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영문학자이자 수필가 장영희 교수의 두 번째 수필집입니다. 제목처럼
그의 삶은 고난 속에서 하루하루가 기적과 같았습니다. 소아마비로 인한 신체적 제약과 사회의
편견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역경을 딛고 일어선 그의 삶은 많은 이에게 희망과
긍정의 메시지를 전하며 특별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글 황인희 역사 칼럼니스트
대학교 졸업 후 줄곧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월간 「샘터」 편집장을 끝으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다수의 책을 저술했고, 현재 역사 칼럼니스트, 인문 여행 작가로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사진 및 자료 제공: 서강대학교, 장영희 교수 유가족, 샘터사
*사진 및 자료 제공: 서강대학교, 장영희 교수 유가족, 샘터사
장애에도 꺾이지 않은 배움의 의지
장영희 교수는 학창 시절 성적이 우수했지만, 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 소아마비 장애인이 중학교 입시에
도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장애가 있는 학생에게 시험을 볼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입니다. 이름난 영문학자였던 아버지 장왕록 교수는 딸의 진학을 위해 “제발 시험이라도
치를 수 있게 해달라”라고 학교 측에 간청해야 했습니다.
아버지 덕분에 장영희 교수는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고등학교에서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었습니다.
체력장 점수를 받을 수 없었던 장영희 교수는 필기시험에서 거의 만점을 받아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어렵게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지만, 대학교 진학의 벽은 더 높았습니다.
장왕록 교수는 서강대학교 영문과 학과장이던 제롬 브루닉 신부를 찾아가 또다시 간청했습니다. 이미 여러
대학교에서 장애를 이유로 거절당한 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브루닉 신부는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험은 머리로 보는 거지 다리로 보나요? 장애인이라고 해서 시험 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장영희 교수는 그때 일에 대해 아버지가 “마치 내가 말도 안 되는 것을 물어본 바보처럼 말이야. 그렇게
행복한 바보가 어디 있겠냐”라고 두고두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입학시험을 치른 장영희 교수는
합격해 서강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쳤습니다. 당시 서강대학교에는 영문학 박사과정이 없어
다른 대학교를 알아보던 중, 한 대학교 면접관은 “우리 학교는 학부생도 장애인은 안 받는다”라며 단칼에
거절했다고 합니다. 결국 장영희 교수는 국내 박사과정을 포기하고 1978년 올버니에 있는 뉴욕주립대학교를
찾아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 세상과 마주하다
불편한 몸으로 홀로 버텨야 하는 유학 생활이니 그가 겪은 고초는 말로 다 못할 정도입니다. 그중 최악은 박사학위
논문 원고를 도난당한 것입니다. 수없는 나날, 잠 못 이루며 쓴 단 한 권의 원본이었습니다. 그는 손끝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을 만큼 낙담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꼼짝없이 누워만 있던 장영희 교수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괜찮아, 논문쯤이야 다시 쓰면 되지”라는 엽서도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장영희 교수는 다시
1년을 보내며 새롭게 완성한 논문 첫 장에 이런 글을 써넣었습니다.
“내 논문 원고를 훔쳐 가서 내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 다시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준 도둑에게 감사합니다.”
또 2001년, 하버드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근무하던 장영희 교수는 거주 중인 보스턴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고장으로
큰 불편을 겪었습니다. 아파트를 소유한 부동산 회사는 엘리베이터 수리에 늑장을 부렸습니다. 7층에 살던 장영희
교수는 일상적인 생활을 위해 아파트를 옮겨달라고 요청했지만, 부동산 회사는 법적 책임이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그때부터 장영희 교수와 보스턴 최대 부동산 회사의 법적 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7층까지 계단을 오르내리며
생활을 이어갔고, 이웃의 신고로 소방차가 출동하는 소동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보스턴 글로브’ 수도권 뉴스
1면에 실렸고, NBC는 저녁 뉴스에 장영희 교수와의 인터뷰를 방송했습니다. 결국 부동산 회사는 잘못을 인정하고
장애인 세입자에 대한 배려를 약속했습니다. 장영희 교수의 도전과 의지가 굳건해 보이던 세상에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1974년 대학교 4학년 때 친구들과
▲서강대 프라이스 신부 생일축하에 참석한 장영희
교수
▲2007년 어머니 생신을 맞아 온 가족과 함께
▲1974년 대학교 4학년 때 친구들과
▲서강대 프라이스 신부 생일축하에 참석한 장영희
교수
▲ 2007년 어머니 생신을 맞아 온 가족과 함께
지식보다 따뜻한 사랑을 가르친 스승
1985년 귀국한 장영희 교수는 모교인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학생들은 방대한 원서를 읽어야
했고, 정기적으로 퀴즈 시험을 보고 과제물을 제출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엄격한 교수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을 생각하면 감사하다”라며 학생들이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가르쳤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 학기 동안 수강한 거의 100명에 달하는 학생들의 이름을 단 한 달 만에 모두 외웠고, 종강일에는
직접 만든 책갈피와 자필 서명이 담긴 자신의 책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선물하며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습니다.
그래서인지 제자들은 그를 ‘부모나 친구에게 알리지 못하는 고민까지 털어놓을 수 있었던 분’, ‘학생에게 먼저
다가가는 교육자이자 조언자’로 회고합니다.
2005년 3월 암 투병을 마치고 대학 강단에 다시 선 장영희 교수(©한영희 작가)
2005년 3월 암 투병을 마치고 대학 강단에 다시 선 장영희 교수(©한영희 작가)
장영희 교수가 남긴 희망의 메시지
조선일보 칼럼 ‘문학의 힘’에 장영희 교수는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뒤돌아보면 내 인생에 이렇게
넘어지기를 수십 번, 남보다 조금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기에 좀 더 자주 넘어졌고, 그래서 어쩌면
넘어지기 전에 이미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중략) 그리고 그렇게 많이 넘어져 봤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난 확신한다”라고.
생의 마지막까지 희망을 이야기한 장영희 교수가 세상을 떠난 뒤, 유족들은 그의 인세와 퇴직금을 모아
학교에 기부했습니다. 서강대학교는 이 기부금으로 ‘장영희 교수 장학금’을 조성해 어려운 환경에서 학업을
이어가는 학생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따뜻하면서도 엄격했던 그를 여전히 ‘희망’으로 기억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