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재정위기를 넘겨준 기적의 소나무
1962년 7월 18일 미국 의회에서 한국에 대한 원조 규모 삭감에 관한 안건이 상정되었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등 정치 상황이 불안한 데다 뚜렷한 경제발전도 없는 상황에서 10년이 넘도록 계속 원조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대두한 것이다.
이때 위스콘신 출신 상원의원 알렉산더 와일리(Alexander Wiley)는 한국 원조는 헛된 일이 아니었다면서 현신규 박사가 개발한 기적의 소나무(Wonder Pine Tree)가 미국의 산림을 푸르게 하고 있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그 결과 원조 규모 삭감안은 부결되어 한국은 지속적으로 미국의 원조를 받을 수 있었다.
기적의 소나무를 개발한 현신규 박사는 누구일까?
현신규 박사 모습
[출처: 국립산립과학원 공식블로그]
알렉산더 와일리 의원
[출처: wisconsinhistory.org]
사명을 품은 나무과학자가 되기까지
현신규 선생은 1911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한학자인 아버지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성에 있는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그가 나무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1930년 수원고등농림학교(이하 수원고농) 임학과에 진학하면서부터다.
현신규 선생 은형의 영향으로 철학과 문학을 전공해 일본 유학을 원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수원고농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수원고농은 조선총독부가 농림 분야에서 일할 관리와 조선 내 중등학교 교원 양성을 목적으로 설치한 농업 교육기관이었다.
수원고농은 교사와 학생 대부분이 일본인으로 당시로써는 상위 전문학교였다. 그러나 현신규 선생은 조선인으로서 받는 차별 뿐 아니라 공부 분야가 자신의 뜻과 맞지 않아 오랜 기간 방황했다.
그러던 중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읽고 깨달음을 얻어 학문에 매진하게 되었다.
“누구든지 자기 사명을 알려 하고 또 그 사명대로 살려 하거든 지금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 곧 자기의 사명을 발견하는 길이요, 그 사명대로 사는 것이 천직이다.”
이후 현신규 선생은 학교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수원임학회’의 간사로 활동하면서 학회지에 연구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학교생활을 하였다.
1933년 현신규 선생은 규슈제국대학(이하 규슈대학) 농학부 임학과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조림학을 전공으로 택한 그는 식물생리학을 함께 연구했다.
조림학은 임학이고 식물생리학은 농학 분야였지만 생리학이야말로 조림학의 기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현신규 선생이 앞으로 임목 육종학을 연구하는 기반이 되었다.
평생을 나무와 함께하는 연구자의 삶
1936년 졸업과 함께 귀국한 현신규 선생은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 조림과에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이곳에서 ‘백두산록 자원조사대’의 일원으로 백두산의 임상(林相)을 조사하면서 임업적 가치를 평가하는 연구를 했고, 개인적으로 소나무 조림에 대한 연구에 매진했다.
그가 소나무를 연구 소재로 선정한 이유는 소나무가 우리나라 전역에 널리 퍼져 있는 만큼 국내 조림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임업 시험장 업무와 연구를 병행하던 그는 1943년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 다시 규슈대학에서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시아태평양전쟁 막바지였던 1945년 조선으로 다시 돌아온 뒤 수원농림전문학교에서 조교수로 교편을 잡으며 연구자료를 정돈해 규슈대학으로 보냈고, 1949년 한국인 최초로 임업 분야 박사학위를 받았다.
해방 이후 미 군정청은 일본에서 귀국한 후 수원농림전문학교(수원고농을 개편)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현신규 선생을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 근무 경력을 이유로 조선임업시험장 장장(場長)으로 임명했다.
임업시험장을 인수해 새로 정비하던 그는 한국전쟁으로 부산 피란길에 올랐다. 이때 한국 연구자를 미국에 초청하는 미국 국무부의 한국 재건 정책에 따라 1951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산림육종연구소로 연수를 갈 수 있었다.
이곳에서 세계 여러 수종을 교배해 새로운 나무를 만드는 현장을 목격한 그는 임목육종 기술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이때 육종 연구를 진행하던 소나무의 품종개량 연구에 착안해 한국의 자연환경에 적합한 ‘리기테다소나무’ 개발에 성공했다.
리기테다소나무는 척박한 환경에서 잘 자라지만 목재의 질이 좋지 않은 리기다소나무와 목질이 고르고 생장력이 우수하지만 추운 지방에서 잘 자라지 못하는 테다소나무의 장점을 물려받은 교잡종 소나무다.
현신규 선생이 개발한 리기테다소나무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성공한 교잡종 나무로 평가받고 있다.
현신규 선생은 생전에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평생을 나무하고만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나무는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내가 나무 속에 있는지 나무가 내 속에 있는지조차 모를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1960년대 초 경기도 문산역 부근 광경은 서부 개척 시대 미국을 연상시킨다.
[출처 : 「민둥산을 금수강산으로」, 이경준·김의철, 기파랑, 2010, p.53]
헐벗은 국토에 푸른 옷을 입히다
우리나라는 국토 면적의 70%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군수물자로 사용하기 위해 목재를 남벌하면서 산림이 황폐해졌다.
