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 영어교육, 정말 효과가 있을까?
가끔 부모들 사이에서 마치 명언처럼 회자되는 문구가 있다. 다름 아닌 “수학을 포기하면 대학을 포기하는 것이고 영어를 포기하면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자녀들이 행여나 경쟁에서 뒤처질까 염려스러운 몇몇 부모들은 일찌감치 아이들에게 조기교육을 한다. 하지만 노경희 교수는 이 같은 조기 영어교육의 효과에 물음표를 던진다.
“아이들이 영어를 배우는 이유 중 하나는 미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경쟁력을 키우려면 영어보다 자기 분야의 실력을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노경희 교수는 “유아기의 인지발달 수준을 고려하면 익힐 수 있는 영어는 매우 제한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많은 학부모가 자녀 영어교육에 고비용·저효율 방법을 택한다.
“자녀 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해도 괜찮다는 부모들도 있지만, 거기 쏟아붓는 아이들의 시간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기 영어교육을 받아 영어를 잘하던 아이들이 고등학교 진학 후에 갑자기 영어 성적이 떨어지는 사례들이 꽤 많습니다.
생활영어는 잘했지만, 높은 수준의 사고력을 필요로 하는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는 거지요.”
그는 시중에서 시행하는 조기 영어교육법의 효과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원어민이 수업 하더라도 말하기에 집중된 영어교육은 휘발성이 강해 잊어버리기 쉽고, 철자와 소리 사이의 규칙인 파닉스(phonics) 교육은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에서도 수십 년 동안 교육 효과에 대한 논란이 있는만큼 예외가 많다.
진정한 영어 경쟁력은 콘텐츠 영어로부터 나온다
아이들이 궁극적으로 영어를 잘하려면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외국어가 아닌 제2 언어로 영어를 익혀야 하는 영어권 이민자라면 한 살이라도 더 빨리 영어를 접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
일상생활을 영어로 해야 하므로 영어 능력이 인지발달에 매우 큰 영향을 주어서다. 하지만 국내 환경에서는 ‘영어는 빨리 배울수록 좋다’는 말이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초등학교 입학 이전인 유아기에는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량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생각 머리가 자라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비용을 투자해도 효과는 미미합니다. 차라리 그 시간과 비용을 한국어 독서나 사고력을 키우는 데 투자하고,
영어는 가성비가 좋은 시기에 배우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콘텐츠 영어 능력의 뿌리는 모국어 능력에 있다. 노경희 교수는 “이중언어 학자들에 따르면 모국어 읽기 능력은 외국어 읽기 능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전한다.
생각이나 정보를 처리하는 뇌의 부위가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어 독해력은 영어를 학습하는 데 좋은 자산이 된다. 한국어 책을 읽으면서 쌓은 어휘력은 물론 개념 지식과 추론 능력, 사고력 등은 영어 읽기에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한국어 독서를 통해 ‘민주주의’의 개념을 이미 머릿속에 저장한 아이들은 영어 단어 ‘Democracy’를 외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개념을 모르면 영어 암기와 의미 개념을 같이 배워야 하니 영어가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요.”
아이들에게는 아이에게 적합한 영어교육법이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어린이에게도 성인에게나 맞는 학습법을 활용하는 경향이 많다.
노경희 교수는 “어린이 언어 습득의 가장 큰 특징은 암묵적 학습”이라고 말한다. 개별 단어나 문법을 통해 언어를 익히는 명시적 학습은 성인에게는 적합하지만,
어린이들의 경우 맥락 속에서 의미를 알아가는 암묵적 학습이 적절하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설명으로 가르치는 것보다스스로 터득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마치 자전거를 배우는 듯 영어를 맥락 속에서 직접 접하면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영어를 효율적으로 즐겁게 배우는 법
노경희 교수는 영어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지 않는 국내 환경에서 질 좋은 영어를 가장 효율적으로 배울 수 있는 방법으로 ‘영어책 읽듣기’를 꼽는다. ‘읽듣기’란 읽기와 듣기를 동시에 하는 것이다. 가령, 영어책을 보면서 동시에 그 책을 읽는 영어 원어민의 오디오를 듣는 것이다. 학령기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 연구들에 따르면 영어를 읽기만 하거나 듣기만 한 아이들보다 읽듣기를 한 아이들이 훨씬 잘 배웠다고 한다.
영어를 배우려면 반복 학습이 필요한데, 기계적으로 문장을 반복해서 외우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금세 흥미를 잃어버릴 수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있는 그림책으로 영어 읽듣기를 하면 영어 배우기의 핵심인 ‘패턴’과 ‘어휘’를 자연스럽게 반복해서 익힐 수 있다. 이렇게 영어 패턴과 어휘가 내재화되면 말하기 능력도 나아진다.
그래서 노경희 교수는 조기 영어교육 대신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 동시에 읽기와 듣기를 시작하는 ‘읽듣기’ 교육법을 꾸준히 알려왔다.
실제 경험과 연구 결과를 담은 내용을 지난해 출간한 저서 『영어책 읽듣기의 기적』을 통해서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도 했다.
맞춤형 교육을 위한 영어책 읽듣기
영어책 읽듣기를 통한 자기주도학습은 최근 교육 현장에서 부딪히는 학생들의 영어 능력 개인차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기도 하다. 어떤 아이들은 유아기부터 사교육을 통해 영어를 배웠지만,
어떤 아이들은 초등학교 입학 후에야 알파벳을 익히기 시작한다. 더구나 일주일에 두세 번 있는 영어수업으로 학생들의 영어 능력을 키우기는 어렵다.
영어 외에 다른 과목도 소홀할 수 없기에 특정 과목의 시수를 늘릴 수도 없다.
“아무리 훌륭한 교수법을 적용한다고 해도 입력량이 충분하지 않으면 영어 능력을 키우기가 어렵습니다. 운동이나 악기처럼 영어도 스스로 해야 하는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영어책 읽듣기를 하면 학생 개개인의 흥미나 관심사를
반영할 수 있고 학생 사이의 개인차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공교육 차원에서 인공지능 스피커나 토킹펜(Talking pen) 등 다양한 교육 도구를 지원한다면 아이 스스로 영어책을 읽으면서 듣기와 말하기까지 함께 익힐 수 있어요.”
노경희 교수는 “영어교육은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기보다 거시적 안목으로 계획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곱 살 아이가 원어민과 같은 발음으로 영어를 구사하면 부모 입장에서 뿌듯할 수는 있지요.
그러나 영어를 진짜 잘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단기적인 성과에 연연하기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아이들의 생각머리에 맞는 영어교육법으로 자녀의 미래 경쟁력을 키워주세요.”
아이들이 영어를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 지겨운 학습이 아닌 재미있는 여행이 되려면, 무조건 열심히 걷기보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잠시 머리에 머물렀다 날아가는 영어가 아닌 스스로 터득한 영어를 통해, 우리 아이들이 진정으로 즐거운 여행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