학교에서
2년 과정을 마치고 1894년 2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 이후
1895년부터 조선에 파견되기 전인 1902년까지 7년간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간호원으로 일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이때 배운 의료 지식과 간호사로서의 경험은 조선에서
간호학교를 출범시키는 데 더없이 소중한 자신이 되었다.
에드먼즈 선생은 조선에 먼저 파견된 의사 커틀러의
강연을 통해 조선에서 간호사 양성을 책임질 사람이 절실
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길을 선택했다.
마가렛 에드먼즈 선생
[출처 : 아메리칸 저널오브 너싱(AJN) 1096년 6월호]
낯선 땅에서 일군 간호 교육의 결실
1903년 3월 조선에 도착한 에드먼즈 선생은 바로 간호학교를
열 수 없었다. 한국어를 몰랐을뿐더러 수업에 필요한
교구와 교재도 없었고, 그를 도와줄 동료도 없었다. 결국 조선의
첫 간호학교는 1903년 12월 말에 이르러 문을 열었다.
첫 지원자는 고작 6명이었다. 에드먼즈 선생은 간호와 관련한
것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도맡아 해야 했다. 간호사의
의복을 만드는 일도, 간호원이라는 명칭을 정하는 것도
모두 그가 주도한 일이다. 당시 간호사 의복은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한 옷일 뿐 아니라 전문 직종임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간호원이란 용어도 당시 상황에서 남다른 면이 있었다. 간호의
영역은 조선의 사회적 여건 때문에 여성의 직업으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본이나 중국에서 사용하던
간호라는 말에 여인을 뜻하는 어휘를 사용해도 되었지만
에드먼즈 선생은 ‘원’이라는 중립적 개념을 선택했다.
이는 당시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한 감리교 선교사
들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887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 보구여관 앞에 에드먼즈 간호원장(가운데 흰옷)과 한국인 학생 간호원들이 환자들과 함께 서 있다.(1904년)
[출처 : 대한간호협회 ‘한국근대 간호역사 화보집’]
더군다나 에드먼즈 선생이 조선에서 활동할 때는 러·일전쟁(1904~1905),
을사늑약(1905), 정미조약(1907) 등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면서 일본의 조선 지배가 현실화하여가던
혼란기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에드먼즈 선생은 간호사로의
사명과 역할에 충실했다. 특히 정미조약 체결 후 군대가 강제
해산되어 서울 시가지에서 조선 군인과 일본 군인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을 때 에드먼즈 선생과 그가 길러낸 간호사,
그리고 자원한 조선인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다친 조선 군인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이 일을 통해 에드먼즈 선생이 조선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인도주의적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한국 간호 역량을 키우고 간호 교육체계를 확립하다
1906년 제중원을 인수한 장로교에서는 현대식 건물을 마련해
남대문에서 기부자의 이름을 붙인 세브란스병원을 개원했다.
이 병원에서도 간호학교를 설립했다. 이런 변화는
에드먼즈 선생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감리교와 장로교가
각기 간호학교를 별도로 운영했지만, 교육 공간과 교수진을
공유하는 협력체계를 구축했다. 열악한 의료 교육
환경에서 당연한 조치였고, 이런 구조를 만든 것이 에드먼즈
선생이었다. 그는 의료적 경험, 조선에서의 독특한 경험을
바탕으로 두 학교가 서로를 성장시키는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 조선인들은 그가 근무하는 병원과 학교에 가
면 근대적 의식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단순히 간호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것
을 넘어 사회적 가치를 교육하고 그런 인식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더불어 그는 교육을 통해 여성들이 사회적 주체로서 살아가고
가족과 이웃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존재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려 했다.
그는 조선의 간호 역량을 향상하기 위한 일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적국이지만, 앞선 의료 체계를 갖춘 일본의
병원을 돌아보게 해 조선의 의료 체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1908년 최초의 간호 협회를 탄생시켰고,
1909년 첫 한글 간호 교과서를 발행하는 등의 활동도 했다.
그는 1908년 장로교 출신 선교사와 캐나다에서 결혼한 후
장로교 선교 구역인 목포로 돌아왔다가 1928년 남편의 건강
악화로 한국을 떠날 때까지 한국의 간호 교육과 여성들의
건강 증진을 위해 헌신했다.
에드먼즈 선생은 한국을 떠난 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무어스빌에서 생활하다 1945년 10월 12일 별세했다. 2015년
한국 정부는 그의 역사적 공로를 치하하며 대한민국 국민
훈장 동백장을 추서했다.
