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자서전을 그리는 학자이자 예술가
신혜우 박사는 ‘그림 그리는 식물학자’, ‘식물을 연구하는 화가’로 통한다. 그는 학부 때 생물학을 공부하고, 식물분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패션 디자인을 복수전공하기도 했다. 그러다 평소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지도교수가 식물을 그려보라고 제안하면서, 흑백으로 식물 그리는 일을 시작했다.
“열심히 하면, 국내 식물 연구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말이 그의 손을 더 부지런히 움직이게 했다.
사명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운명이었다. 좋아하는 일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신혜우 박사에게 축복이기도 했다. 시켜서 그리고 좋아서 또 그렸다.
식물에 색을 입히고, 외국 박사의 작품들을 보며 점점 실력을 쌓았다. 작품을 평가받고자 국제 전시에 출품했다가 덜컥 상을 받기도 했다.
신혜우 박사는 2013년과 2014년 2018년 영국왕립원예협회의 식물세밀화 국제전시회에 참여해 세 번 모두 금메달과 최고전시상 트로피, 심사위원스페셜 트로피를 받은 유일한 박사다.
신혜우 박사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식물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에는 식물의 정보와 특징, 형태, 생애가 세부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림이면서 식물의 자서전인 셈이다. 동·식물, 건물, 사물 등을 세밀하게 표현하는 세밀화나 식물 관련 예술 활동인 보테니컬(botanical) 아트를 하는 작가는 많지만,
신혜우 박사처럼 식물학자가 직접 식물을 그리는 일은 드물다. 그의 작업장도 조금 특별하다. 잘 깎여진 연필과 지우개, 물감 말고도 현미경, 표본, 식물도감 등이 집안 가득 놓여 있다.
식물이 서로 다른 종(種)을 존중하며 살듯, 그의 작업실에도 과학과 예술이라는 서로 다른 종이 조화롭게 공생한다.
식물을 사랑하는 마음, 작품으로 꽃피다
혹자는 “식물학자와 화가로서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이 힘에 부치지 않느냐”라고 묻지만 여기에 신혜우 박사는 “굳이 두 분야를 나눌 필요도, 하나의 전공이나 직업에 매몰될 필요도 없다”라고 답한다.
울릉도·독도 연구소와 함께한 식물 7종의 전 생애 과정을 담은 그림 프로젝트 중 하나인 섬기린초. 2018년 영국왕립원예협회 · 2019년 미국 메릴랜드 홀에서 전시됐다.
“저는 식물학과 그림이 서로 다른 분야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식물학은 세부적으로 식물발생학·식물형태학·식물생태학·식물유전학·식물분류학 등의 여러 분과로 나뉩니다.
식물을 그리는 것은 그중 식물 형태를 설명하는 데 아주 좋은 방법이고요. 저는 연구가 지루해질 때는 그림을 그리고, 그림이 지루해질 때는 연구를 해요.
그래서 이렇게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이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할 수 있는 노하우라고 생각합니다.”
‘그림 그리는 식물학자’로서의 가능성은 아주 오래전 발아했다. 어릴 적부터 신혜우 박사는 어머니가 만든 정원과 베란다에서 오래도록 식물을 탐닉했다.
쑥이 올라오는 봄이면 온종일 여린 쑥처럼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고, 여름이면 미루나무 아래에 서서 팔랑거리는 잎을 한참 올려다봤다.
아직 여물지 않은 꽃봉오리를 벌리고, 열매를 반으로 갈라 관찰하는 어린 신혜우 박사를 보고, 오빠는 ‘식물 파괴자’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식물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식물학 연구로 이어졌고,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어머니의 영향이 더해져 오늘날의 열매를 맺었다.
현재 신혜우 박사는 식물의 입장에서 사유하고, 식물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연구 결과와 작품을 남긴다.
가장 아름다운 식물 그림은 ‘잘 그린’ 그림이 아닌, ‘식물답게, 식물 그대로를 담은’ 그림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제 작품에서 감동을 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이유는 저마다 다를 거예요. 다만 제 생각에 제 그림을 보고 ‘아름답다’라고 여기는 공통적인 이유는 원래 그 식물이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림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본래 식물이 아름다운 것이죠.”
식물처럼 살아가라, 그리고 자연을 살게 하라
세계적으로 이름났지만, 상업적 활동은 최대한 자제한다. 형태학, 생태학적으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은 식물,
즉 기록으로 남겨야 할 식물을 먼저 그리는 것이 식물학자이자 박사로서 그의 원칙이다.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그림일지라도 정확하게 그린다는 원칙도 있다.
관념적으로 꾸미지 않고, 식물 그대로를 진정성 있게 그려야 보는 사람도 아름답다고 여길 것이라는 믿음.
식물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이다.
“제가 80세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가정해도 평생 남길 수 있는 작품이 많지 않아요. 그리는 식물 종에 관해 조사하고 전 생애를 관찰하고 그림으로 옮기기까지 최소 1년이라는 시간이 걸리니까요.
그래서 경제적 이득이나 명예를 따지지 않고, 제가 남기고 싶은 것을 그리려 합니다.”
신혜우 박사가 바라는 것이 또 있다.
사람들이 기후 변화, 환경 보호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우리 주변의 식물이 매해 그대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상은 기후 변화로 인해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식물이 멸종 위기에 처하거나 멸종한다. 식물학자인 그의 눈에는 또 식물의 눈에는 세상의 변화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인다.
“식물은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요. 수많은 종이 함께 모여 하늘을 향해 서서 살아가죠. 하지만 사람들은 이기적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너무나 쉽게 식물을 소비하죠.
식물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종은 바로 사람일 거예요. 기후 변화가 일어나고 식물 종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도 제대로 경각심을 품지 않고요.
인간의 멸종을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듯 식물의 멸종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덕수궁 전시를 위한 자료 조사표본집. 나무의 씨앗으로 그 나무의 위치를 표기했다.
‘호모 사피엔스’도 하나의 식물도 동등한 하나의 종(種)이니까요.”
지금의 삶에 충실한 것, 하늘 위 오직 한 점을 바라보며 사는 것, 세상의 모든 종을 존중하며 어울려 살아가는 것.
신혜우 박사는 식물을 닮았다. 여려 보이지만 한없이 강인한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 강인함으로 그는 앞으로도 사람들에게 식물의 아름다움을, 우리가 지켜야 할 자연의 위대함을 알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