심지어 소나무를 베고 남은 그루터기까지 파헤쳐갔다. 군사용 유류 대용품으로 쓰고자 송진을 남김없이 채취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그 피해는 더욱 극심해졌다. 전후 혼란과 가난, 행정 공백 상태에서 땔감으로 쓰기 위한 생계형 남벌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956년 당시 풀과 나무가 전혀 없는 독나지(禿裸地)가 전체 삼림 면적의 10% 이상이었고, 민둥산이 전체 산림의 50% 이상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신품종 포플러를 설명하는 현신규 박사(1965)
[출처 : 산림청 국립수목원 홈페이지 보도 자료.
故 현신규 박사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은 현신규 선생을 농촌진흥청장에 임명하는 파격을 단행했다.
농학자가 아닌 임학자를 임명한 것은 당시 우리나라 농촌 진흥이 산림 복구에 달려 있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현신규 선생은 산림 복구를 위해 추위와 병충해에 강하면서 기존 소나무보다 생장이 빠른 리기테다소나무의 보급을 고려했으나
산림의 급속한 사막화로 인한 생태계 파괴를 시급하게 방지하기 위해 이보다 적합한 수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른 시일에 산을 푸르게 하는 속성수인 포플러가 척박한 산을 개선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포플러 품종을 도입했다. 재래종을 육종하기보다 외국산 품종을 도입해 국내에 적합하게 개량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결과 이태리포플러가 국내 환경에 적합하다는 결론을 얻고 육종을 개발해 보급했다.
개량형 이태리포플러는 소나무의 10배, 낙엽송의 8배 정도 빨리 자라는 속성수의 특징을 한껏 드러내며 국토를 푸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개량형 이태리포플러는 평지나 하천 부지에서만 잘 자라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현신규 선생은 우리나라의 가파른 산악 지대에도 잘 자라는 나무 육종 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강원도 포천시 신북면 천전리에 조성된 은수원사시 조림지
[출처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이때 유럽이 원산이지만 병충해에 강하고 다른 포플러보다 건조한 땅에서 잘 자라 이미 토착화되어 있던 은백양나무와 당시 그가 재직하고 있던 임목육종연구소가 위치한 수원 근방에서 자생하는 재래종으로
산지의 조림수종으로 이용도가 높았던 수원사시나무에 주목했다.
은백양과 수원 사시나무를 몇 년간 잡종 교배해 육종 실험을 한 결과, 현신규 선생은 평지가 아닌 산지에서도 수입 개량종인 이태리포플러보다 성장력이 우수한 교배종 포플러를 개발했다.
이 교배종은 1968년 ‘은수원사시’로 명명되어 우리나라 산하에 널리 식재되었다. 은수원사시는 빨리 자라는 데다 짙은 그늘을 만들고 오염에도 견디는 힘이 강해 지금도가로수종으로 사용되고 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은 현신규 선생의 공로를 치하하며 5·16민족상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그의 성을 따서 은수원사시를 ‘현사시’로 바꿔 부를 것을 제의했고, 이 때문에 한때 은수원사시는 현사시나무로 불리기도 했다.
국력이나 다름없는 ‘산림 부국’을 위한 헌신
현신규 선생은 학문적 성과를 곧바로 현장에 연결하고자 부단히 노력한 학자였다. 1953년 1월 미국 연수 이후 돌아오자마자 당시 부산에 있던 피란 국회의 농림분과위원장 박정근 의원을 만나 “전쟁으로 파괴된 산을 하루빨리 복구하는 것이 시급하지만, 아무 데서나 종자를 채취해 조림하면 산림이 쇠퇴하니 조림은 반드시 개량된 품종으로 해야 한다”라고 역설했고, 소규모 예산을 지원받아 임목육종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뿐만 아니라 30여 년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임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후학들을 양성했고, 1960년에는 한국임학회, 1969년에는 한국육종학회를 창설해 활발히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항상 “산림의 성쇠가 국력의 성쇠와 비례한다”라고 주장했다.
1965년 은사시나무 개발 독려차 임목육종연구소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농림부 산림국이 전 국토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산림을 관할하고 있는 만큼 산림국을 산림부로 독립, 승격시켜 산림녹화사업을 체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그의 노력으로 1967년 산림청이 신설되고 조림사업이 국가적 차원의 대단지 조림으로 전환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그는 한국의 임학 국제화와 세계화에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54년 프랑스 파리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이래 리기테다소나무, 은사시나무 같은 새로운 품종 개발을 소개하면서 활발한 학문적 교류를 이끌었던 그의 노력은 1962년 미 의회에서 리기테다소나무를 기적의 소나무로 평가하며 미국의 원조 지속 결정을 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가에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1962년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1964년 3·1 문화상, 1978년 5·16 민족상, 198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현신규 선생의 노력 덕분에 숲의 울창한 정도를 나타내는 임목 축적량은 1947년 8.8m³/ha로 즉시 사방공사를 하지 않으면 산사태가 나도 이상할 것 없었던 상태에서 2020년 현재 168.1m³/ha로 증가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산림위원회(COFO) 발표에 따르면 1990년부터 2015까지 25년간 헥타르당 임목 축적량은 1위 슬로베니아(116m³), 2위 폴란드(102m³)에 이어 한국(98m³)이 3위를 기록했다. 1982년 FAO는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산림녹화에 성공한 유일한 개발도상국”이라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은 산림 부국을 위해 헌신한 현신규 선생을 기리며 2001년 4월 국립수목원 숲의명예전당에 헌액하고, 2003년에는 과학기술인 명예의전당에 헌정했다.