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에서 세상이라는 무대로, 하모니카와 함께
성탄절을 한 달여 앞둔 평일 오후, 대구 남구의 글로벌교육재단 구구삼삼 행복대학 교육실에서 캐럴 ‘징글벨’이 흘러나온다. 60~70대 퇴직 교직원 및 공무원으로 구성된 대경상록하모니카봉사단 단원들이 내는 하모니카 소리다. 일주일에 두 번, 단원들은 이곳에서 하모니카를 배우고, 또 서로 합을 맞춘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덕분에 봉사 단원들의 연주 실력은 단연 프로급이다. 캐럴뿐 아니라 가곡, 트로트 등 장르와 상관없이 하모니카만 있으면 무엇이든 연주할 수 있다. 독주에 적합한 트레몰로 하모니카부터 반주에 쓰는 코드 하모니카까지, 음악에 따라 종류를 바꿔 연주하기도 한다. 연습이 끝났는가 싶다가도 “한 곡만 더 하자”라며 소리 끝을 잡아 붙드는 걸 보면, 그들이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봉사단의 연주가 처음 시작된 곳은 공무원연금공단 대구지부에서 운영하는 하모니카 수업에서였다. 하모니카를 배울수록 ‘더 많은 사람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도 커졌고, 대구지부 아카데미 상록봉사단에서 하모니카 봉사단을 조직해 영남대학교병원 호스피스 병동과 정신과 병동에서 처음 연주 봉사한 것을 시작으로 점차 확대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하모니카는 봉사에 최적화된 악기예요. 작고 가벼워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거든요. 길을 걷다가도 하모니카만 꺼내면 그곳이 바로 무대가 돼요. 한번은 봉사 단원들과 여행을 갔다가 거리에서 즉흥연주를 선보이기도 했어요. 아마 혼자라면 엄두도 못 냈을 거예요. 하지만 단원들이 함께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용기를 낼 수 있어요.”
교사 출신이라는 점도 이들의 활동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 ‘교단’이라는 무대에 오른 경험, ‘학생’이라는 관객과 호흡해 본 경험이 든든한 밑천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류순환 단원은 특히 전달력에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세상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은 많아요.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남에게 전달하는 법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생 아이들에게 아는 것, 가진 것을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 음악을 전달하는 법도 자연스레 터득한 것 같아요. 매일 학교로 출근하고 수업을 연구하던 습관이 몸에 밴 덕분인지 단원 중에 연습을 게을리하는 사람도 없고요. 교사로 일한 것만으로도 봉사하며 사는 데 필요한 기술을 다 터득한 것 같습니다.”
하모니카로 연결하고, 치유하는 나와 당신과 세상
봉사단 결성 후 단원들은 전국 곳곳으로 달려갔다. 대구 지역의 호스피스 병동, 요양병원, 경로당, 복지관, 전국의 축제 및 행사장 등이 그들의 주 무대였다. 음악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았지만, 특히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에게 음악을 선물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꼈다. 홍정근 단원은 “봉사 단원들은 4명씩 4개 조로 나눠 정기적으로 호스피스 병동을 찾아 환자와 보호자에게 하모니카 연주를 해드리고 있어요. 생일을 맞은 환자분께 생일 축하 연주도 해드리고요. 오늘이 누군가의 생애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절대 소홀히 연주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시인으로 활동하는 윤창환(시명 윤한걸) 단원은 “한번은 합주가 끝나고 보호자가 찾아와 ‘고맙다’라며 연신 인사를 하시더라고요. 미동조차 없던 아버지가 음악 소리에 맞춰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감격한 것이죠. 좋아하는 곡이라면서 신청 곡을 적어 보내주는 환자도 많고요. 시를 쓰면서 항상 문학이 지닌 힘을 생각하곤 하는데, 하모니카 연주를 하면서 음악이 지닌 치유력 또한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봉사단의 연주가 치유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실력이 뒷받침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현 단원이 지도교수로 수년째 단원들의 실력을 키워준 덕분이기도 하다. 김대현 단원은 정년퇴임을 한 이래 하모니카 지도 및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전국의 하모니카 연주 봉사단 중 우리 봉사단의 실력이 단연 최고”라고 자부한다. 실제로 단원들은 2019년 전국한마음연주대회 우수상을 받으며 대내외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단원들에게 하모니카 소리처럼 아름다운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연습실이 문을 닫고, 공연 요청도 뚝 끊겨 속앓이를 해야 했다. 하모니카는 마스크를 내리고 연주해야 하기 때문에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그러나 단원들은 위기 상황에서도 항상 기회를 마련했다. 실내 대신 마을 뒷산 정자에서 연습하며 실력을 갈고닦았고, 산에 올라 연주할 때는 ‘산속 작은 음악회’, 아파트 단지 내 정자에서는 ‘주민들과 함께하는 음악회’라 여기며 최선을 다했다. 한번은 공원에 나온 주민이 ‘정말 잘 들었다’라며