개화사상을 가진 신여성, 이정애 선생의 꿈과 열정
에드먼즈 선생이 외국인으로서 한국의 의료 체계와 여성들의
삶을 증진했다면, 한국인으로서 그와 같은 일을 한 이가
이정애 선생이다. 그는 1901년 한국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배재학당을 졸업해 개화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열 살이
되던 1910년에는 선교사가 개교한 이화학당에 진학했다.
민족의식이 고양된 이화학당 학생들은 3·1운동 당시 적극적인
활동을 했는데, 이정애 선생 역시 그 범주 안에 있었다.
전국에 발송할 문서를 제작하는 일에 참여하고, 옥고를
치르는 동료와 교사들을 뒷바라지하는 일을 열심히 하였다.
이정애 선생
[출처 : 한국간호사협회]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 교사와 기숙사
[출처 : 연세대학교 간호대학]
이정애 선생은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고 1925년 당시에는 늦은 나이인 25세에 결혼을 했다. 그는 딸을 낳고 가정을
꾸려나갔지만, 근대적 의식을 가진 여성으로서 전통적 가치를
고수하는 남편과의 관계는 나빠져만 갔다. 이정애 선생은
당시로서는 선택하기 쉽지 않은 이혼을 결심하고 실행한다.
이 때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으로 힘겨워하던 그를
이끌어준 이가 있었다. 이화학당 재학 시절 2년 선배로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귀국한 김활란이었다. 김활란은
1927년 태평양문제연구회에 참석하기 위해 하와이를 방문했을
당시 확보한 하와이 간호대학 장학 혜택을 이정애
선생에게 전했고 이정애 선생은 1928년 망설임 없이 하와이
퀸스 병원(Queen’s Hotspital)의 간호사 양성소로 유학을
떠난다. 체계가 분명하고 전문적 학문과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교육 공간이었다.
해외 선진 교육을 받고 간호 철학의 기틀을 세우다
낯선 의학 공부가 쉽지 않았지만 성실함과 꼼꼼함으로 무사히
학업을 완수한 이정애 선생은 해외의 간호 전문 교육
기관을 수료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귀국 후 1931년부터는
세브란스병원에서 간호사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병원에서의 생활은 간호사의 역할에 국한되지 않았다. 부
간호원장으로 부임해 간호와 간호 교육에 매진했다. 특히
자신이 배운 간호학 체계를 한국 간호사들에게 전수하는
역할도 맡아야 했다. 그것은 그가 해야 할 당연한 시대적 의무였다.
그가 간호 교육을 진행했다는 것은 서양 선교사가
주도하던 의료 교육이 한국인으로 전환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강조한 간호사로서 가져야 할 첫 번째 덕목은 책임감
이었고, 공사(公私)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 공동선을 위해 개인적 욕구를 절제하고 희생해
자신에 맡겨진 사명을 충실히 해야지만 보람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이를 위해 간호사들은 인내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당시 간호 교육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
암 투병 중에도 잃지 않은 간호 교육을 향한 열정
1937년에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제국주의적 팽창을
가속했다. 그 시기에 위기를 맞은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학당의
교명이 1925년 변경됨)의 교수로 재직 중인 김활란의
요청으로 기숙사 사감으로 생활하게 된다. 1943년 암
판정을 받고 수술까지 했지만 완치되지 않아 투병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광복을 맞아 김활란과 함께 여성 교육의
재건에 동참한다.
이정애 선생은 1948년 김활란의 배려로 치료와 유학을 겸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이곳에서 치료에만 전념하지 않고
간호행정학을 배우고 1949년에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킨 후 간호학과를 설치하는 데 힘을 보탰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해 또다시 어려움을 겪었지만,
1951년 9월부터 1952년 휴전되기까지 임시 학교를 얻어 운영할
정도로 간호 교육 및 여성 교육에 다시 열정을 쏟는다.
그런 그의 노력을 인정 받아 1953년에는 보건부로부터 간호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열정에 비해 몸은 점점 쇠약해져만 갔다. 지병인 암이
삶의 시간을 옥죄었다. 1954년 5월 9일, 이정애 선생은
친구들의 뜨거운 눈물 속에 생을 마감했다. 한국 간호 교육의
1세대 주역이 이 땅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여성의 인권 보호와 건강, 교육의 권리를 함께 일군 간호 교육자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후세대들이 높은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편안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혁명에 가까운 도전과 상상을 뛰어넘는 열정으로 일궈낸
이들의 이야기는 혼란했던 시대의 우리 사회가 건강
하게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한 작은 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