커피를 13잔이나 사 온 일도 있었다. 그렇게 시민의 삶 가까이에서 음악을 들려주며 코로나19로 지친 마음을 위로했다. 다행히 올 초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되고, 윤종현 단원의 노력으로 글로벌교육재단 내 연습 공간을 확보하게 되면서 봉사단의 활동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합주’라서 더 즐겁고 따뜻하다, 더 행복하다
봉사하는 즐거움은 크다. 함께 봉사하는 즐거움은 더욱더 크다. ‘하모니카’와 ‘봉사’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둔 봉사 단원들은 즐거운 일을 함께하는 동료이자 평생 친구가 되었다. 김경숙 단원은 “하루라도 연습을 거르면 ‘무슨 일 있느냐?’, ‘어디가 아프냐?’ 묻는 탓에 전화기에 불이 날 정도”라며 “현직에 있을 때는 잘 모르고 지냈는데, 퇴직 후 서로 살뜰히 챙기는 사이가 되었다”라고 자랑한다. 노정화 단원은 남편의 병간호로 바쁜 와중에도 연습과 봉사에 참여하면서도 오히려 이곳에서 힘을 얻어가고, 윤옥숙 단원 또한 총무로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다. 또 함께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도전해 볼 용기도 얻을 수 있다. 박노보 단장도 “봉사는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함께할 때 더 큰 효과를 낸다”라고 말한다.
“교사였던 아버지께서 퇴직 후 세월을 그냥 흘려보내시는 걸 보며 참 안타까웠어요. ‘나는 퇴직 후 나의 재능을 지역사회에 환원하며 살아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래서 현직에 있을 때부터 20여 개의 자격증을 취득하며 인생 2막을 성실히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2012년 2월, 대구대곡초등학교에서 교장으로 퇴직한 후 뭐든 가리지 않고 봉사 활동을 했죠. 하지만 혼자 하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어요. 결국 뜻을 같이하는 퇴임 교장 10여 명과 ‘반딧불봉사클럽’ 을 결성하고, 문해 교육을 비롯해 어르신을 위한 봉사 프로그램을 기획· 진행했죠. 그랬더니 더욱 즐겁게 봉사에 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권경란, 안송미 단원도 박노보 단장과 문해 교육을 함께하면서 “은행에서 내미는 서류에 생전 처음 내 손으로 내 이름을 적었다”, “까막눈이라고 괄시하던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라며 자랑하는 어르신들을 지켜보며 봉사가 얼마나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지 깨달았다. 또 어떤 활동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시기, 취미로 하모니카를 배운 것이 새로운 봉사의 물꼬를 터주었다. 그리고 하모니카 봉사단으로서 바쁜 만큼 행복한 날들을 이어갔다.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봉사의 힘
봉사가 좋은 또 다른 이유는 ‘내 인생이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있다’라는 확신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퇴직 후 삶은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그림이 완전히 달라진다. 내가 열심히 살고자 노력하면 다양하고 아름다운 그림이, 현실에 안주하며 시간을 낭비하면 단조로운 그림이 그려진다는 말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단원들은 하모니카를 붓처럼 쥐고 삶을 아름답게 그려 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봉사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일 같지만 결국 자신이 가장 행복해지는 일이에요. 우리가 봉사하는 이유도 행복해지고 싶어서고요. ‘봉사단’이라는 한 울타리 안에 있다는 소속감, 국가와 사회로부터 받은 이익을 다시 돌려드린다는 뿌듯함, 사회인으로서 세상에 내 이름을 당당히 꺼내 보인다는 자부심, 이 모든 감정이 결국 행복으로 귀결되니까요. 앞으로도 우리 대경상록하모니카봉사단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지역사회 발전과 올바른 노인상 정립을 위해 노력할 겁니다. 그러니 계속 지켜봐 주시고, 우리 연주를 들어주십시오.” 우리가 크리스마스에 부르는 캐럴은 본래 춤곡이다. 혼자가 아닌 함께 어울려 즐기는 노래다. 그래서일까? 이 노래를 ‘조화(harmony)’라는 말을 품은 악기, ‘하모니카’로 들으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대경상록하모니카봉사단 단원들의 합주로 듣는다면 절로 몸이 들썩여질지도 모른다. 올 연말 세상 곳곳에서 이들의 연주가 아름답게 울려 퍼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